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 유행어를 뽑으라면 ‘신종 플루’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종 플루는 ‘신종 인플루엔자A(H1N1)’의 줄임말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5월 초 첫 감염자가 발생한 뒤 11월12일까지 모두 64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사망자 가운데는 암 등 중증 질환자가 많아 신종 플루가 사망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 여섯 달 동안 64명이 숨진 것은 결핵이나 예년 가을·겨울철에 유행했던 독감에 견줘 치사율이 훨씬 낮다. 하지만 신종 플루에 대한 공포는 이런 질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심지어 하루에 평균 190명가량이 숨지는 암이나 135명이 사망하는 심장·뇌혈관 질환, 28명이 숨지는 당뇨보다도 훨씬 더 두려워한다. 이 때문에 ‘신종 플루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감기 증상만 조금 있어도 항바이러스제를 구하러 병원을 찾아나선다. 그런데 신종 플루는 정말 그렇게 무서운 질환일까?
신종 플루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일으킨다. 만약 이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들어와도 우리 몸 안에 면역력이 충분하다면 단지 감염만 될 뿐 심각한 질병을 일으키지 못한다. 면역력이 충분하다는 말은 우리 몸의 면역세포들이 호흡기를 통해 들어온 이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전투로 치자면 충분히 싸울 준비를 갖추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름처럼 정말 ‘신종’이라면 우리 몸의 면역세포들은 어떻게 적을 막아야 할지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이때는 심각한 폐렴· 패혈증 등이 일어나 사망할 수 있다.
즉, 신종 플루의 위험성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우리 몸의 면역세포가 이 바이러스에 항체를 갖추고 있는지 평가해야 한다. 박승철 국가신종인플루엔자대책위원회 자문위원장은 “똑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어떤 이들은 이에 대처할 수 있는 항체가 있어 증상이 거의 없이 지나가기도 한다”며 “이 때문에 증상이 있어 의료기관을 찾아 검사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감염자 수만 센다면, 감염됐지만 증상이 없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 실제 감염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박 위원장은 또 “이 때문에 우리 국민의 일정 표본을 뽑아 신종 플루에 대해 항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조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런 항체 양성률 자료는 있는가? 안타깝게도 보건당국은 우리 인구를 대표할 수 있는 표본을 대상으로 이런 조사를 해보지 않았다. 다만 참고할 수 있는 조사와 임상시험 결과가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지난해 우리 국민의 건강 상태를 알고자 성인 가운데 일정 표본을 뽑아 혈액을 채취해둔 바 있다. 최근 이 혈액 가운데 국민의 나이대별·성별 인구를 대표할 수 있도록 200건의 표본을 뽑아 이번 신종 플루 바이러스에 대해 얼마나 항체가 있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신종 플루 바이러스에 항체를 가진 비율이 만 19~59살은 20%, 만 60살 이상은 27.3%로 나온 것이다. 신종 플루가 올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벌써 지난해부터 이에 대항할 수 있는 항체를 만 19살 이상 우리 국민 4~5명 가운데 1명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종’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사실은 ‘신종’이 아닌 셈이다.
그래도 ‘80% 혹은 73%는 항체가 없으니 신종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중요한 점 하나는 항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온 80% 혹은 73%도 아예 항체가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항체가 있기는 하지만 일정 기준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들의 상당수는 신종 플루 바이러스를 만날 경우 충분히 대항할 수 있을 만큼 항체량이 크게 준비된다는 것이다. 오명돈 서울대의대 감염내과 교수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전시와 평시에 비유하자면, 전시 즉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항체량이 크게 늘어나고, 평시 즉 바이러스가 없을 때는 그 양이 매우 줄어든다”며 “양이 줄었을 때 항체량을 측정하면 일정 기준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와 항체 음성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항체 기능이 없어지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전시가 되면 그 양이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론만 그런 것 아니냐?’는 질문도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결과도 최근에 발표됐다.
