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금강산이었다. 8월4일 오전 10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맏딸인 정지이 현대유앤아이 전무와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 금강산 관광사업 실무진 등 10여명도 현 회장과 함께 방북길에 올랐다.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6주기 참배를 위해서였다. 현 회장은 금강산 온정각에 있는 정 전 회장의 추모비를 찾아 헌화했다. 공교롭게 이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억류된 미 기자 석방을 위해 방북했다.
현대그룹은 매년 8월4일 정몽헌 전 회장의 기일이 되면 금강산을 찾아 추도식을 열었다. 현 회장은 이를 겸해 매년 금강산에서 열리는 신입사원 수련회에도 참석했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남달랐다. 지난해 7월11일 남쪽 관광객이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사고 뒤 첫 방문이기 때문이다. 피격사태가 발생하고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금강산·개성 관광이 중단됐고, 현대아산 직원 유성진(44)씨가 억류됐다. 개성공단도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남북 권력자들은 회담에 손을 놓고 서로 비방하기 바빴다.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면서 사태는 더욱 꼬여만 갔다.
“평양 방문하겠다” 북한에 먼저 의사 밝혀현 회장이 직접 금강산을 찾아 추모행사를 치른 것은 1년 넘게 중단된 대북사업을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현 회장은 추모행사에서 북쪽의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현안 해결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게 좋겠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이에 리 부위원장이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8월7일 오후 북쪽에서 ‘허가한다’는 팩스가 도착했다. 그동안 꼬일 대로 꼬인 대북 관광사업과 남북관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순간이었다.
8월10일 오후 북한의 은 현정은 회장이 개성을 경유해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현 회장은 이날 오후 1시50분께 경기 파주의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일주일 만의 방북길에 다시 올랐다. 이번에도 맏딸인 정지이 전무가 대동했다.
방북의 첫 성과로 북한에 억류됐던 현대아산 직원 유씨가 8월13일 오후 석방돼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지난 3월30일 “공화국 체제를 비난하고, 여성 종업원을 변질·타락시켜 탈북을 책동”한 혐의로 북한 당국에 끌려간 지 136일 만이다. 정부는 4월21일 북한의 제의로 진행된 남북 당국자 간 개성 접촉과 6~7월 세 차례 열린 개성공단 실무회담에서 매번 유씨 석방 및 접견 허용을 요구했으나 북쪽은 응하지 않았다. 정부는 빈손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현 회장의 이번 방북을 통해 금강산 및 개성관광 재개, 개성공단 입주 기업 문제 등 꽉 막힌 남북 현안에 일단 물꼬를 텄다.
사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급격히 냉각되면서 현대그룹도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다.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지난해부터 중단돼 대북사업을 이끌던 현대아산이 타격을 받았다. 현대아산은 금강산과 개성 관광 중단으로 지난 6월 말까지만 1536억원 매출 손실을 냈다. 면세점 등에 투자한 한국관광공사와 협력업체도 549억원의 매출 손실을 봐야 했다.
현대아산은 올해 1분기 257억원의 적자를 냈다. 지난해 적자 규모를 훌쩍 넘어섰다. 2006년 145억원, 2007년 168억원의 흑자를 냈던 현대아산은 지난해 213억원의 적자를 냈다. 현대아산은 지난해 3월 이후 세 차례 구조조정을 했다. 관광 중단 전 1084명이던 직원을 411명으로 줄였다. 부서 통합과 임직원의 급여 삭감이 뒤따랐다.
남북관계 악화로 현대아산 타격현대그룹에서 현대아산의 매출 규모는 그룹 전체의 3%에 그친다. 하지만 대북사업이 가진 ‘상징성’이 있다. 현 회장은 지난 7월4일 임직원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강에서 열린 그룹 단합대회에서 “절대 대북사업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북사업은 현 회장의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업이기도 했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1989년 1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금강산 관광사업의 기초가 된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맺었다. 정부 차원의 남북 대화마저 여의치 않았던 시절, 정 전 명예회장의 방북은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정 전 명예회장은 대결적 남북관계를 뚫고 1998년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트럭 수십 대에 소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 남북관계사에 남을 역사적 사건이었다. 현대그룹은 1999년 대북 관광을 주사업으로 하는 현대아산을 만드는 등 대북사업에서 순풍을 탄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단순히 대기업의 사업 영역을 떠나 김대중 정부의 강력한 남북 화해 의지를 보여준 결과물이도 했다. 1999년 1차 연평해전이 일어났음에도 이듬해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던 것 또한 금강산 관광사업에서 쌓아놓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1년 정 명예회장이 별세한 뒤 아들인 정몽헌 회장이 대를 이어 대북사업을 열성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2003년 8월 ‘대북송금 문제’로 정 회장이 특검 조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대북사업은 시련을 맞는다. 그는 유서에서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달라. 명예회장님의 유지를 받들어 남북경협 사업을 계속 추진해 반드시 성사시켜 달라”면서 남북경협에 깊은 애착을 보였다.
김정일 위원장도 대북사업 정통성 인정시아버지에서 시작된 대북사업은 며느리까지 이어진다. 평범한 주부의 길을 걸어왔던 현정은 회장이 경영 일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현 회장은 두 차례의 경영권 분쟁을 겪어야 했다. 대북사업도 순탄치 않았다. 그럼에도 현 회장은 끝까지 대북사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현 회장은 틈날 때마다 “단 한 명이 북쪽 관광지를 찾더라도 대북사업을 할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현 회장을 세 차례 만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대북사업의 정통성이 정주영 전 명예회장, 정몽헌 전 회장의 뒤를 잇는 현정은 회장에게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1975년 1월 젊은 시절의 현 회장은 아버지인 현영원 전 신한해운 회장을 따라 울산 현대중공업 선박 명명식에 참석했다. 그날 현 회장을 눈여겨보았던 정주영 당시 회장은 몇 달 뒤 “군대간 아들이 마침 휴가를 나왔는데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연락해 왔다. 며느릿감으로 선택한 것이다. 첫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고, 이듬해 7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때만 해도 현 회장이 시아버지가 시작해 남편으로 이어진 대북사업을 맡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정주부였던 그는 뚝심의 여성 경영자로 거듭났다. 정권과 체제 유지에 골몰한 남북한 권력자들의 대결 국면은 현 회장에게 꽉 막힌 남북 문제를 푸는 해결사의 일도 떠맡도록 했다. 그의 시아버지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그랬듯.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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