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원 고집.’
검찰의 검사장급 인사를 앞두고 있던 지난 8월 초. 내정 일주일째를 맞고 있던 김준규 검찰총장 후보자가 김경한 법무부 장관과 인사 갈등을 빚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던 때였다. 전임 임채진 총장과 달리 인사 문제를 두고 장관에게 ‘결기’를 드러낸 것일까? 법무부 안에서는 김준규 후보자를 두고 ‘4차원 고집’이라는 별명이 퍼졌다. 기존 총장들에게선 볼 수 없던 다른 차원의 고집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굳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버틴다’는 의미에서 ‘4차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법무부 관계자는 전했다. “2차원 평면 세계에 사는 장관이 4차원과 붙어서 골치 아픈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흘러나왔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취임한 뒤 한 달가량 지난 지금에서는 섣부른 평가일 수도 있지만, 그는 나중에 어떻게 거둬들일지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이미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스스로도 자신의 발언들에 대해 “쏟아낸 얘기 중 하나다. 아이디어 차원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중에는 검찰의 아픈 부분을 도려내려는 혜안이나 조직의 폐해를 지적하는 촌철살인도 있지만, 어떤 것은 말 그대로 4차원스러운 것들이다. 물론 “정치인에게 청탁하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등 기존 총장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한 모습도 보인다.
기존 공안·기획통 총장들과 확실히 다른 모습하지만~ 검찰총장의 말이니 아랫사람들이 흘려들을 수도 없다. 그래서 요즘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 기자들이 검사들에게 자주 건네는 말도 “고생 많죠?”라는 위로성 인사다. 특히 과묵을 신조로 삼던 과거 총장들과 달리 유난히 ‘말’에서 자유로운 김 총장은 ‘어록’ 수준의 거침없는 입담과 즉흥적인 행동으로 서초동 법조기자들 사이에서 단연 화제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한 언론사에 내려졌던 ‘대검찰청 출입 금지령’ 해프닝이다. 전말은 이렇다. 이 언론사는 김 총장의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졌던 위법 사안과 관련해, 해당 내용을 민주당 쪽에 넘긴 관련자를 상대로 검찰이 보복 수사에 나섰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김 총장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이를 기사화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기사를 쓴 기자에게 ‘대검찰청 출입을 금지하겠다’는 대응 방침을 전달했다. 해당 언론사는 “(흔히 엠바고를 어긴 언론사를 상대로 기자단 차원에서 주는 징계인) 기자실 출입 금지도 아니고, 대검 청사 자체를 출입하지 말라니!”라며 황당해했고, 다른 출입기자들도 기사의 사실 여부를 떠나 ‘퇴출’ 운운은 도가 지나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대검 대변인실은 “총장은 그런 워딩(말)을 한 적이 없다”며 진화에 나서야 했다.
김 총장의 언론관은 조금 위태위태하다는 평이 많다. 큰 수사를 해보지 않은 탓에 그동안 언론에 노출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단련’이 덜 됐으니 노출된 부위는 까맣게 타기 쉽고 그만큼 아플 수밖에 없다. 짧은 기간 동안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장 참여 논란 △위장 전입 시인 △매형 사건 수사 검사에게 전화 등 한꺼번에 언론의 뭇매를 맞으면서 급속하게 ‘대언론 트라우마’가 형성됐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일까? 내정 직후 “우리나라처럼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검찰이 없다”고 밝혔던 김 총장은 취임 뒤 첫 기자간담회에서 법무부가 마련 중인 수사공보준칙과 관련해 “언론의 (검찰) 감시는 (수사가 끝나고 기소가 된 뒤) 나중에 해도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사실 ‘검찰’ 이외의 것으로 김 총장을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검찰 개혁’ 차원에선 어떨까? 김 총장은 ‘국제통’으로 분류된다. 수사로 일가를 이룬 특수통이나 공안통도 아니고, 하물며 기획부서에서 페이퍼워크로 잔뼈가 굵은 기획통도 아닌 국제통(국제는 기획으로 분류되기는 한다)으로 분류되는 것을 김 총장은 마뜩잖아한다. 김 총장은 “‘통’자를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아이디어통’이라는, 듣기에 따라서는 좋을 수도 있고 그저 그럴 수도 있는 꼬리표가 새로 생겼다.
사전 조율 필요한 아이디어성 발언 쏟아내취임사에서 학연·지연으로 묶이는 검찰 패거리 문화를 깨겠다고 밝혔던 김 총장은, 첫 기자간담회에서 대검이 가지고 있는 검사 데이터베이스와 대표적인 법조계 인물편람인 에서 검사들의 출신고교와 출신지를 삭제해버리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대부분의 언론은 이를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대검도 “(실제적 의미보다는) 검찰 문화를 바꿔가자는 상징적 행위로 봐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자간담회에 앞서 대검 실무진은 이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검토 결과를 김 총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검 데이터베이스는 몰라도 외부 자료인 에서까지 모두 삭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을 펴내는 법률신문사 쪽도 김 총장의 발언이 나온 뒤 “2009년판 의 조판이 이미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삭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은 3년마다 발간된다. 다음 인쇄판은 2012년에야 나오는데, 김 총장의 임기는 그 전인 2011년에 끝난다. 현재 법률신문사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인물정보 서비스를 보면, 전체 1600여 명의 검사 가운데 김 총장만 출신지와 출신고가 삭제된 상태다. 고집이 아니라면 진정성만큼은 의심하지 말아야 할 듯도 하다.
김 총장은 또 “해마다 유능한 수사관을 선발해 로스쿨에 보낸 뒤 검사로 임명하겠다”는 파격적인 발상을 선보이기도 했다. 검사와 일반 직원으로 확연히 나뉘는 검찰 조직문화를 바꾸려면 “직원이 검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흡수통일론’이다. 이 역시 난관에 봉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행정안전부 쪽은 “공무원을 로스쿨 진학 때문에 3년씩 휴직시키기는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김 총장이 검찰 개혁의 본질로 직진하기보다는 언저리만 만지작거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국민 처지에서 볼 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검찰 개혁의 핵심은 정치적 중립성 확보에 있지, 상징적 수준의 제스처나 일반인은 알지도 못하는 조직 내 갈등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법무부의 한 관계자는 “업무적인 평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검찰 총수로서 정제되지 않은 발언을 한다는 말이 많이 들린다”고 전했다.
“한국 검찰이 아시아에서 최고”라며 정치적 중립성을 자신했던 김 총장은 오는 9월 29일로 예정된 전국검사장회의에서 그동안 공들여 준비해 온 새로운 수사 패러다임을 제시할 예정이다. 진짜 평가는 여기서 갈릴 것으로 보인다. 수사 방식의 변화 방향과 실제 수사에 이를 어떻게 적용하는지가, 그를 단순히 호기심 많은 ‘괴짜 총장’에 머물게 할 수도, 아니면 ‘검사스러운’ 검찰 조직을 유연한 발상으로 환골탈태시킨 ‘명장’으로 기억되게 할 수도 있다.
이달 29일 전국검사장회의가 평가 시금석일부 언론은 벌써부터 검찰 개혁에 대한 그의 ‘어록’을 뽑거나 과거에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를 열거하며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의 밑바닥에는 김 총장의 언행이나 독특한 스타일이 검찰을 흔들 ‘뇌관’이 될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함도 따라붙는다. 나중의 평가는 어찌될지 몰라도, 어쨌든 검찰이 역사상 가장 ‘재미있는’ 총수를 모시게 된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김남일 기자 한겨레 사회부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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