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르네 데카르트의 말은 21세기 한국의 야당 의원들에게 이르러 이렇게 변주될 것이다.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항의해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천정배·최문순 의원은 잇따라 의원직을 사퇴했다. “광기와 비슷한 태도로 밀어붙이”는 정부·여당에 맞설 유일한 방법은 ‘자해’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 사람의 장외 일정을 1박2일 동안 함께했다. 편집자
민주당 지도부가 ‘100일 장외투쟁‘을 선언한 첫날인 7월28일 서울 영등포역 앞 광장에서 정세균 대표(맨 앞줄 가운데)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미디어법 강행처리에 항의하는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여러분, 가끔 고스톱 치시죠. ‘낙장불입’이라고 있지요. 한번 친 고스톱 패는 다시 치면 안 돼요. 그런데 한나라당은 지금 그걸 어겼어요. 정원이 안 돼서 부결된 법안을 다시 재투표했다 이겁니다. 낙장불입을 어기면 판이 어떻게 되죠? 그래요, ‘파투’가 되는 겁니다. 지금 한나라당이 국회를 파투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낙장불입 어기면 파투나죠?”7월28일 오후 4시, 서울 영등포역 롯데백화점 앞 광장. 민주당 선전차량에서 김영주 영등포갑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정세균 대표와 송영길·장상·김민석 최고위원 등 민주당 지도부들이 그 옆에 서 있었다. 김효석·김진표·전병헌 의원 등은 선전차량 옆에 도열했다.
“파투 난 국회를 정상화시킬 수 있도록 여러분이 힘을 모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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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길을 오가던 이들이 서기 시작했다. 그래도 100여 명 남짓. 취재진이 더 많아 보였다. 방송용 카메라를 어깨에 멘, 혹은 디지털카메라를 손에 든 기자들은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고 어깨싸움을 벌였다.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항의하는 민주당의 ‘100일 장외투쟁’ 첫날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김영주 위원장의 뒤를 김민석 최고위원이 이었다. “우리 전통에 밥은 혼자 먹어서는 안 됩니다. 나눠먹어야 하죠. 그런데 지금 한나라당은 그 밥을 혼자 먹으려고 해요. 그게 문제예요. ‘조·중·동’도 그 밥을 자기들끼리만 먹으려고 해요. 지금 미디어법은 한나라당이 조·중·동에게 방송도 독식하라고 밥상을 차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되죠, 여러분!” 무표정하게 서 있던 이들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수를 치는 이도 있었다.
정세균 대표 차례. ‘미스터 스마일’의 표정에서는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선거부정이 드러나면 그 선거는 무효가 됩니다. 입법 과정에서 부정이 드러나면 그 법도 원인무효가 됩니다. 한나라당의 언론악법 처리 과정에서 명백한 법 위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언론악법은 부정투표 사실까지 드러난 원인무효인 악법입니다.” 선전차량 옆에서는 ‘언론악법 부정투표 원천무효’라고 적힌 민주당 명의의 걸개막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선전차량을 내려온 정세균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은 영등포역 주변을 돌며 선전용 팸플릿을 나눠주었다. 건네받는 이들은 무표정했다. 김진표 의원은 심드렁한 이들에게도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선전물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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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팸플릿을 나눠줘 보니 길가에서 ‘찌라시’ 나눠주는 분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이제는 찌라시 주는 사람이 있으면 꼭 받아가요.” 경제·교육 양대 부총리를 거쳤던 그도 이제는 거리에 서는 것이 익숙해진 듯했다. 언제든 거리에 서는 이들은 그 사회의 약자다. 약자의 마음과 처지를 이해하는 것. 민주당은 그걸 거리에서 배워가고 있을까.
“이왕 나왔으면 대안까지 제시하라”
오후 5시30분, 신촌으로 옮겼다. 영등포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신촌역 지하상가에 들어서니 정세균 대표에게 사람들이 먼저 인사한다. 멀리서 달려와 악수하고선 빨개진 얼굴로 돌아서는 주부와 아가씨도 있었다. 몇몇 대학생들이 카메라폰으로 정세균 대표를 찍었다. ‘폰카’의 등장은 중요한 요소다. ‘폰카’는 관심의 대상을 찍기 때문이다. 폰카를 찍던 김용갑(22·대학생)씨는 “개인적으로 미디어법에 관심이 많다”며 “절차상 심각한 하자가 있는 법이니 무효화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후 6시, 정세균 대표와 지도부가 선전차량에 올랐다. 최재성·강기정 의원과 우상호 서대문갑 위원장이 합류했다. 사람들도 300 명 가까이 모였다. 현대백화점 앞 인도가 꽉 막혀 오가기 힘들 정도였다. 민주당 의원들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더 올라갔다. 지켜보던 이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옳소” 하고 맞장구치는 이들도 있었다. 연설을 지켜보던 24살 동갑내기 추지은씨와 조은주씨에게 “미디어법에 대해 관심이 많으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당연하다”며 “국회에 있어야 할 야당 대표가 길 위에 서야 하는 현실이 어이없다”고 했다. 추씨는 “이왕 나왔다면 목소리만 높이지 말고 국민들이 동참하고 실천할 수 있는 대안까지 제시해줬으면 한다”며 “언제까지 국민들도 광화문에 나가서 시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냐”고 말했다. 대학생 이정은(24)씨는 “야당이 이렇게 장외에 나와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면서도 “이명박 정부가 워낙 일방적으로 일을 추진하니 야당이 이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씨는 “방송법도 대기업과 큰 신문들이 지분을 가지게 되면, 그쪽 위주로 돌아갈 것 아니겠냐”며 “진실을 모르는 시민들은 그 말만 믿게 되고, 그러면 정말 있는 사람들 위주의 세상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미디어법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 “잘 모른다”는 한나라당 주장이 무색한 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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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정 의원은 “장외투쟁을 단계별로 봤을 때 전국을 도는 선전전은 8월 말까지 하고 9월 초부터는 10월 재보선 체제로 전환할 예정”이라며 “미디어법 처리 과정뿐만 아니라 그 법 자체가 잘못됐다는 걸 국민들이 잘 알고 있기에 흐름은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민주당 장외투쟁단이 경기 안산 상록수역을 찾은 7월29일, 천정배 의원이 상록수역 앞 상가를 돌며 시민들에게 미디어법 강행 처리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각오를 알리다 한 시민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천정배 의원실 제공
장외투쟁 이틀째인 7월29일, 정세균 대표 등 민주당 장외투쟁단은 경기도로 향했다. 수원을 거쳐 오후 3시 안산 상록수역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의 문학가 심훈의 의 배경이 된 안산. 그 역사는 지하철역 이름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에겐 지금이 식민지의 그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낮을 넘겨도 태양은 30도가 넘게 대지를 달궜다. 천정배 의원은 선전차량에 오르지 않고 시민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이날 오전까지 1박2일 일정으로 ‘민생정치모임’ 워크숍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민생정치모임은 천 의원을 중심으로, 이계안·정성호·제종길·김희선 전 의원 등이 함께하고 있다. 서민의 삶을 중시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모였다고 한다.
