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한 여성은 낙태를 할 권리가 있는가?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를 선택한 여성은 살인자인가? 한국 사회의 오래된 논쟁이 ‘저출산 시대’와 엮여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최근 저출산 문제 해법에 목말랐던 정부가 ‘낙태’ 카드를 들고 나서자, 그동안 낙태 문제를 두고 대립해오던 찬반 양쪽이 함께 “낙태를 저출산 문제의 대책으로 여겨선 안 된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대통령, 저출산 대책에도 ‘속도’ 강조
지난 11월25일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는 ‘제1차 저출산 대응 전략회의’를 열어 이명박 대통령에게 ‘저출산 현황 및 정책 방향’을 보고했다. 미래기획위는 ‘한국인 늘리기’ 분야의 정책 과제로 ‘다문화 정착 지원’ ‘미혼모 가정 지원’ ‘신축적 이민정책 수립’ 등과 함께 ‘생명 존중(낙태 방지) 분위기 조성’을 내세웠다. 낙태 줄이기 캠페인을 펼치고 낙태 안 하는 사회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2005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추정 건수’ 자료를 보면, 2004년 한 해 동안 34만2433건의 낙태가 이루어졌다. 그중 기혼 여성이 58%, 미혼 여성이 42%다. 아이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낙태를 결심한 경우는 전체의 45.4%다. 같은 해에 태어난 신생아 수는 45만 명이었다. 낙태를 금지하면 출산율이 두 배 가까이 올라간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낙태가 불법으로 행해지고 있어 단속을 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산부인과가 운영상의 어려움에 처해 있고 분만 수가도 낮으니 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미 보건복지부는 지난 11월16일부터 ‘불법적인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낙태 근절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는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이하 진오비) 소속 의사들도 참석했다. 진오비는 개혁 성향의 산부인과 개원의 680여 명으로 구성된 의사 단체다. 이들은 지난 11월1일 불법 낙태 근절 운동 선포식을 열고, 자신들이 낙태 시술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면 다른 의사들의 시술도 감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낙태 시술이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독사탕’이며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의사가 된 이들이 생명을 죽이는 일에 더 이상 나서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를 주재한 이명박 대통령은 ‘속도’를 강조했다. 그는 “(저출산 문제는) 10년 이상 공들여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는 인식은 안 된다”며 “실천 가능한 전략을 짜서 과감하게 결단하고 조치를 취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오비’를 비롯한 낙태 반대론자들조차 정부가 ‘낙태 금지’를 저출산 문제의 대책으로 내세우는 데 반대하고 있다. 왜일까? 김현철 낙태반대운동연합 부회장은 “낙태는 인구를 조절하는 밸브가 아닌 고유한 사회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정부가 고출산 대책으로 낙태를 사용했듯이 저출산 대책으로도 낙태를 이용해 생명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식의 논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의료계는 출산율을 끌어올리겠다고 낙태를 단속하고 금지할 경우 오히려 음성적인 시술이 늘어 국민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염려한다. 장석일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은 “낙태 시술을 한 의사를 사형에 처하는 등 낙태를 금지했던 루마니아의 경우 오히려 원정 낙태 등 편법이 성행해 결과적으로 인구가 더 줄었다”고 말했다. 양성 평등 구현, 미혼모·장애아에 대한 인식 개선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 단순히 낙태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단속해 출산율을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은 지극히 경박한 접근이라는 지적이다.
미래기획위 관계자도 “저출산의 원인은 여러 사회문제들과 얽혀 있어 단기적 대책을 내놓기가 쉽지 않은데, 현재 저출산 문제에 너무 타깃이 맞춰져 있다 보니 당장 출산율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음성 시술 늘어날 것지난 12월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낙태, 불편한 진실 이대로 둘 것인가?’ 토론회에서도 이런 접근법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첫 주제 발표자로 나선 최안나 진오비 대변인은 “지난 10월 진오비가 출범한 이후 두 달간 우리의 목적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저출산 대책으로 낙태를 거론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는 “낙태를 줄이면 출산율은 높아지지만 그게 목표여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표는 생명 존중”이라고 못박았다. 토론에 앞서 한나라당 의원들로 구성된 국회인권포럼이 “최안나 대변인을 국회인권상 수상자로 내정했다”고 밝혔지만 최 대변인은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장석일 부회장 역시 “낙태를 줄이면 저출산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가벼운 접근인데 정치인들은 이 부분에 매력을 갖고 있더라”라고 비판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이윤성 국회부의장 등 한나라당 국회의원 10여 명은 정작 이런 비판을 듣지 못했다. 축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자 일제히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본 정진주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교수는 “소통을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먼저 결론을 내리고 떠나는 모습은 정치인들이 낙태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그는 “낙태 문제가 인구조절 정책의 일환으로 활용돼서는 절대 안 되는데 지금 정부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며 “국가 정책은 임신·출산·낙태에서 여성이 신중하게 내린 결정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낳은 아기는 누가 키우나요?”12월 초 낙태 시술을 받았다는 한 여성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저는 4일 전에 낙태 수술을 한 22살의 여자입니다. 아기는 7주였습니다. 요즘 낙태 논란이 많은데 저도 낙태 반대론자였습니다. 막상 닥치고 나니 낙태를 선택하게 되더군요. 남자친구와는 결혼을 전제로 3년간 만나왔지만 둘 다 돈도 없고 양가에는 빚도 많습니다. (중략) 당장 몸 누일 작은 방이라도 구할 돈을 빌릴 수 있었다면 아기를 낳았을 텐데….” 그는 낙태를 한 여성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무조건 낙태를 금지하면 그렇게 낳은 아기는 어떻게 키우나요?” 저출산 대책으로 낙태를 언급한 정부가 답해야 할 문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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