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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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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가자에 갇혀 죽어갑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인터넷으로 전해온 참상, 주검 속에 오열하는 팔레스타인인들
등록 2009-01-15 18:15 수정 2020-05-03 04:25

참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 바르샤바의 게토가 팔레스타인 땅 가자다. 도무지 피할 데라곤 없다. 죽음의 덫이 도처에 깔려 있다. 탈출은 불가능하다. 그곳으로 향하는 문은 굳게 닫힌 채다. 다만 용케 살아남은 이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인터넷을 타고 세상 밖으로 전해진다. 무한폭력, 2주의 기록이다.

“가자의 공기가 무겁다. 분노와 비탄,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전폭기의 소음과 미사일의 굉음이 가자의 공기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오늘 하루에만 28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보다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실종됐다. 공습 첫날 가자의 현실이다.” 나즈와 셰이크는 가자지구 누세이라트 난민캠프에 살고 있다. 그가 유엔팔레스타인난민기구(UNRWA)로 보낸 편지에는 이스라엘이 가자를 때려대기 시작한 지난 12월27일의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살려고 간 곳에서 죽음을 만났다.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의 유엔학교에서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숨진 이들의 합동장례식이 열린 1월7일 유가족들이 아이들의 주검 앞에 무릎 꿇고 오열하고 있다. REUTERS/ MOHAMMED SALEM

살려고 간 곳에서 죽음을 만났다.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의 유엔학교에서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숨진 이들의 합동장례식이 열린 1월7일 유가족들이 아이들의 주검 앞에 무릎 꿇고 오열하고 있다. REUTERS/ MOHAMMED SALEM

“가자 아이들의 중간고사 첫날, 이스라엘의 공습이 시작됐다. 아들 아메드는 시험을 마친 뒤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공습은 한동안 이어졌다. 창문도, 벽도, 아이들도 동시에 떨기 시작했다. 딸 살마는 ‘아빠’를 찾으며 쓰러졌다. 아메드는 바닥에 누워 비명을 지르며 형 무스타파를 찾았다. 무스타파는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생후 넉 달 된 모하메드까지 울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좋은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스스로에게 물었다. 심판의 날이 온 건가? 우리 모두 죽는 건가?”

“오늘 280명 사망… 100군데 찢긴 아이”

그날 밤 10시가 돼서야 전기가 들어왔다. 마침내 뉴스를 볼 수 있었다. 만신창이로 방치된 주검들로 화면이 가득했다. “하나, 둘, 열, 스물…. 더 이상 셀 수가 없다. 백! 오, 신이여.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우리, 너무도 하찮아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건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군 전폭기는 파열음을 내고 있다. 너무 긴장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다. 아이들, 가족, 친구, 이웃만 떠오른다. 누구의 이름이 다음번 사망자 명단에 오를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살육의 광기는 그예 해를 넘겼다. 평화단체 ‘국제연대운동’(ISM) 소속으로 지난 11월부터 가자에서 머물고 있는 캐나다인 활동가 이바 바틀렛은 자신의 블로그(ingaza.wordpress.com)에 참상의 하루하루를 기록해왔다. 지구촌이 채 신년 기분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지난 1월2일 그가 올린 기록을 보자.

“오후 1시13분. 전쟁 7일째, 이스라엘 당국이 외국인들이 에레츠 검문소를 통해 가자를 떠나는 걸 허용하겠단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스라엘 무인항공기가 (가자 남단) 칸유니스의 알쿠즈대학 부근에 로켓을 발사해 10~13살 자매 3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온다.

오후 1시30분. 알시파 병원에서 이 글을 쓴다. 방금 전 13살 어린이가 숨졌다. 의료진은 아이가 내출혈에 뇌손상까지 있었다고 했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30분가량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단다. 곁에 있는 병상에는 30대 여성이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다. 전쟁 첫날 출근길에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또 다른 침대엔 15살 모하메드가 누워 있다. 어제 오후 알파루크 사원 인근에서 폭격을 당했다. 머리 부상이 심하고, 다리와 허리에도 파편을 맞았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있다. 위중한 상태다.

