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3일.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에서 ‘일심회 사건’ 관련 당원 제명을 핵심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심상정 전 의원)의 당 혁신안이 부결됐다. 조승수 전 의원이 17대 대선 참패의 원인을 자주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로 규정하면서 내놓은 분당론이 확산되던 당시, 이를 막아보려는 평등파의 마지막 시도로 나온 게 혁신안이었다. 혁신안이 부결된 지 이틀 뒤 노회찬 전 의원은 “민주노동당은 스스로의 결정으로 자신의 존립 의의를 부정했다. 조직 보존 논리에 갇혀 병폐를 묵인해온 과거와 결별하겠다”며 탈당을 예고했다. 이어 2월17일 심상정 전 의원도 “현재 민주노동당의 틀로는 진보정치의 희망을 만드는 데 한계에 달했다”며 노 전 의원과 함께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하겠다고 밝혔다. 그 사이 단병호 전 의원, 이덕우 집행위원장 등 민주노동당 지도부급 인사들은 물론, 평등파 평당원 2만여 명이 줄줄이 탈당했다. 민주노동당은 천영세 전 의원을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다시 꾸려 “진보정치 세력의 분열과 대립은 공멸의 길”이라고 호소했지만 탈당 행렬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3월16일 진보신당 창당으로,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원내에 발을 내디뎠던 진보정당의 분당은 현실이 됐다.
2009년 2월15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는 “울산 선거에서 진보 진영이 무조건 승리해 진보 세력이 다시 합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며 4·29 재·보궐 선거 후보 단일화를 논의할 ‘진보 진영 원탁회의’를 진보신당에 제안했다. 강 대표가 18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여러 차례 ‘통합’을 언급했지만 꿈쩍 않던 진보신당도 이번엔 태도가 달라졌다. 두 당은 2월25일 대표단 회동을 열기로 했다. 강 대표가 언급했듯, 후보 단일화 논의의 핵심은 울산 북구다. 조승수 전 의원이 재기를 노리고 있고, 그의 오랜 ‘맞수’인 김창현 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역시 출마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차 여전하지만 공멸 위기감분당 1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아직 ‘이별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상근자나 당원들 사이에선 “분당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통에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다”는 말도 나온다. “서로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그를 존중하는 게 진보인데, 대북관을 문제 삼아 뛰쳐나간 이들을 어떻게 진보라고 할 수 있느냐”(민주노동당 당원), “분당을 하지 않았다면 북한의 핵 불능화를 요구하는 논평이 가능했겠냐,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민주노총의 성폭력 파문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었겠냐”(진보신당 당원)고 할 정도로 서로에게 쌓인 불신도 깊다.
각자 분당으로 얻은 것도 많다는 평가마저 있다. 박승흡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정파 대립 요인이 사라져) 당이 기동력을 갖추게 됐다. 이전의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나 ‘이명박 악법’과 싸우기 위해 민주당과 공조하고, 민생 현장과 함께 하기도 쉬워졌다”고 말했다. 이지안 진보신당 부대변인은 “총선 이후 ‘지못미(노회찬·심상정 전 의원의 낙선을 안타까워한 누리꾼들이 쏟아낸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의 줄임말)파’, 촛불 정국 이후 ‘촛불파’ 등이 입당하면서, 이들이 많은 정책 아이디어를 내는 등 당원 직접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울산 북구를 중심으로 한 후보 단일화의 필요성에 양쪽이 동의하는 이유는 지난 1년 동안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는 판단 때문이다.
의석수가 반토막났다는 사실은 가장 치명적이다. 민주노동당은 강기갑 대표와 이정희 의원이 필사적으로 의정활동을 펴고 있지만, 5석으론 법안 하나 발의할 수 없다. 진보신당은 간판스타 노회찬·심상정 대표조차 한나라당 후보한테 밀려 한 석도 얻지 못했다. “당이 깨지지 않고 총선을 치렀다면 이 지경까지 왔겠나. 정당이 이합집산하는 데 신물이 난 국민들은 분당 사태를 지켜보면서 진보정당도 똑같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한 진보신당 지역위원장의 평가엔 두 당 모두 이견이 없다.
촛불 정국에서 끓어올랐던 대안 정치세력을 향한 열망을 제대로 끌어안지 못했다는 뼈아픈 반성도 나온다. 민주노동당의 한 전직 당직자는 “촛불 정국은 진보정당의 새로운 인물과 지도력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엄청났던 장이고, 진보정당이 한나라당의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할 기회였다. 하지만 촛불집회에서 ‘어느 당 깃발이 앞에 가느냐’를 두고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두 당은 제 몫도 챙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진보 진영이 이명박 정부의 독주를 견제할 ‘강력한 야당’을 탄생시키지 못했다는 자성도 ‘반이명박 전선’ 구축을 위한 후보 단일화의 중요한 명분이다.
후보 단일화 필요성엔 당원·시민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노동운동가들의 모임인 울산혁신네트워크(준)가 2월 초 현장노동자·비정규직·지역주민 1139명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8%가 진보진영 후보 단일화를 원한다고 답했다. 같은 시기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이 당원 469명을 상대로 ‘진보신당 등과의 진보연합’에 대해 물은 설문조사에서도 ‘매우 찬성’(36.9%)과 ‘대체로 찬성’(41.6%) 등 찬성론이 78.5%로 나타났다. ‘개 주려고 죽 쒀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그만큼 넓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두 당이 재·보궐 선거에서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성과를 거둔다면, 강기갑 대표의 바람대로 통합의 계기도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나온다.
당 안팎 단일화 찬성 여론 높아하지만 양쪽이 선거 연합을 이루더라도, ‘당 대 당 통합’으로 쉽사리 나아갈 것으로 전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특히 진보신당은 후보 단일화와 통합 논의는 별개라고 선을 긋고 있다. 노회찬 공동대표는 2월16일 평화방송 라디오 인터뷰에서 “(후보 단일화 논의가) 직접 통합까지 혹은 통합 논의로까지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통합은) 선거 한두 번 같이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이냐를 논의해야 하므로 성격이 다르다”고 못박았다. 민주노동당도 당장 통합 논의에 시동이 걸릴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박승흡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통합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로, 재보선과는 범주가 다르다. 이번 선거 연합이 (통합 가능성을 가늠할) 시험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이런 실천적인 사례가 많이 쌓여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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