상록수역 앞 상가로 향했다. 여성용 의류 매장의 30대 여주인은 천 의원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았다. 천 의원은 굴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일방적인 언론악법에 항의해 의원직까지 내던졌습니다. 서민이 잘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부동산중개업소에서 만난 30대 주부는 “아이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 천 의원이 “둘째아이부터는 보조금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모든 걸 책임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자, 그는 “제가 둘째 낳을 때는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받았다. 그의 손을 꽉 잡던 50대 상인은 “의원직 사퇴하시다니 어려운 결정 하셨다”고 했다. 그에게 “미디어법에 대해 좀 아시냐”고 물으니 “우리같은 서민들과는 상관없는 법 같아서…”라고 말을 흐렸다. 정치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치에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이 자영업자다. 그러면서 정책에 가장 무관심한 것이 자영업자란다. 거개가 또한 보수적이다. 그들에게도 현실은 절박했다. 옷가게에서 만난 30대 상인은 “대기업들이 슈퍼마켓까지 다 해먹겠다고 하는 상황인데,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보좌진들이 그때 “언론노조에 검찰이 압수수색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다”며 “한번 방문해보셔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있는 광화문으로 향했다.
“한나라-조·중·동-재벌 삼각동맹 드러나”차 안에서 그는 “의원직을 내던지고 나니 당장 갈 곳이 없더라”며 “갈 곳이 없는 실직자들, 취업이 안 된 ‘88만원 세대’들의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천정배 의원은 “김형오 국회의장도 인정했듯, 미디어법은 민생과도 상관없고 시급하지도 않은 법인데, 이렇게 무리하게 처리한 것은 이명박 정부에 이 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보여준다”며 “한나라당과 조·중·동 그리고 재벌로 이어지는 ‘삼각동맹’이 드러난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삼각동맹이 추구하는 방향은 신분제 사회의 부활인 것 같다”며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격차를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수준으로 공고히 하고, 그 격차와 신분이 대대로 대물림되는 구조를 꿈꾼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말투는 조용하고 낮았지만, 내용은 격문이었다. 격정적인 대자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이후에 수백만의 조문객들로 ‘조문민란’이 나도, 이 정부는 민주당이 내건 5대 요구안 중 단 하나도 수용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야당 의원들이 자리에 연연하고 있다면 이 정권이 얼마나 우리를 얕보겠습니까.” 그는 이런 18대 국회에서는 의원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는 “대신 용산 참사 현장이나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과 같은 서민들의 삶이 무너지는 곳을 찾아 함께하겠다”고 했다.
오후 5시30분, 언론노조 사무실에 도착했다. 역시 의원직을 내놓은 최문순 민주당 의원이 와 있었다. 최 의원은 “경찰에서 압수수색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나오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최 의원도 이날 오후 4시부터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미디어법 관련 토론회를 마치고 바로 달려왔다고 했다. 의원직을 내놓은 직후부터 그는 미디어법 무효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야 4당과 언론·시민사회 단체들을 오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은 억지 논리로 쫓겨나 기소까지 당하고, YTN 기자들은 해직당하고, 문화방송 제작진은 범죄자처럼 검찰에 체포를 당해도 우리는 단 하나도 막아내지 못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언론악법까지 날치기당하니, 국민들에게 그 책임을 져야겠다는 심정이 들었다”고 했다.
“국민들의 인내, 임계점이 올 것”“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수단은 ‘자해’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때였다. 오후 5시50분이었다. 한 노조원이 문을 열고는 “최상재 위원장 구속영장이 기각됐답니다. 여러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사람들의 환성이 이어졌다. 천정배 의원은 “명백하게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 상황에서, 사법부가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문순 의원의 얼굴에 하회탈 같은 특유의 웃음이 가득 번졌다.
“이 정부는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조·중·동 방송을 허가하고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 정권에 대해서는 무슨 법적·제도적 장치로 제동을 걸 방법이 없습니다. 이 정권은 그런 제동이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투를 할 때가 아니라, 전쟁을 할 때입니다. 우리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죠. 그러면 언젠가는 임계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의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는 임계점이.” 최문순 의원의 마지막 말이었다.
브레이크를 고장낸 두 대의 열차가 마주 달리고 있는 듯한 환각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열차는 궤도를 바꿀 수 없다. 마주 달리는 승용차는 핸들이라도 꺾을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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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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