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실명제 도입과 과도한 이메일 압수수색으로 한국의 네티즌들이 국내 포털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구글이나 야후 등 외국계 포털로 ‘사이버 망명’을 떠나고 있습니다. 국내 인터넷 업체는 죽고, 외국계 업체의 영향력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역차별 아닙니까.”
지난 7월2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한정식집에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과 인터넷 포털 기업 대표들이 점심을 같이하는 자리였다.
한 참석자가 작심하고 최근의 상황에 대한 불만을 말했다. 최시중 위원장은 이 말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김상헌 NHN 대표, 최세훈 다음 대표, 주형철 SK커뮤니케이션즈 대표, 김대선 야후코리아 대표, 서정수 KTH 대표 등 5개 포털 최고경영자(CEO)와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허진호 회장,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 김창희 정책위원장이 참석했다.
다음 관계자는 “경찰이나 검찰이 가져오는 전자우편 압수수색 영장에는 편지함의 성격이나 기간이 특정돼 있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아무개의 이메일 전부’라고 돼 있다”며 “이럴 경우는 받은 편지함과 보낸 편지함은 물론, 휴지통에 있는 전자우편도 모두 줘야 한다”고 말했다. 보통 휴지통에 있는 전자우편은 일주일간 보관되지만, 본인이 삭제하지 않으면 계속 유지해두는 전자우편 서비스도 많다. 지난해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나섰던 주경복 교수에 대한 선거법 위반 수사에서 주 교수의 7년치 전자우편이 한꺼번에 압수수색됐던 이유가 이런 터무니없는 압수수색의 범위 때문이다.
구글의 지메일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핫메일 등 외국계 전자우편으로 주메일을 바꾸는 일을 ‘사이버망명’이라고 한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처럼 다음에 있던 블로그를 구글의 ‘블로그스팟’으로 옮기는 이들도 있다.
사이버망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정치권이었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치열한 검증전을 벌였던 여야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은 장래의 ‘정치적 보복’을 염두에 두고 비밀스런 내용을 주고받기 위해 외국계 전자우편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일반인에게까지 퍼지게 된 것은 전자우편 압수수색 가능성에 대한 잠재적인 두려움이 퍼지기 시작한 탓이다.
다음의 이병선 대외협력본부장은 “구글한글페이지의 전체 페이지뷰가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블로그스팟 등 특화된 서비스에서는 유의미한 변화가 있다고 보고를 받았다”며 “이런 추세가 계속 진행된다면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의 다른 관계자도 “다음의 주력 서비스인 한메일에서도 페이지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며 “인터넷 서비스의 핵심은 보안과 안전인데, 국내 인터넷 업체 서비스의 경우는 이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네이버의 한 관계자는 “정부나 국내 저작권협회에서도 구글이나 유튜브에는 명예훼손이나 저작권 침해 가능성이 높은 글이나 게시물이 올라와도 수수방관하고 있다”며 “국경이 없는 사이버 세상에서 단지 국적에 따라 법 적용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 인터넷 포털의 대표는 “구글과 유튜브가 한국의 실명제법을 거부하고 이를 본사에서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는데, 국내 업체들은 이를 국내 네티즌들을 겨냥한 일종의 마케팅이라고 보고 있다”며 “구글은 사생활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요구로 검열을 수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구글이 ‘정보 민주주의’라는 철학적 토대 아래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정부와 맞서준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지만, 국내 포털들로서는 시장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포털 대표들이 최시중 위원장을 만났을 때 한목소리로 ‘역차별론’을 제기한 것은 이런 인식 때문이다.
최시중 위원장 “포털은 언론”이에 대해 최시중 위원장은 “포털이 미디어 역할을 실질적으로 하고 있으며, 힘도 갖고 있다”며 “포털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산업인 만큼 언론의 성격을 공식적으로 밝혀야 할 때”라고 밝혔다고 한다. 최 위원장은 이어 “포털의 언론 기능에 대한 규정이 이제껏 모호했지만 지금은 교통정리를 할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포털 대표들 앞에서 ‘포털은 언론’이라고 강조한 것은, 포털 규제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대기업들의 경영권 보호를 위해서 ‘포이즌필’(독약 처방)과 같은 강력한 경영권 방어 장치를 도입하는 등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전면에 내세워온 이명박 정부가 포털에 대해서는 ‘노 프렌들리’를 다시금 확인한 셈이다. 포이즌필은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에 맞서 기존 대주주가 시장 가격보다 훨씬 더 싸게 신주를 인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항이다.
한 포털의 임원은 “인터넷의 생명은 자율성과 개방성”이라며 “또한 인터넷은 개인의 창발성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을 토대로 성장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지금은 사이버 망명을 떠날 때가 아니라, 한국의 인터넷을 지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의 발의로 지난 5월 개정된 통신비밀보호법에서는 검사는 전자우편을 압수수색한 뒤 전자우편 소유주에게 30일 이내에 이를 알리도록 했다. 포털 업계에서는 압수수색과 동시에 이를 알려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 포털 업체의 법무팀 관계자는 “현행 형사소송법에는 오프라인에서 압수수색이 이뤄질 때 당사자가 입회한 상황에서 압수한 물품과 내용을 확인하도록 돼 있다”며 “반면 전자우편에 대한 압수수색의 경우 압수된 내용은 물론 압수 사실 자체도 모른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전자우편의 경우 내용의 소유주가 아니라 위탁관리를 해줄 뿐인 전자우편 업체가 내용을 넘겨주는 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주경복 교수도 지난 4월 전자우편 압수수색의 절차와 방법에 대한 문제점들을 종합해 헌법소원을 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주 교수는 변호사들과 시민단체들과 논의해 법리적 보완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헌법소원을 냈다가 자칫 기각되면, 수사기관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전화 통화처럼 엄격하게, 개정안 준비 중민주당에서는 박영선 의원이 전자우편 압수수색 영장 발부 요건을 구속영장 수준으로 강화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 현행 형사소송법 106조 ‘필요한 때에는 물건을 압수할 수 있다’를 ‘범죄를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에 압수할 수 있다’로 바꾸고, ‘이메일의 경우 기간을 특정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넣는다는 계획이다. 한나라당 이학재 의원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을 준비 중이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송수신이 완료된 전자우편은 ‘통신’이 아니라 단순한 ‘물건’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의원은 송수신이 완료된 전자우편도 물건이 아닌 ‘전기통신’에 포함시켜,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뿐 아니라 통신 제한 조처를 청구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쪽으로 요건을 강화하겠다는 생각이다. 통신 제한 조처는 ‘감청’을 뜻하는 법률 용어다. 전자우편 압수수색도 전화 통화 감청처럼 엄격한 제한을 두는 쪽으로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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