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백화점의 얼굴’, 그 웃음 뒤편엔…

1층 화장품 판매원들의 중노동 실상…
하루 종일 서서 손님 맞고 엄격한 감시 속에 일하다 밤 10시 다 돼서야 퇴근
등록 2010-02-11 17:02 수정 2020-05-03 04:26

백화점은 자본과 상품으로 사람들의 욕망을 흔들어 깨운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린다. 경제불황에도 2009년 백화점 업계의 매출은 전년 대비 10% 성장했다. 백화점 매출 신장의 효자는 명품과 화장품. 특히 ‘백화점의 꽃’으로 불리며 1층 매장에 입점해 있는 화장품 매장은 백화점 이미지 마케팅과 연계 소비를 이끄는 중요한 요소다.

백화점 1층에서 제일 먼저 손님을 맞고, 제일 늦게 손님을 배웅하는 화장품 판매원은 ‘백화점의 얼굴’이다. 하지만 화려한 화장품 판매원의 얼굴 뒤에는 열악한 노동환경이 숨어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백화점 1층에서 제일 먼저 손님을 맞고, 제일 늦게 손님을 배웅하는 화장품 판매원은 ‘백화점의 얼굴’이다. 하지만 화려한 화장품 판매원의 얼굴 뒤에는 열악한 노동환경이 숨어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외모·복장 일일이 관리받는 ‘화려함의 상징’

지난해 12월 현대백화점이 결산한 자료에 따르면, 화장품을 한 번이라도 구매한 고객이 백화점에서 지출한 금액은 백화점 전체 매출의 76.5%를 차지했다. 화장품을 사는 사람이 그만큼 백화점을 자주 찾고 다른 상품까지 사간다는 얘기다. 이렇게 매출 효과와 집객 효과가 높다 보니 ‘백화점 1층은 화장품’이란 법칙이 오랫동안 자리잡아왔다. C백화점 홍보담당자는 “화장품 매장의 화려한 조명과 향수 냄새 등이 쇼핑객을 유혹한다”며 “일본 백화점을 벤치마킹하면서 지켜져온 법칙”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화장품 판매원은 ‘백화점의 얼굴’이다. 이들은 제일 먼저 손님을 맞고, 제일 늦게 손님을 배웅한다. 백화점 전 층을 통틀어 가장 까다로운 용모 규정이 이들에게 적용된다. 아침에 출근해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용모 꾸미기다. 이들은 백화점 내 다른 판매원처럼 검정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 브랜드별로 고유의 유니폼이 따로 있다. 스튜어디스처럼 보이는 꼭 맞는 흰색 정장, 피부과 의사를 떠올리게 하는 흰색 가운, 연예인처럼 어깨를 드러낸 과감한 의상 등 다양하다.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엔 화장을 한다. 스킨 제품을 파는 라인에서는 수수하고 깨끗한 피부 표현이 필요하다. 메이크업 제품 라인에서는 세련되고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다. 쇼핑객은 판매원의 외모에서 브랜드 화장품의 효능을 읽으려 한다.

화장품 판매원은 각 입점업체에 소속된 신분이지만 때론 백화점이 입점업체 본사보다 외모 조건을 까다롭게 따지기도 한다. 엄연히 입점업체의 정규직 사원인데도 백화점 쪽에서 따로 면접을 보는 경우도 있다. B백화점 판매원 유지연(가명)씨는 “백화점 관리자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외모의 판매원에겐 ‘브랜드 이미지와 외모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눈치를 주고 갖은 트집을 잡아 쫓아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백화점 관리자의 감독권은 외모에서 그치지 않고 서비스 평가까지 이어진다. 고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고객만족도 조사(CS 모니터링)와 미스터리쇼퍼 제도를 운영하며 몰래 판매원들의 친절도를 평가한다. 손님을 가장한 백화점 직원이 매장을 방문해 점원들의 친절지수를 매긴다. 점수는 이들을 고용한 입점업체에까지 통보된다. 벌점이 쌓이면 징계를 받거나 더는 백화점에서 일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매장 내 대기 자세, 인사 태도 따위를 감시당하며 일하는 백화점 판매원은 늘 주변을 살피며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A백화점 노원정(가명)씨는 “백화점은 본사 직원보다 더 엄격한 통제 규율을 적용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고객 불만이 접수됐다며 출근하는 백화점 직원들을 상대로 맞이 인사와 배웅 인사를 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하는 사람의 인격은 개의치 않는다. A백화점의 다른 지점에서 일하는 황유리(가명)씨는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관리자도 있다”며 “이들의 폭언과 불합리한 요구도 웃으며 들어줘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손님·관리자에겐 무한 복종만이

관리자나 손님이나 무한 복종을 원하는 건 마찬가지다. 백화점이 친절해질수록 노동자의 감정 스트레스는 더욱 커진다. 반말하는 고객은 그나마 양반이다. 다 쓴 용기에 다른 제품을 채워와 교환을 요청하는 사람, “백화점은 다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하는 사람까지 ‘진상’은 차고 넘친다. 그래도 웃으며 상대해줘야 한다. 노원정씨는 “우리도 유니폼 벗고 어디 가면 손님인데, 이런 손님을 대할 때면 기운이 쭉 빠진다”면서 “판매원을 낮게 깔보는 시선이 느껴진다”고 했다.

