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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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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5만수사’에 뿔났다

사실상 친노 진영과 검찰의 전면전…
물증 없이 진술만 확보, 금품 제공 사실·대가성 모두 입증 쉽지 않아
등록 2009-12-17 14:01 수정 2020-05-03 04:25

‘친노의 맏형’ 이해찬 전 총리가 12월11일 시민사회와 야권의 총궐기를 호소했다. “12월15일 검찰 규탄대회를 한다. 그래도 검찰이 제정신을 안 차리면, 내가 중앙청사에 가서 가마니 깔고 드러눕겠다. 그런 각오 없으면 절대 안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권력을 잡으면 다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12월11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의 소환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 전 총리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12월11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의 소환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 전 총리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노기가 어린 발언이었다. 이날 서울 마포구 합정동 노무현재단에서는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이명박 정권·검찰·수구언론의 정치공작 분쇄 및 정치검찰 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전체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 전 총리 외에도 민주당의 송영길·안희정 최고위원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이병완 국민참여당 창당준비위원장, 이창복 시민행동 대표도 함께 참여했다. 이 전 총리는 이 자리에서 한 전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를 ‘21세기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규정하며 강도 높은 투쟁을 예고했다.

국민참여당 당원 가입 폭발적으로 늘어

당사자인 한명숙 전 총리도 “이번 기회에 제 모든 인생을 걸고 수사기관의 불법 행위와 모든 공작정치에 맞서 싸우겠다”며 투쟁 의지를 다졌다. 공대위는 전체회의 직후 피의 사실 공표와 명예훼손 등 혐의로 검찰과 조선일보사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사실상 공대위와 검찰의 전면전이 시작된 셈이다. 공대위는 법적 투쟁과 별개로 12월15일 서울 광화문에서 대규모 검찰 규탄집회를 열기로 했다. 이튿날인 16일 오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작 출판 기념회가 열린다.

친노 진영 전체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한 전 총리에 대한 혐의 사실이 처음 보도된 직후, 유시민 전 장관과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 등 참여정부의 핵심 인사가 참여하는 국민참여당의 당원 가입 수가 오히려 폭발적으로 늘었다. 인터넷 토론 사이트인 ‘서프라이즈’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홈페이지인 ‘사람 사는 세상’, 유 전 장관의 팬사이트 ‘시민광장’ 등에는 검찰을 규탄하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한 전 총리의 한 측근은 “검찰의 부당한 기획수사로 노 전 대통령을 잃었는데, 해가 채 넘어가기도 전에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검찰이 일을 이렇게 벌인 이상 우리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단호히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검찰과 친노 진영은 끊임없이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대표적이지만, 참여정부 주요 인사 가운데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은 인사가 드물 정도였다.

한 전 총리에 대한 ‘사정당국 내사설’도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여의도 안팎에서는 이미 2008년 초부터 한 전 총리 주변에 대한 압박이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실제로 한 전 총리와 친분이 있는 기업인 가운데 일부는 사정기관으로부터 한 총리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여부를 조사받기도 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친노 진영을 겨냥한 검찰의 행보에 일정한 제동을 걸었다. 민주당 등 야권과 시민사회단체에서 노 전 대통령 서거의 책임자 처벌과 국회 검찰개혁특위 설치 등을 요구하며 검찰을 압박했다. 결국 임채진 검찰총장과 수사의 최고 책임자인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이 옷을 벗었다.

2009년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한 한명숙 전 총리(앞줄 왼쪽 세 번째).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 전 총리의 인기가 크게 올라갔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2009년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한 한명숙 전 총리(앞줄 왼쪽 세 번째).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 전 총리의 인기가 크게 올라갔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서거 정국 이후 검찰의 첫 ‘작품’

한 전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는 임채진 총장의 후임으로 임명된 김준규 검찰총장 체제에서 본격적으로 착수한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친노 진영이 분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친노와 검찰의 태도로 볼 때 양쪽의 이번 싸움은 어느 한쪽에 치명상을 남기기 전에는 끝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승자는 누가 될까?

검찰에는 한 전 총리의 혐의를 입증해내야 할 책임이 있다. 검찰은 대한통운 곽영욱 전 사장으로부터 “한 전 총리가 재임 중이던 2007년 초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한국남동발전 사장 선임과 관련한 청탁을 하며 5만달러를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며 한 전 총리를 압박하고 있다. 검찰은 당시 총리 공관 출입기록을 건네받아 곽 전 사장의 출입 여부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곽 전 사장의 진술대로 그가 총리공관을 출입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게 금품 수수의 직접적 증거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게다가 곽 전 사장은 5만달러를 봉투에 담아 건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좌추적을 통해 자금 흐름이 파악될 수 있는 성질도 아니라는 뜻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검찰이 말하는 대로 곽 전 사장이 한 전 총리 재임 기간에 총리 공관을 출입한 사실이 있다 해도 이게 무슨 (금품을 건넨) 증거가 될 수 있느냐”며 “결국 증거는 오직 돈을 건넸다는 곽 전 사장 말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 대개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지게 마련이다. 참고할 만한 사건이 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사건으로 기소된 박진 한나라당 의원의 사례다. 박 의원은 2008년 3월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베트남 국회의장 초청 만찬장에서 박연차 전 회장으로부터 2만달러가 든 봉투를 건네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는 박 전 회장의 진술이었다.

