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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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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날라리야

2월은 몰아 쉬는 달…
한 달 축제 연 고대 그리스인,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쉰 한국 농경문화
등록 2010-02-10 18:27 수정 2020-05-03 04:26

2월은 몰아 쉬는 달이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인간은 휴식과 축제의 날을 정해 몰아 쉬었다. 고대 그리스인, 중세 유럽인, 심지어 조선 시대 농민도 그랬다. 오직 오늘의 한국인만 예외다. 설 연휴 사흘에 쫓기는 한국인에게 그런 ‘역사적 사실’은 꿈같은 이야기다.

유럽의 카니발은 고대 로마의 ‘2월 축제’가 기독화되면서 생겨났다. 민중은 카니발을 빌려 권력을 풍자하고 조롱했다. 지난해 1월 독일 프라이부르크 카니발 모습. 연합/AP

유럽의 카니발은 고대 로마의 ‘2월 축제’가 기독화되면서 생겨났다. 민중은 카니발을 빌려 권력을 풍자하고 조롱했다. 지난해 1월 독일 프라이부르크 카니발 모습. 연합/AP

거래도 전쟁도 멈추고 쉬는 ‘디오니시아’

고대 그리스인들은 2월이 되면 ‘안테스테리아’라는 축제를 벌였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였다. 한번 축제가 열리면 적어도 사흘 이상 계속됐다. 사람들은 고주망태가 되도록 와인을 마셨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축제 가운데는 남성 시민만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안테스테리아’는 여성, 어린이, 노예 등도 즐겼다. 술잔 앞에 모두 평등해지는 축제였다.

3월이 되면 ‘디오니시아’ 축제를 또 열었다. 역시 사흘 이상 계속됐다. ‘안테스테리아’가 농경적·농촌적 축제라면 ‘디오니시아’는 종교적·도시적 축제다. 특히 여러 연극이 공연됐다. 부자들이 상영 비용을 부담하고 수만 명의 시민이 이를 관람했다. 연극 기간에는 모든 상거래가 중단됐다. 전쟁도 멈추었다. 모두가 쉬었다.

고대 바빌로니아도 비슷한 시기에 축제를 벌였다. 그들은 7일을 한 주로 묶고 1년을 열두 달로 나눈 달력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바빌로니아 달력의 1월은 오늘날의 3월에 해당한다. 춘분 무렵을 한 해의 처음으로 봤다. 이 달력에 따라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될 때, 즉 오늘날의 2월에 해당하는 때가 오면, 그들은 11일 또는 12일 동안 내리 놀았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축제를 벌이는 11일 동안 천체의 운동이 멈추고 시간이 정지한다고 믿었다. 이 축제에서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임시 왕’을 뽑았다. 나흘 동안 ‘임시 왕’을 조롱하고 놀렸다. 권력을 전도하는 것이다.

‘2월 축제’는 고대 로마 시대에도 계속된다. 고대 로마인들은 농업과 문화의 여신인 ‘케레스’를 숭배하는 축제를 2월 초에 열었다. 2월 중순에는 양을 보호하는 목신을 기리는 목신제를 열었다. 2월18일에는 전쟁의 신 ‘퀴리누스’를 위한 축제, 19일에는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는 축제, 22일에는 고인이 된 자를 기리는 축제를 열었다. 축제일이 징검다리처럼 박혀 있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2월의 나머지 날들은 축제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2월 한달 내내 어울려 놀았다.

고대 로마인들은 12월에도 집중적으로 쉬었다. 12월과 2월의 여러 축제를 묶어 ‘겨울 축제’라 불렀다. 동지에 해당하는 12월 중·하순의 9일 동안 농경 신인 ‘사투르누스’를 숭배하는 축제를 벌였다. 사투르누스 축제 때 로마인들도 위계질서를 뒤집었다. 주인은 하인으로, 하인은 주인으로 변장했다. 주인 옷을 입은 하인이 하인 옷을 입은 주인을 실컷 조롱했다. 주인과 하인은 똑같은 술과 고기를 먹었다. 이 축제가 끝날 무렵인 12월25일에는 태양 신 ‘미트라’를 기리는 축제를 벌였다. 미트라 축제가 끝나면 어린이를 위한 축제가 이어졌다.