하루 중 백화점이 가장 바쁜 시간은 점심시간부터 저녁 퇴근시간 무렵까지다. 이때는 손님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다. 화장품 테스트부터 각종 피부 상담까지 들어주며 상품 판매에 열을 올린다. 손님이 뜸한 시간엔 한가해 보여도 할 일이 많다. 고객에게 상품 정보와 백화점 행사를 안내하는 콜 서비스, 택배 물품 발송, 포인트 정리 등을 틈날 때마다 처리해야 한다.

백화점에서는 ‘얼마나 팔았느냐’가 노동자의 능력이 된다. 브랜드별 매장 책임자인 매니저는 수시로 매출 압박을 받는다. 15명이 일하는 유명 브랜드 화장품 코너의 한 달 매출이 7억원 정도로 백화점 한 코너는 기업에 가깝다. 더 높은 매출을 뽑으려면 백화점 관리자의 관리·감독은 점점 더 심해진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이들에게 의자는 여전히 장식용이다. 손님도, 관리자도 의자에 앉아 있는 직원을 곱게 보지 않는다. 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서서 일하는 여성 근로자에게 의자를 제공하는 각종 정책과 캠페인을 시행했지만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황유리씨는 “전화 받을 때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는 것도 벌점을 주는 상황에서 의자에 앉는 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남들에게 보이는 매장에서 앉을 수 없다면 휴게실 의자에라도 앉아 부은 다리를 주물러야 한다. 하지만 백화점 휴게실 환경은 터무니없다. 백화점 1층에 일하는 노동자는 화장품과 명품, 잡화 매장 판매원까지 합쳐 보통 150명이 넘는다. 창고처럼 좁고 지저분한 휴게실엔 고작 10명이 들어갈 수 있다. 별관을 새로 지어 화려해진 B백화점 본점 1층 여자 휴게실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어두침침한 휴게실엔 의자 몇 개와 정수기 하나가 놓여 있다. 그나마 여기에 사람이 꽉 차면 쉬려던 발걸음을 직원용 계단이나 매장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밝고 향기로운 매장과 어둡고 먼지만 날리는 휴게실은 천지차이다. 화려한 백화점 화장품 판매원의 얼굴에는 이런 열악한 노동 환경이 숨어 있다.

쉴 권리 없는 노동자는 끼니 챙기기도 쉽지 않다. 저녁 식사는 대체로 건너뛴다. 이렇게 되면 제대로 된 하루 식사는 점심 한 끼다. 그나마도 대충 때우듯 서둘러 먹는다. 내가 여유 부리고 늦게 먹고 오면 매장 동료가 식사를 거를 수도 있다. 30분 연장 영업을 하게 되면 간혹 간식거리나 식사를 제공해주는 백화점이 있지만, 직원식당에 제시간에 가서 챙겨 먹기가 쉽지는 않다. 영업이 끝나도 할 일은 많다. 재고 확인, 매출 전표 등록 따위 일을 처리하다 보면 밤 10시 퇴근이 빈번하다. 퇴근길에 주린 배를 주전부리로 채우거나 지쳐 쓰러져 밥보다 달콤한 잠을 선택한다.

강한 조명·장시간 노동으로 각종 질환 앓아

열악한 노동 환경은 예외 없이 노동자의 건강에 적신호를 보낸다.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백화점·대형마트 등 주요 상업시설 근로자 중 서서 판매를 수행하는 근로자의 약 78%는 최소 9시간 이상 서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은희 로레알 노조위원장은 “강한 조명에 장시간 노출돼 있는 화장품 판매원은 서서 일하는 노동자가 쉽게 걸리는 하지정맥류나 자궁하수증을 포함해 안구건조증, 갑상선 질환 등에 시달리고 있다”며 “산재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나마 노조가 있어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는 곳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매장별로 주 5일제 근무나 시차제를 적용해 직원들 숨통을 터준다. 하지만 이들의 휴식은 다른 이의 시간 노동을 담보로 얻는 임시방편이다. 노원정씨는 “인력이 부족한 매장에선 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며 “주 1회 휴무제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실장은 “서비스산업이 발전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유통업 서비스직 노동자의 노동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며 “휴식 시간 보장이나 인원 확충 등 제도적인 해결 방안을 찾는 한편 고객이나 관리자가 서비스 노동자를 인격체로 대우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