‘잘나가던’ 곽 전 사장이 굳이…

12월3일 열린 재판에서 검찰과 박 의원은 당시 만찬장 사진까지 검증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박 전 회장이 2만달러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건넨 것이 사실이라면 양복 상의의 형태가 평소와 다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박 전 회장의 진술과 불분명한 사진만으로 2만달러 수수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재판부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박 의원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은 12월24일로 예정돼 있다.

공대위는 검찰에서 흘리는 구체적 혐의 사실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겪은 경험 때문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이 언론을 통해 혐의 사실을 흘리면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이를 곧바로 반박했다. 검찰과 노 전 대통령이 다른 주장을 내놓고 이를 언론이 보도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쪽은 노 전 대통령이었다.

이해찬 전 총리는 12월11일 검찰이 제기하는 혐의 내용과 주변 정황에 대해 “개별적 상황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랄한 보도가 많았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검찰 기소가 이뤄진 뒤 재판정에서 하겠다”고 말했다.

곽영욱 전 사장이 건넸다는 5만달러의 ‘대가성’ 입증 여부도 관심사다. 곽 전 사장은 2007년 4월 한국전력 자회사인 한국남동발전 사장으로 선임됐다. 한 전 총리가 퇴임한 시기는 2007년 3월이었다. 검찰은 비록 한 달의 시차가 있지만 한 전 총리가 충분히 남동발전 인사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5만달러의 대가성이 인정된다는 이야기다.

참여정부의 핵심 관계자들은 ‘무식한 주장’이라는 반응이다. 특히 당시 남동발전 사장 선임 과정을 주도한 청와대 인사추천위원회의 핵심 관계자는 “검찰이 말하는 한 전 총리의 추천서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남동발전 사장 후보는 모회사인 한전의 추천위원회와 소관 부처인 산업자원부 장관을 거쳐 몇배수로 올라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2배수 혹은 3배수로 사장 후보가 청와대에 올라오면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책실장, 인사수석, 민정수석 등 8인으로 구성된 인사추천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대통령에게 올렸다. 이런 프로세스 어디에도 총리가 추천서라는 걸 들이밀 공간이 없다. 실제로도 한 전 총리는 곽영욱 전 사장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추천서도 보내온 일이 없었다.”

이 관계자는 “곽 전 사장이 지금 검찰 수사 과정에서 비자금 조성 등 혐의를 받고 있지만, 남동발전 사장으로 임명되기 직전까지는 위기에 빠진 대한통운을 잘 이끈 실적이 있었다”며 “당시 인사추천위의 의견은 공기업에도 유능한 최고경영자가 필요하다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곽영욱 전 사장은 2000년 11월 대한통운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된 이후 4년 연속 법원으로부터 우수 관리인으로 선정되는 등 대한통운 회생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곽 전 사장을 ‘스타 CEO’로 조명한 것도 와 등 언론이었다. 정황으로 따진다면, 그가 한전 사장도 아닌 한전 자회사 남동발전의 사장으로 가기 위해 총리까지 나서야 했다는 사실에 오히려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곽 전 사장이 한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제공한 사실 여부나 이 돈의 대가성을 입증하는 것 모두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 관계자는 일부 언론에 “(곽 전 사장의) 관련 진술이 매우 탄탄하게 구성돼 있으며 그동안 수사팀이 충분한 조사를 했다”며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소환 거부에 검찰은 재소환 통보

친노와 검찰의 정면충돌에 대해 정치권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민주당은 당 차원에서 직접 나서기보다는 공대위 구성원 자격으로 참여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여러 세력의 연합체 성격인 공대위의 투쟁에 목소리를 얹는 역할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침묵은 이채롭다. 야당의 유력 서울시장 후보가 개인 비리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데도 12월11일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남경필·원희룡 의원 등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피의 사실 공표 등의 책임을 물어 검찰을 비판했다. 간접적으로 한 전 총리의 편을 든 것이다.

원희룡 의원은 12월11일 과의 전화통화에서 “검찰이 불구속 기소를 검토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정치적 저울질을 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돈이 갔다면 용처까지 수사하고 나서 사람을 불러야 하는데, 지금은 곽영욱 전 사장 진술만 받아놓고 다른 물증이 없는 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사건이 장기화됐을 경우다. 공대위는 12월11일 검찰의 한 전 총리 소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한 전 총리 쪽에 14일 소환을 다시 통보했다. 만약 재소환마저 거부한다면 한 전 총리 쪽에도 일정한 부담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 한 중진의원은 “한 전 총리가 좀더 영리하게 행동하려면 가련한 피해자로 보이는 게 나은데, 너무 세게 나가는 것 같다”며 “계속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고 버틴다면 총리까지 지낸 분이 대한민국 법체계를 무시해서 되겠느냐는 등의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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