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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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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제 후배로서 그림자 밟을게요”

89년 참교육 세례 받고 교사 된 7인의 2009년…
“지금 전교조는 정치 과잉으로 대중성 잃고 이해관계 집착”
등록 2009-01-08 17:39 수정 2020-05-03 04:25
2009년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창립 20주년의 해다. 성년을 맞이하는 전교조에 이명박 정부는 얄궂은 선물을 보냈다. 학부모·학생의 학습권을 상기시켰을 뿐인 교사 7명을 전격 해직했다. 교육감 선거자금을 불법 제공했다며 간부들을 옥죄고 있다. 새삼스럽진 않다. 20년 동안 전교조는 보수 세력의 배척과 탄압에서 한시도 제외된 적이 없다.
그러나 참교육의 꿈이 아득해진 것의 일부는 전교조 책임이다. 20년 동안 시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굳게 다지지 못했다. 전교조가 곧 참교육인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스멀스멀 확산됐다. 진정으로 위기에 빠진 것은 전교조가 아니라 참교육이다.
20년 전 ‘참교육 선생님’을 따랐던 중·고등학생 가운데 스스로 참교육 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해 마침내 교단에 선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을 ‘참교육 세대’라 부르기도 한다. 1989년의 참교육 교사에게 영감을 얻은 2009년의 참교육 교사 7명으로부터 오늘의 전교조에 대해 들어봤다. 뒤이어 이번에 해직된 교사 7인의 눈으로 전교조의 속살을 살폈다. 편집자
전교조 창립 직후 정권의 해직 위협이 거세지던 1989년 7월9일, 전교조 조합원들이 명동성당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박용수

전교조 창립 직후 정권의 해직 위협이 거세지던 1989년 7월9일, 전교조 조합원들이 명동성당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박용수

그날은 비가 왔다. 여름방학이 일주일 앞이었다. 언제나처럼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교실 청소를 했다. 학생을 때리지 않는 ‘특이한’ 담임이었다. “이 녀석, 나하고 팔씨름 한번 해보자.” 갑자기 학생들을 하나씩 붙잡았다. 중학생 강희석은 ‘이 아저씨가 왜 이러나’ 생각했다. 사춘기 남자아이들은 항상 그렇다. 좋다 싫다 표현을 못한다. 멋쩍은 얼굴로 대걸레를 놓은 아이들 손을 붙잡고 선생님은 팔씨름을 했다. “이제부터는 너희들 못 본다. 나 학교에 못 나오게 됐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건넸을 것이다. 그 또래 사내 녀석들이 으레 그렇듯 아이들은 진심을 드러내는 사람 앞에서 얼굴만 빨개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989년 5월28일 전교조 창립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해 여름 1500여 명의 교사가 교단에서 쫓겨났다. 학생을 때리지 않고서도 조근조근 수업을 참 잘하던 담임 선생님도 그 여름 뙤약볕을 받으며 교문 밖으로 밀려났다.

등록금 대신 내주신 그 선생님

이후 충남 서산중학교 2학년4반 학생들은 작은 저항을 시작했다. 쫓겨난 선생님 자리에 배정된 새 담임 교사의 수업 때마다 책상에 엎드려 잤다. 나무 걸상에 웅숭그리고 앉은 중학생 강희석은 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훗날 그는 산청 간디학교에서 눈 맑은 아이들을 가르치게 될 터였다.

강희석보다 두 살 많았던 서울 대영고 1학년 학생 홍의표는 월세방에 웅크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렇다 할 수입이 없었다. 식구들은 2년에 한 번씩 서울 빈촌을 옮겨다녔다. 도봉동·방학동·대림동을 거쳐 이제 신길동이다. 분기별로 내는 등록금이 1학년 1학기부터 밀렸다. 가난하여 불안했던 10대의 영혼은 그때부터 시를 뒤적이며 삶을 비감했다. 공연히 근처 철거촌을 찾아 우두커니 바라고 서 있었다.

어느 날, 특별활동 ‘명시 감상반’을 지도하던 선생님이 그를 조용히 불렀다. “나한테 여윳돈이 조금 생겼는데 말이야. 등록금 미납자 명단에 네 이름이 있더라. 내가 대신 내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때?” 아이는 자존심이 상했다.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용을 썼지만, 다른 수는 없었다. 10만원짜리 등록금 고지서를 선생님에게 말없이 내밀었다. 10만원도 없느냐고 다그치는 선생님과 대신 내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선생님은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 선생님은 전교조 교사였다. 그를 따라 “가난하고 힘없는 아이들을 끌어안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20년 전의 홍의표 학생은 지금 서울 수송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에게 전교조 선생님은 ‘참교육’ 그 자체였다. “아이들 편에서 아이들의 요구와 이해를 대변하면서도 아이들이 삶에 대해 고민하도록 이끄는 선생님이었죠.”(박성현 서울 목동고 교사) “교과 내용을 사회문제와 연결시켜 재밌게 수업하는 선생님이 전교조 교사였어요.”(권영민 경기 ㅁ고 교사) 그들을 표상 삼아 좋은 선생님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일은 이들에게 자연스런 것이었다.

