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속담 가운데 ‘실버스푼(은수저)을 입에 물고 태어났다’라는 말이 있다. 실버스푼은 상속받은 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즉, 아기가 부잣집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선 실버스푼이 아닌 ‘주식을 물고 태어났다’가 딱 맞는 말이다. 주식은 그 아이가 재벌가 아이인지를 알아보는 가늠자가 되고 있다.
‘88만원 세대’가 자신이 버는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10년 모으면 1억원쯤 된다. 재벌 자녀들은 출생부터 ‘억억’ 하면서 태어난다. 억대 미성년 주식 부자는 210명이다. 재계 전문 사이트 재벌닷컴(chebul.com)이 상장사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가운데 미성년자(1989년 10월1일 이후 출생)가 가진 주식지분 가치를 지난 9월30일 종가 기준으로 평가한 결과다.
이는 지난해 같은 시점의 166명에 견줘 26.5%(44명)나 늘어난 것으로, 역대 가장 많은 수준이다. 이 가운데 10억원 이상 보유자는 56명이나 됐다. 100억원 이상 보유자도 11명으로, 지난해 8명에서 3명이 늘었다.
상위 10명 중 절반이 LG·GS계열 사장단 자녀눈에 띄는 점은 ‘범LG가’ 자녀들이 미성년 주식 부자 상위권을 휩쓸었다는 것이다. LG·GS 계열 사장단 자녀가 상위 10명 가운데 5명을 차지했다.
억대 미성년 주식 부호 가운데 구본준 LG상사 부회장의 딸(19)이 272억원으로 1위였다. 지난 6월 말 조사 당시 1위였던 구본식 희성전자 사장 장남(20)이 조사대상 범위에서 벗어나면서 1위로 올라선 것이다. 구 부회장 딸은 현재 지주회사인 LG의 주식 31만386주와 LG상사 주식 8만4720주를 갖고 있다. 허용수 GS 상무의 장남(8)은 S그룹 지주회사인 GS의 주식 76만341주(0.8%) 외에 비상장회사 주식도 갖고 있었다. 평가액은 248억원에 이르렀다. 이 밖에 구본걸 LG패션 대표의 친인척(13)이 122억원, 허태수 GS홈쇼핑 사장의 딸(9)이 121억원,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친인척(18)이 114억원의 주식을 갖고 있었다.
LG 계열사의 한 전직 임원은 “LG와 GS가는 전통적으로 동업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최근까지 동업을 맺고 사업을 일으켜 왔다. 특히 LG가와 GS가의 직계·방계 가족들이 많다 보니 주식을 고르게 나눠 갖는 전통도 있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범LG가는 주식에 집착하고 이를 자녀들에게 넘겨주려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인화라고 볼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선 지분과 주식에 집착한다는 인상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최연소 억대 미성년 주식 부자는 올해 4월에 태어난 김흥준 경인양행 대표의 조카로, 지난 5월 김동길 경인양행 회장한테 이 회사 주식 5만 주를 증여받아 평가액이 1억7천만원에 이르렀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 손자는 만 2살에 보유주식 가치(남양유업 1794주)가 10억원으로 눈길을 끌었다.
미성년자 주식 부자가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재벌닷컴 쪽은 “과거와 달리 대주주들이 어린 자녀의 생일·졸업 선물로 회사 주식을 나눠주는 등 주식 부호들의 풍속도가 변화한 것도 미성년 주식 부자가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벌 오너들이 주식시장 하락기를 이용해 절세 차원에서 보유 자산을 자녀에게 증여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주가가 많이 내릴수록 세금을 덜 낼 수 있어서다. 상장사 특수관계인 간 증여 및 상속 건수는 2007년 57건에서 주식시장이 하락세를 보인 지난해 76건으로 급증했고, 올해 들어서도 9월 말 현재까지 68건을 기록했다. 세법상 주식 지분을 증여 또는 상속할 경우 세액 추징 산정은 양도 시점을 기준으로 6개월 평균 주가를 기준으로 계산된다.
재벌 오너만큼 회사 사정을 잘 아는 사람도 없어 자녀에게 주식을 증여하는 시점은 해당 기업의 주가가 거의 바닥에 왔을 때로 보인다. 재벌 오너로선 꿩(경영권 승계) 먹고 알(절세) 먹는 셈이다.
지난해 금융위기 폭락장에서도 재벌가 미성년자의 주식 매수 열기는 후끈했다. 이들이 경제력 없는 만 19살 미만의 미성년자여서 조부모나 부모가 손자와 자녀에게 주식을 사준 것으로 추정된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8살·2살 손녀와 손자(4)는 지난해 10~11월 주식 3710~3910주를 증여받아 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이 세 명이 주식 매입에 쓴 돈은 1인당 1억원가량으로 추정된다. 심팩은 최진식 대표이사의 딸(19)이 지난해 하반기 처음으로 주식 5만5450주를 장내 매수했다. 매입 당시 주가를 감안하면 1억1천만원가량이 주식 매입에 투자됐다. 현대시멘트는 정몽선 회장의 손녀(16)가 주식 500주를 매입해 보유 주식을 2120주로 늘렸다. 문배철강도 배종민 대표이사의 아들(11)이 지난 9월28일 5천 주를 사 지분을 6만1050주로 늘렸다.
물론 재벌가의 미성년 자녀에 대한 주식 증여가 활발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부의 상속 과정이 투명해졌다는 방증이라는 시각도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대기업 상무는 “과거 재벌가의 상속은 은밀하게 진행돼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채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기업공개가 이뤄지지 않은 비상장 계열사를 통해 음성적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상장시장에서 탈세가 아닌 절세를 통해 부를 상속하는 것은 오히려 예전보다 투명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벌가에서 미성년 자녀에게 주식을 넘겨주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경영 능력을 검증받지 않은 채 미성년자 때부터 경영권을 넘겨주며 자자손손 족벌경영 체제를 굳히는 게 아니냐는 비판 때문이다.
경영권 승계 사전 포석에 곱지 않은 시선이와 관련해 해당 기업들은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한 그룹 관계자는 “대주주들이 판단해 결정한 문제여서 회사 차원에서 답변할 사항이 아니다”라며 답변을 피했다.
대주주가 마음만 먹으면 소액주주가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LG카드 주식 매각 때 그런 일이 벌어졌다. 2003년 9월 LG카드 주가는 2만원대였다. 그해 11월 LG카드는 부도와 현금서비스 중단이란 최악의 사태를 맞았다. 서비스 중단 직전 구본무 회장과 친척들은 당시 1주당 1만1천원에 79만 주를 매도했다. 당시 구씨 일가가 사전에 사태를 감지하고 보유 주식을 시장에 팔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사전 매각 의혹을 받고 있는 구씨 일가 중 5명이 당시 미성년자였다. 주식거래를 하려면 증권사에서 계좌를 개설해야 하는데,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의 동의 없이 계좌를 틀 수 없다. 이 때문에 주식을 사고파는 것 역시 부모의 몫이다. 이후 LG카드의 주가는 급락했다. 그해 12월30일 3045원까지 떨어지며 연중 최저가를 기록했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없던 일반 투자가들은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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