‘다신교’에 기반한 고대의 여러 축제를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중의 습속에 깊이 뿌리박힌 축제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기독교는 이를 ‘기독화’했다. 우선 고대 로마의 ‘12월 축제’는 성탄절과 신년 축제로 이어졌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 유럽에서는 ‘12일 축제’가 확립됐다. 12월25일 성탄절부터 1월6일 예수공현대축일(예수의 출현을 기리는 날)까지 12일 동안 축제를 벌였다. 크리스마스 때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는 기독교적 풍습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여러 축제의 잔흔인 셈이다.

중세에도 멈출 수 없어, 카니발로 거듭난 2월 축제

고대의 ‘2월 축제’는 중세의 카니발로 거듭났다. 사순절(부활절을 앞두고 40일간 금욕·금식하는 기간) 직전의 일정 기간에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축제를 ‘기독교의 이름으로’ 승인했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뜨는 주간의 일요일이다. 보통 3월 중순~4월 중순에 온다. 이로부터 40일을 역산하면 1월과 2월 무렵이 카니발 기간이 된다. 장소와 시대마다 차이가 있지만, 1월6일 예수공현대축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는 2월 말까지 집중적으로 카니발이 열렸다. 여기에 연말 연초에 몰린 ‘12일 축제’를 더하면, 사실상 겨울 내내 축제가 이어진 셈이다.

카니발을 절정에 올려놓은 것은 개신교였다. 카니발을 내동댕이친 것도 개신교였다. 16세기 종교혁명 시기, 개신교도들은 중세 카니발의 여러 공연과 행진을 통해 가톨릭 성직자를 비판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는 서민 봉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주도권을 잡은 개신교는 ‘우상 숭배’ 등을 이유로 카니발을 금지하거나 억압했다. “현세의 공덕은 노동을 통해 입증된다”는 칼뱅주의는 여가와 유흥이 아닌 노동을 우선시했다. 일상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등장했고, 해방과 도피의 세계도 사라졌다. 을 쓴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 과정을 ‘인류의 고행화’라고 규정했다. 노는 즐거움보다 일하는 즐거움이 강조되는 자본주의적 휴일 개념이 등장했다. 일주일에 오직 하루를 쉬고, 그 하루조차 경건하게 보내야 하는 ‘개신교적 휴일’이었다.

종교혁명 이후 가톨릭도 카니발 적대에 동참했다. 교구마다 차이가 있지만, 15세기 무렵 노동이 금지된 의무적 축제일은 1년에 40~60일 정도였다. 여기에 52일의 일요일(안식일)을 더하면, 1년 가운데 3분의 1이 휴일이었다. 1666년 파리 대주교는 ‘쉬는 축제’ 수를 44개에서 27개로 줄이라고 교구에 명령했다. 나머지 축제일에도 “미사에 참석해 설교를 경청하라”고 명했다. 술집 출입도 금지됐다. 공식적인 카니발 기간도 3일로 엄격히 제한했다. 이런 상황은 다른 가톨릭 지역으로 확산됐다.

음력 정월 대보름은 우리의 ‘2월 축제’다. 마을 전체가 몰아 쉬었다. 전북 임실 필봉마을의 당산나무 둘레에서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음력 정월 대보름은 우리의 ‘2월 축제’다. 마을 전체가 몰아 쉬었다. 전북 임실 필봉마을의 당산나무 둘레에서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카니발은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는다. 몽테스키외·볼테르 등 계몽사상가들은 축제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몽테스키외는 “축제를 줄인 프로테스탄트 국가에 비해 가톨릭 국가의 상품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고대·중세를 잇는 ‘질펀한 축제’ 대신 절제되고 평온한 ‘이성적 축제’를 꿈꾸었다.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이성이 교류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프랑스혁명은 그런 구상이 현실화된 계기였다. 이때부터 축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즐기는 카니발이 아니라, 특정한 날을 잡아 특정한 이념을 기리는 ‘국경일’로 바뀌었다. 기독교가 고대의 축제를 ‘기독화’했다면, 혁명정부는 이를 ‘혁명화’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정부는 휴일과 관련한 두 가지 ‘혁명’을 도모했다. 우선 기독교식 달력을 폐지했다. 기독교식 달력의 가장 큰 특징은 7일에 한 번씩 쉰다는 데 있다. 성경 창세기 구절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날에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당신의 모든 일을 멈추고 쉬셨기 때문이라.”(창세기 2장 3절) 왕·귀족·성직자에 반대한 혁명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7일제’ 대신 10일을 한 주로 보는 ‘10일제’ 달력을 선포했다. 기독교 달력이 자연의 운행과 배치된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을 섬기는 안식일’의 관념을 없애버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관리조차 대보름 전후 3일 몰아 쉰 고려시대

열흘마다 돌아오는 휴일은 제각기 ‘도덕적·공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청년의 활기를 되새기는 날, 연인의 애정을 돈독하게 하는 날, 노인의 연륜을 공경하는 날 등이 제정됐다. 오늘날의 어버이날, 어린이날 등의 효시인 셈이다.