문제제기 말라는 조합원에 배반감

최동현 울산정보통신고 교사도 참교육 세대다. 그는 이른바 ‘고등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사회 비판의식이 강한 친구들을 모아 학내 비밀모임을 만들었다. 뒤이어 학생회장 선출제도를 직선제로 바꿨다. 다른 학교 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지역 고등학교 학생회연합 모임을 만들었다. 전교조 교사 해직에 반대하는 성명서도 만들어 뿌렸다. 사범대에 들어가 참교육의 꿈을 더 키웠다. 정식 임용을 받기 전인 2001년에 전교조 참교육연구소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참교육 세대 전교조 교사의 전형이라 할 만한 그는 교사 부임 이후 당혹스런 일을 적잖이 겪었다. 수업에 방해가 되니 학생 축제를 열지 말라고 아이들을 종용한 동료 교사가 있었다. 전교조 선생님이었다.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에 대해 교직원 회의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모나게 자꾸 나서지 말라”고 말리는 동료 교사도 있었다. 역시 전교조 선생님이었다. 학생 인권을 최고의 가치로 내건 20년 전의 전교조를 기억하는 최 교사로선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같은 전교조 선생님한테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심한 배반감을 느끼죠.”

참교육 선생님들의 해직을 막기 위한 학생들의 시위도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89년 8월22일, 서울 신목고 학생 400여 명이 전교조 교사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집단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참교육 선생님들의 해직을 막기 위한 학생들의 시위도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89년 8월22일, 서울 신목고 학생 400여 명이 전교조 교사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집단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

권영민(가명) 경기 ㅁ고 교사 역시 전교조가 창립되던 20년 전, 서울 지역 고등학생 운동에 참여했었다. 그에게도 전교조와 참교육은 서로 뗄 수 없는 가치였다. 그러나 김 교사는 교사 부임 이후 ‘비전교조 교사’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했다. “전교조에 가입하진 않았지만 참 열심히 잘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선생님도 적잖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교조 가입을 권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 교사도 있었다. “꼭 조직에 가담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그냥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싶어요.”

학생들보다 교사 입장 중심에

정세길(가명) 대구 ㄷ고 교사는 일종의 ‘전교조 냉담자’가 된 경우다. 그는 “옛날 참교육 선생님들에게 누가 될까 두렵다”며 이름을 밝히길 꺼렸다. 그는 1989년 여름방학 직전, 다른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전교조 교사 해직 반대 시위를 벌였고, 대구 민주고등학생연합을 만드는 데도 참여했다. 1999년 교사로 부임하면서 전교조에도 가입했다. 분회장을 맡은 적도 있다. 그러나 요즘엔 “내가 생각하는 참교육이 전교조가 내세우는 정치적 구호를 통해 가능한 것인지” 깊이 회의하고 있다.

국어를 담당하는 그는 교과과정에 없는 소설 쓰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학기 말에 좋은 습작을 골라 상을 준다. 내년에는 학생들과 함께 자서전 쓰기를 해볼까 생각 중이다. 뜻있는 선생님들과 함께 새 검인정 작문 교과서를 직접 쓰고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아이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선생님”이 그의 목표다. “농땡이만 친다”고 겸양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는 열심히 노력하는 좋은 교사다.

그런 그가 겪은 전교조 교사 가운데는 “교총에도 가입하고 전교조에도 가입한” 경우도 있고, “학생들보다는 교사의 입장을 중심에 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저런 전교조 활동을 거치는 동안 그가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다. 전교조의 부침과 상관없이 학생들의 처지가 20년 전보다 더 암담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는 더 나은 삶을 준비하는 곳인데, 이젠 그런 역할을 못하고 있죠. 입시 중심으로 공부시킨다 해도 대학 들어가봐야 취직도 안 되고….”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렸던 ‘참교육’을 마음속에서 새로 정립했다. 암담한 미래밖에 없는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곳. 그게 정 교사가 생각하는 참교육이다. 교사 개인이 학생 개인과 잘 소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저한테 전교조의 정치적 구호나 거대 담론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전교조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냥 관심이 멀어지는 거죠.”

전교조 선생님을 지키겠다고 나섰던 이들이 전교조에 서운함과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변곡점은 1999년 1월이었다. 교원노조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창립 10년 만에 전교조는 합법 노조가 됐다. 조합원 수가 비약적으로 늘었다. 1500여 명의 해직교사가 주축을 이뤘던 전교조는 합법화 이후 8만여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대표적 교원단체가 됐다. 이 만난 참교육 세대 교사 7인은 “전교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악의적 비판이 과도하다”는 의견과 “전교조를 완전히 넘어서는 새로운 교육운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엇갈렸지만 “노동조합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다양한 성향의 교사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경우는 없었다.