“우리 몸이 이미 알고 있는 바이러스”지난 10월21일과 11월4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신종 플루 예방 백신에 대한 임상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 임상시험에서 중대한 사실이 확인됐다. 한 번 접종으로도 충분한 항체가 생기는 것으로 보아 국민 상당수가 벌써 항체를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식약청이 발표한 결과를 보면, 백신 예방접종을 한 뒤 신종 플루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 생성률이 만 18~65살 미만은 91.3%, 만 65살 이상은 63.4%로 나타났다. 만 9~17살도 한 번 접종으로 82.6%가 일정 기준 이상의 항체를 가지게 됐다.
이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원래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두 차례 접종을 해야 충분한 항체가 생긴다. 첫 번째 접종으로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반응하면서 새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게 되고, 두 번째 접종으로 이 정체를 안 면역력이 크게 늘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질병관리본부 등 보건당국은 이렇게 두 차례씩 접종을 해야 하면 백신이 크게 부족할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다행히 한 번으로도 충분히 항체가 생긴 것이다. 이 말은 이미 예방접종을 하기 전에 기본 바탕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번 임상시험 결과에서 밝혀진 또 하나의 사실은 만 9~17살은 예방접종 전에 벌써 18%에 가까운 비율이 일정 기준 이상의 항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질병관리본부의 표본조사에서 9~17살 연령층은 제외됐었는데, 이들도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높은 비율이 이미 항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명돈 교수는 “이로써 이번 신종 플루 바이러스는 우리 몸이 이미 알고 있는 바이러스로, 10살 이상은 상당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초·중·고 학생들에 대한 예방접종이 지난 11월11일 시작됐다. 의료인을 제외하고는 본격적인 예방접종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는 임상시험이나 항체 양성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 벌써 약 50일 전에 18%의 학생이 항체가 있었다면 그 뒤 학교에서 신종 플루 집단 감염이 크게 늘어났기에, 바이러스에 노출된 학생들의 항체 양성률은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난 11월4일 발표된 임상시험 결과를 보면, 만 3~8살 아동은 접종 전에는 3.6%, 한 번 접종으로는 39%만 항체가 생겼다. 생후 6~35개월은 한 번 접종으로는 항체 생성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유사 바이러스 경험 없는 영유아가 문제이처럼 나이가 많을수록 신종 플루 바이러스에 대해 항체를 가지는 비율이 높아지는데, 이는 과거에 이번 신종 플루 바이러스와 비슷한 종류가 유행했을 때 감염을 겪으면서 항체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성이 비록 약하다지만 이번 신종 플루 바이러스에 취약한 사람은 바로 만 8살 이하 영유아다. 이들에게는 정말 ‘신종’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접종 전 항체 양성률에 대한 조사 결과는 10월 중순에는 나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보건당국이 그때라도 그 결과를 제대로 발표하고 전문가들과 국민의 논의를 거쳐 예방접종 순서를 정했다면 어땠을까? 혹 만 8살 이하에 대해 임상시험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면, 그들의 부모·교사·보육교사라도 먼저 예방접종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김양중 한겨레 의료전문기자 himtrai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름이 백골단이 뭡니까”…윤석열 지지자들도 빠르게 손뗐다
경찰, 윤석열 체포 동원령…조폭·마약사범 잡던 베테랑 1천명
젊은 해병대원 죽음 모욕한 수사 외압 사태…정점엔 윤석열
전광훈 “대통령감” 소개에…윤상현 “너무 존귀하신 목사님” 90도 인사
“최전방 6명 제압하면 무너진다”…윤석열 체포 ‘장기전’ 시작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경호처 균열 생겼나…다급한 윤석열 “체포 대신 구속영장” 왜
군사법원, 박정훈 괘씸죄 수사 지적…부당 명령 배후 ‘VIP 격노’ 의심
1월 10일 한겨레 그림판
글로벌 3대 신평사 “한국 정치 불확실성 길어지면 부정적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