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사면에 대해 ‘경제인 이건희’보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이건희’에 대한 사면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비리 경제인들은 사면 대상에서 빼고 오직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 전 회장에 대해서만 단독으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정희준 동아대 교수(스포츠과학대학)는 “한국은 정치·경제·스포츠가 삼각동맹을 맺고 있는 독특한 국가다. 국가와 재벌이 스포츠에 다목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면”이라고 말했다.
정치·경제·스포츠의 삼각동맹
이건희 전 회장은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IOC 위원 자격을 스스로 일시 포기한 바 있다. IOC 위원은 출신에 따라 개인 자격 위원, 각종 국제 스포츠연맹 회장 자격 위원, 올림픽 출전 선수 자격 위원 등이 있다. 각종 국제 스포츠연맹 회장 자격으로 IOC 위원이 됐다면 본인이 그 자리에서 물러날 경우 자동으로 IOC 위원 자격도 종료된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80살까지 임기가 보장된 개인 자격의 IOC 위원이다. 대한체육회 쪽은 “삼성은 톱 순위 올림픽 공식 파트너(스폰서) 가운데서도 비중이 매우 크다. 막강한 스폰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작용해 80살까지 개인 자격 위원으로 임기를 보장받고 있다”고 말했다. IOC 위원이 비리 사건에 연루되면 IOC 윤리위원회에 회부돼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는데, 이 전 회장은 스스로 자격을 포기했기 때문에 자격 박탈을 당하지는 않고 자격이 정지된 상태다. IOC 공식 홈페이지에는 아직도 이 전 회장이 문대성 IOC 위원과 함께 ‘Mr. Kun Hee LEE’라는 이름으로 위원 명단에 올라 있다. 이제 그는 2010년 1월1일 IOC 위원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재벌 총수들은 1981년에 제24회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뒤부터 체육계로 왕성하게 진출했다. 재벌 총수들이 각종 ‘국제 메가 스포츠 이벤트’ 유치에 뛰어들면서 재벌과 정치가 스포츠를 고리로 동맹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당시 대한탁구협회장),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 등 재벌 총수 7명이 재계 지원단을 구성해 막후에서 올림픽 유치를 위해 뛰었다. 해당 국가에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등 투자 약속을 내걸고 각국 IOC 위원들로부터 표를 끌어모은 것으로 알려진다.
사실 재벌기업 가운데 현대가 가장 일찌감치 그리고 활발하게 체육계 쪽에 관여해왔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서울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으로 알려져 있고, 1982년부터 2년간 대한체육회 회장을 지냈다. 이명박 대통령도 현대건설 사장 재직 시절 대한수영연맹 회장(1981∼92)을 지낸 바 있고, ‘양궁의 대부’로 불리는 정몽구 회장은 네 번이나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았다. 지금은 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대한양궁협회를 이끌고 있다. 월드컵 유치 당시에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지시로 현대중공업 인사들이 별도의 팀을 만들어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고 남광우씨와 김동대씨 등이 대표적인 현대중공업 출신 인사다.
삼성도 ‘꿈의 자리’라는 IOC 위원에 이건희 전 회장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1990년대 초부터 집요하게 작업해왔다. 1996년 이 전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발판으로 IOC 위원으로 선정되자마자 이듬해 올림픽 공식 파트너(스폰서)로 참여했다. 체육계에서는 삼성전자 이재용 부사장이 이 전 회장에 이어 스포츠 외교 쪽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포츠평론가 정윤수씨는 “이재용씨 개인은 야구를 좋아하는데, 그룹 참모들이 ‘야구는 글로벌 스포츠가 아니라서 활동하는 데 제약이 따르므로 축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대한축구협회장 자리까지 염두고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축구협회장이 되면 이 자격을 발판으로 아버지에 이어 IOC 위원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이재용 부사장을 자크 로게 IOC 위원장 등 국제 스포츠계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대한체육회 이사회 명단=전경련’대한체육회 임원진을 보면, 박용성 회장 아래 이건희 전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핸드볼협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대한탁구협회장),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대한레슬링협회장) 등이 이사진으로 포진해 있다. 박용성·최태원·조양호 회장 모두 IOC 위원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정희준 교수는 “현재 체육회 이사회 명단을 보면 마치 전경련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라며 “고 정주영 전 회장과 정몽준 회장이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메가 이벤트를 유치하면서 국가에 기여했다는 점을 앞세워 대권에 도전했거나 앞으로 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벌과 스포츠가 이런 관계를 맺으면서 대형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비리 경제인에 대한 사면·복권론이 흘러나왔다. 재벌 총수가 나서야 국제 스포츠대회 유치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게 명분이었다. 지난 2007년 평창이 겨울올림픽 유치 재수에 도전했을 때도 IOC 총회를 앞두고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전 대한양궁협회장), 김우중 전 대우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전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 등에 대한 사면·복권 주장이 나온 바 있다. 실제로 2006년 두산그룹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유죄판결을 받은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현 대한체육회장)은 2007년 1월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2차 도전을 앞두고 특별사면을 받아 IOC 위원으로 복귀한 바 있다. 박 회장은 2002년 국제유도연맹 회장을 발판으로 IOC 위원을 맡았으나 비자금 사건이 터진 뒤 IOC 집행위원회에서 위원직 자격을 정지당했다. 박 회장은 특별사면 이후 2007년 4월 IOC 위원으로 복귀했다가 국제유도연맹 회장직을 사퇴하면서 IOC 위원도 그만뒀다.
정윤수씨는 “재벌 총수마다 IOC 위원이 되려고 각종 체육협회를 하나씩 끼고 있다. 폼도 나고, 사업에도 도움되고, 특히 사면·복권도 받을 수 있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 사회봉사 차원에서 재벌에 체육단체 회장을 맡겼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재벌마다 체육계 명함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고 말했다. ‘생활인 블로거들의 네트워크’를 표방하는 주권닷컴(www.jukwon.com)은 “이제 범죄인들이 죄를 사면받기 위해 IOC 위원에 적극적으로 도전할지도 모르겠다. 올림픽에 월드컵에 2∼3년에 한 번씩 ‘범죄인 사면 특수’가 발생하니 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가?”라고 꼬집고 있다.
대통령의 인기가 올림픽 유치그동안 겨울올림픽 개최지는 유럽 일색이었다. 국제 올림픽이기 때문에 캐나다 밴쿠버·일본 나가노 등에 어쩌다 한 번씩 개최지를 내준 것뿐이다. 앞서 두 번 그랬던 것처럼 평창, 독일 뮌헨, 프랑스 안시 등 유치 경쟁을 벌이는 세 도시 가운데 1차 투표에서는 평창이 1등을 할 가능성이 크지만, 2차 결선에서는 경쟁 도시가 뮌헨과 안시 중 하나만 남게 될 것이고, 과거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쪽으로 표가 쏠리면서 또다시 평창이 역전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희준 교수는 “21세기 들어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전은 국가 지도자의 인기가 좌우하고 있다. 2014년 겨울올림픽 유치전 당시에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한 번 훑고 지나가니까 러시아 소티로 결정됐다”며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과 독일 메르켈 총리에 비해 이명박 대통령의 인기가 국제적으로 더 높다고 하기 어려운데, 평창이 이번 도전에도 실패하면 (이번 사면이) 이건희 전 회장한테 책임과 부담을 떠넘길 수 있는 구실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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