하마스 보안시설을 겨냥한 이스라엘군의 맹폭으로 가자시티 중심가의 한 축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한 팔레스타인 남성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주저앉은 건물더미를 내려다보고 있다. AP PHOTO/ KHALIL HAMRA

하마스 보안시설을 겨냥한 이스라엘군의 맹폭으로 가자시티 중심가의 한 축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한 팔레스타인 남성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주저앉은 건물더미를 내려다보고 있다. AP PHOTO/ KHALIL HAMRA

오후 2시40분. 간호사가 ‘수술실에서 또 어린이가 숨졌다’고 전한다. 모하메드 아부 아주, 13살이다. 폭탄 공격으로 온몸에 100군데도 넘는 상처를 입었다. 뇌손상이 큰데다, 다리 절단 수술까지 받았던 터다. …한 외신기자의 말을 들으니, 가자에 있는 435명가량의 외국인에게 소개령이 내려졌다. 나갈 수 없다. …가자지구 전역에서 150만 팔레스타인인들이 도망갈 곳도, 탈출할 수도 없다. 내 목숨이, 외국인들의 목숨이 그들의 목숨보다 귀중할 순 없다. 이 고난의 시기에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불법을 목격하기 위해, 감추려는 전쟁범죄를 기록하기 위해 남아야겠다.”

의료진·장례식 텐트도 공격당해

전쟁 8일째인 1월3일 이스라엘군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가자로 진격해 들어왔다. 작전명 ‘캐스트 레드’ 2단계, 지상전의 시작이었다. 무차별 공습에 총격과 포격이 더해졌다. 아랍 위성방송 가 1월6일 전한 지상군 투입 이후 가자의 참상은 차라리 화면에서 눈을 돌리게 한다. 병원 바닥에 피칠을 한 아이 3명이 누워 있다. 차마 눈조차 감지 못한 채다. 이미 숨을 멈춘 아이들이 추울세라 분홍빛 담요가 주검에 덮여 있다. 곁에서 흰 수염에 머리가 벗겨진 한 남성이 두 팔을 내흔들며 울부짖는다. “가족 중 단 1명도 그의 곁에 남아 있지 않다”고 방송은 전했다. 머리를 따 넘긴 딸아이의 짓이겨진 주검 앞에서 그는 목놓아 ‘신’을 외쳤다.

“우리 가족 모두 죽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아들이 죽었다. 내 여동생과 그 자녀들, 내 사촌들….” 화면이 바뀌었지만, 사연은 다름이 없다. 남루한 옷차림에 콧수염을 기른 남성이 주저앉은 채 오열하고 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아무렇게나 붕대로 감은 채 뛰어드는 이들로 병원은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인다. 그 사이에서 한없는 슬픔에 분노로 치를 떨며 사내들이 펄쩍펄쩍 소리를 내지르며 뛰고 있다. 죽고 다친 이들의 가족이다. 소리쳐봐야 소용없다. 죽은 자는 다시 깨어나지 않는다.

면도날로 잘라낸 듯 폭격으로 한쪽 벽이 날아가버린 폐허의 아파트에도 한때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터다. 콘크리트 천장이 흉물스런 철근 뼈대를 드러낸 곳에 주인 잃은 옷가지며 이부자리가 널브러져 있다. 봉쇄된 채 폭격에 내몰려 있다. 공격은 도처에서 퍼부어진다. 가자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신께 모든 걸 맡길 수밖에. 달리 뭘 할 수 있나. 딸아이는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 더는 아니다.” 애끊는 모정이 하염없는 눈물이 돼 두 뺨을 타고 흐른다.

1월8일 가자지구 북단 베이트 라히아에서 이스라엘군의 미사일 공격 직후 숨진 가족의 주검 앞에서 한 여성이 공포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다. AP PHOTO/ KHALIL HAMRA

1월8일 가자지구 북단 베이트 라히아에서 이스라엘군의 미사일 공격 직후 숨진 가족의 주검 앞에서 한 여성이 공포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다. AP PHOTO/ KHALIL HAMRA

주검을 거두고 부상자를 실어나르는 의료진도 눈먼 폭력을 피해갈 수 없었다. 가자지구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ISM 활동가 샤론 록은 1월5일 자신의 블로그(talestotell.wordpress.com)에 한 ‘의로운 죽음’을 기록해 올렸다. 사건은 1월3일 아침 8시30분께 가자 북부 자발리야에서 시작됐다.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소년 5명이 필사적으로 뛰었다. 3명은 용케 성공했지만, 타에르 함마드는 운이 없었다. 포격에 다리가 날아갔다. 동갑내기 친구 알리가 그를 안아들었다. 이내 총알이 알리의 머리에 박혔다. 알리는 절명했다.