혁명정부는 10일제 도입과 함께 옛 축제일을 대체할 ‘혁명 기념일’을 새로 만들었다. 6월24일 공화국 헌법 제정일, 7월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일, 9월22일 공화국 선포일 등을 휴일로 선포했다. 시민은 기념일마다 광장에서 혁명을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 오늘날의 제헌절·광복절 등 국가 지정 공휴일의 초기 형태다.

그러나 카니발의 생명력은 질겼다. 기독교가 그랬듯, 혁명정부도 카니발의 원형질을 완전히 없애진 못했다. 혁명정부가 새로 선포한 달력에 따르면, 한 해의 시작은 공화국이 선포된 9월22일이었다. 새해가 시작되기 직전 6일 동안, 시민들은 ‘상퀼로트의 축제’를 즐겼다. 원래는 서로 광장에 모여 토론하는 ‘이성의 축제’를 지향했지만, 점차 민중이 주도하는 난장의 요소가 강해졌다. 현대에 이르러 카니발은 나라와 도시마다 서로 다른 상업적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교회도, 혁명정부도, 자본주의도 ‘몰아 쉬는 축제’를 완전히 없애진 못한 셈이다.

우리의 전통 습속에도 ‘2월 축제’에 비견할 만한 것이 있다. 음력 정월 대보름 잔치다. 백성은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에 이르는 기간에 곡식·돈·술·짚을 추렴해 마을 잔치를 준비했다. 이제는 보려야 볼 수 없는 쥐불놀이, 달집 태우기, 줄다리기, 농악 등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때가 정월 대보름이었다. 를 보면 당시 관리들조차 정월 보름을 전후해 3일 동안 쉬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표인주 전남대 교수(민속학)는 “옛 농경사회에선 농한기인 정월 한 달이 모두 휴가인 셈이었고, 특히 머슴들은 섣달그믐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 푹 쉬고 2월 초하루에 주인집에 돌아오는 풍습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단오·백중·한식 등 다른 명절도 있었지만, 대부분 농사일에 바쁜 시기와 겹쳤던 탓에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가 ‘몰아 쉬는’ 본격 휴일이었던 것이다. 노비와 머슴을 비롯한 미천한 신분 집단이 가장 큰 해방감을 맛봤다는 점까지 서구의 2월 축제와 비슷하다.

카니발에 비교할 만한 또 다른 행사로 ‘팔관회’가 있다. 원래 불교적 수행의 의미가 강했으나, 점차 국가가 백성을 위해 베푸는 화려한 축제로 바뀌었다. 삼국시대에는 7일에 걸쳐 팔관회 행사를 했다. 고려 시대 들어 하루로 줄었고, 조선 시대에는 아예 맥이 끊어졌다. 기독교 성직자들이 카니발을 탄압했듯이, 조선의 사대부들도 불교식 축제를 곱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몰아 쉬는 축제’가 많지 않은 것에 대해 표 교수는 “일과 놀이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실제로 노동을 놀이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한다. 민요를 부르며 일했고, 일하는 틈틈이 어울려 노는 ‘집단 노동, 집단 휴식’의 문화가 강했다는 것이다. 표 교수는 “해방 이후, 특히 새마을운동 이후 노동과 놀이의 경계가 분명해졌다”며 “‘정신적 휴식’을 중시했던 전통문화가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현대인의 휴식은 기껏해야 ‘노동의 휴일’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정신적 휴식이란 ‘일상의 억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휴식’이다.

현대인의 휴식은 ‘노동의 휴일’일 뿐

고대로부터 시작된 ‘2월 축제’의 바탕은 농업적이었다. 새해 농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고, 고된 노동에 대비해 충분히 먹고 노는 문화를 2월에 반드시 치렀던 것이다. 사람들은 어울려 놀았다. ‘몰아 쉬는 일’은 곧 ‘몰아서 함께 노는 일’이 됐다. 이 과정에서 기존 권력과 위계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항상 등장했다. 소작농과 머슴이 주인공이 됐다. 뼈 빠지게 일하는 오늘날의 한국 노동자도 그런 축제를 즐길 자격은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참고 문헌: (김복래·북코리아), (이종철·민속원), (표인주·태학사), (윤선자·한길사), (윤선자·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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