한참 만에 적신월사(이슬람권의 적십자)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다. 구급요원 아라파 알다이엠(35)과 알라 사르한(21)은 먼저 타에르를 구급차로 옮겼다. 이어 알리의 주검을 수습해 실었다. 알리의 주검은 머리가 날아간 상태였다. 병원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구급차 주변으로 폭탄이 날아들었다. 샤론 록은 사르한의 말을 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내 몸이 공기 중으로 날아오르더니 다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썼다.

죽음의 골짜기 된 피난처, 유엔학교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다리 절단 수술까지 받았지만, 함마드는 살아남았다. 사르한도 목숨을 건졌다. 현장에서 한쪽 폐가 완전히 뭉개진 알다이엠은 2시간여를 버티다 끝내 숨졌다. 자녀를 다섯이나 둔 알다이엠의 직업은 과학 교사. 8년째 짬을 내 구급요원으로 자원활동을 해온 터다. 참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샤론 록은 블로그에서 “알다이엠의 장례식을 위해 쳐놓은 텐트를 이스라엘군이 공격해 조문객 5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유엔의 깃발을 높이 올린 학교도 가자 주민들의 목숨을 담보해주지 못했다. 350여 목숨이 찾아나선 피난처는 죽음의 골짜기로 변했다. 1월6일 가자 북부 자발리야에서 유엔학교에 피신해 있던 가자 주민 43명이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숨지고, 100여 명이 다쳤다. 남부 칸유니스에서도, 가자시티 외곽 샤티 난민캠프에서도 유엔학교가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받아 각각 2명과 3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긴, 이스라엘군이 유엔 건물을 겨냥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996년 4월18일,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첫 번째 ‘이적’을 행한 레바논 땅 카나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분노의 포도’란 작전명으로 헤즈볼라 근거지 소탕작전을 벌이던 이스라엘군이 카나 외곽의 유엔군 기지에 박격포탄 세례를 퍼부은 게다. 기지에 피신해 있던 레바논 민간인 800여 명 가운데 102명이 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어린이였다.

카나 학살 직후 시몬 페레스 당시 이스라엘 총리(현 대통령)는 “헤즈볼라가 유엔을 방패로 삼았고, 유엔도 이를 묵인해줬다”고 강변했다. 자발리야 유엔학교 학살 직후 이스라엘군 당국은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마련한 홍보채널(youtube.com/idfnadesk)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가자지구에서 작전 수행 중이던 이스라엘군이 하마스의 박격포 공격을 받고, 이에 응사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불행히도 그곳은 민간인들이 피신해 있던 유엔학교였다. 이런 곳에서 적대 행위를 하는 건 국제법 위반이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지속적으로 민간인을 방패막이 삼는 것에 깊이 우려하고 있다.” 적반하장도 이력이 있는 게다.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 3명의 주검이 1월5일 가자시티 알시파 병원에 수습돼 있다. AP PHOTO/ HATEM MOUSSA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 3명의 주검이 1월5일 가자시티 알시파 병원에 수습돼 있다. AP PHOTO/ HATEM MOUSSA

“참극 당시 학교 건물 안에서 군사행동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증거가 있다면, 즉각 제시하라. 독립적인 조사에 나서라.” 존 깅 UNRWA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반박했다. 국제사회의 비난도 거세졌다. 1월7일 잠시나마 ‘휴전’이 선포된 이유일 게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하나둘 거리로 나섰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빵집으로 몰려갔다. 더러는 양초를, 연료를 구하기 위해 시장으로 향했다. 현지 시각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주어진 시간은 고작 3시간이다. 이스라엘군은 이를 천연스레 ‘인도적 유예’라고 불렀다.

짧은 평화는 쉽게도 달아났다. ‘유예’의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이스라엘군은 가자 북단 베이트 라히아에서 공습을 퍼부어 차 안에 타고 있던 어린이 3명과 아이들의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다.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가자지구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을 명했다. 은 1월8일 이스라엘군 관계자의 말을 따 “가자지구 인구 밀집지역 깊숙이까지 지상군 작전반경을 확대하는 ‘작전 3단계’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폭력의 광기가 다시 불을 뿜었다. 공습 시작 이후 1월8일 밤까지 집계된 사망자는 760여 명, 부상자는 3100여 명에 이른다. 사망자 중에 적어도 200여 명은 어린이로 알려졌다.

“눈을 들어 가자의 상황을 보라. 점점 더 (나치의 유대인) 집단수용소를 닮아가고 있다.” 〈AFP통신〉은 1월7일 바티칸의 정의평화장관인 레나토 마르티노 추기경의 현지 언론 인터뷰 내용을 따 이렇게 전했다. 이에 대해 이갈 팔모르 이스라엘 외교부 대변인은 “수많은 범죄를 무시한 채 하마스의 선동에 기댄 발언”이라며 “이런 발언으로 진실과 평화에 다가설 순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그런가?

눈 맑은 추기경뿐이 아니다. 칼럼니스트 스티브 허치슨은 지난해 3월2일 일찌감치 에 보낸 글에서 “나치가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만든 게토와 가자의 오늘이 너무도 흡사하다”고 썼다. 이번 전쟁 전에도 가자는 게토이자, 수용소였던 게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바르샤바의 게토가 1940년 10월16일 세워졌다고 전한다. 당시 게토의 유대인 인구는 44만여 명, 바르샤바 인구의 약 38%를 차지했다. 하지만 게토의 면적은 바르샤바의 4.5%에 불과했다. 미 중앙정보국이 발행하는 을 보면, 가자의 면적은 360㎢(이스라엘 2만770㎢), 인구는 약 150만 명(이스라엘 712만 명)이다. 인구밀도는 세계 6위권인 1㎢당 4118명(이스라엘 325명)에 이른다.

가자지구

가자지구

게토를 건설한 나치는 그리로 향하는 모든 길목을 막고, 거대한 장벽까지 둘러쳤다. 가자도 마찬가지다. 이어 나치는 식량과 생필품 공급을 극도로 제한했다. 1941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에게는 하루 184kcal의 음식만 공급됐다. 폴란드인에게는 669kcal, 독일인에게는 2614kcal가 제공됐단다. 나치가 대학살을 시작하기 전까지 만연한 질병과 기아, 무차별 총격 등으로 줄잡아 10만여 명의 게토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2007년 6월 이후 이스라엘의 봉쇄로 식량과 생필품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이미 2008년 1분기부터 가자지구 인구의 절반 이상이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는 게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의 최근 보고다.

“나치의 게토·수용소와 흡사하다”

1942년 나치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감행한다. 게토의 유대인을 집단수용소로 옮겨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해 7월부터 9월까지만 줄잡아 25만4천여 명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추방이 곧 학살임은 1942년 말에 이르러 자명해졌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유대전투기구(ZOB), 유대군사연합(ZZW) 등이 꾸려지고, 격렬한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게토를 장악한 이들은 은신처를 만들고, 초소를 세웠다. 한편으론 유대인 공동체 안의 나치 부역자들을 제거했다.

이듬해인 1943년 4월 나치는 마침내 대규모 병력을 앞세워 게토로 진격해 들어왔다. 압도적 무력 앞에 유대 무장조직은 속수무책이었다. 파괴와 방화가 조직적으로 자행됐다. 눈에 띄는 유대인들은 닥치는 대로 사살됐다. 한 달여 만에 게토에서 가장 큰 유대교 회당 파괴와 함께 나치는 살육을 멈췄다. 그새 최소한 5만6천여 명의 유대인이 게토에서 살해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됐다. 그 참혹한 역사를 자양분 삼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인류가 안다. 지켜보고 있다. 학살을 멈춰라.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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