참교육 세대 전교조 교사의 대부분은 1999년 이후 임용됐다. 이들은 ‘합법 전교조 시대’ 10년을 지켜봤다. 대구교대를 졸업하고 1999년부터 교단에 선 정혜연(가명) 경기 ㅅ초등학교 교사는 전교조와 전교조 교사 사이를 잇는 끈이 많이 약해진 것을 발견했다. “초창기 전교조 선생님들은 참교육이라는 지향에 맞춰 자신의 언행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소수 활동가가 전교조를 주도하는 반면, 대부분의 조합원은 거기에 굳이 참여하려 하지 않지요.”

노동·통일운동까지 떠안는 건 과욕

활동가와 조합원 사이에는 ‘정치 논리’라는 해자가 놓여 있다. “전교조는 내 삶의 동반자”라고 말할 정도로 열심인 권영민 교사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있다. 전교조 중앙은 물론 지부 단위까지 ‘조국통일위원회’라는 기구가 마련돼 있다. “통일 교육은 당연히 해야지요. 어떻게 하면 분단 현실을 제대로 알릴지 연구도 해야 하고. 그렇지만 전교조가 통일 ‘운동’의 선봉에 선다는 식의 접근은 어울리지 않아요. 교육운동·노동운동·통일운동까지 다 떠안겠다는 건 욕심 아닐까요.”

홍의표 교사는 5년 전, 전교조의 새로운 모토에 대한 제안서를 올린 적이 있다. 창립 이후 한 번도 변함이 없었던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평화와 인권 교육’으로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21세기 교육의 새로운 화두를 이끌자는 생각이었지만 최고 지도부의 논의로 확산되진 못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전교조가 동맥경화를 겪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교육 현장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전달·확산시키지 못하는 거죠.”

2003년 6월22일, 서울 동국대 만해광장에서 전교조 조합원들이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저지 연가투쟁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2003년 6월22일, 서울 동국대 만해광장에서 전교조 조합원들이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저지 연가투쟁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이와 관련해 참교육 세대 전교조 교사들이 가장 꺼리면서도 꼭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있다. ‘정파’ 문제다. 1980년대에 뿌리를 둔 다른 조직·단체들이 그러하듯 전교조에도 운동권의 전통적인 양대 정파 그룹이 있다. 다른 곳에 비해 전교조는 정파의 폐해가 심각하진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1989년 창립 이후 합법화될 때까지 조직의 진로를 놓고 내부 노선 갈등이 극심했는데, 상층 활동가 대부분은 그 시절의 관성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지회 또는 중앙 선거에는 반드시 양대 정파를 대표하는 인사가 입후보해왔다. “실은 정파 간 차이가 크지는 않아요. 조금 더 전투적이거나 온건하거나의 차이죠. 그런데 감정적 대립이 심해요. 선거가 끝나면 다른 쪽은 함께 일하지 않는 거죠.” 최동현 교사의 설명이다.

네이스 투쟁 때 보수 언론 왜곡도 한몫

흥미롭게도 현장 교사들은 전교조 상층 지도부에 대한 ‘거리감’을 언급할 때, 2003년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네이스) 폐지 투쟁을 함께 거론했다. 당시 전교조는 네이스 도입 방침에 반대해 연차 휴가를 내는 집단 투쟁에 나섰다. 세 차례에 걸친 연가 투쟁에 연인원 6천여 명이 참여했다. 결국 정부 방침은 철회됐고 문제된 항목이 대거 삭제된 상태에서 새로운 네이스가 도입됐다.

이 투쟁은 1999년 합법화 이후 전교조의 현주소를 규정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됐다. 전교조의 영향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러나 ‘안티 전교조’ 담론도 이때부터 비등했다. 보수 언론은 수업을 볼모 삼는 강경 투쟁 집단이라는 프레임으로 이 사건을 다뤘다. 교육 관료는 물론 일선 학교 교장·교감과 전교조 교사들의 골도 깊어졌다. 전교조 내부에선 네이스 폐지 투쟁에 역량을 집중시킨 탓에 7차 교육과정 개편 등 다른 중요 사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당시의 여론 지형은 오늘까지도 반복되고 있다. 정혜연 교사는 “네이스 투쟁 이후 전교조 교사와 일반 교사 사이에 괴리감이 깊어졌다. 전교조는 거대 쟁점에 대한 정치 투쟁만 하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고 말했다.

최동현 교사는 오늘의 전교조가 “힘은 있지만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늙은 호랑이” 같다고 생각한다. 두발단속, 체벌, 학생회 활동 등 학생 인권 문제는 20년 전과 똑같다. 입시 위주 교육은 더 심해졌다. “교사들이 그런 일을 앞장서 개선하려 하지 않고 안정된 직장을 지키는 데만 애쓴다는 인식이 많은데, 전교조가 그런 교사 집단과 국민 사이에서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 교사는 “그런 투쟁에 나서지 않는 전교조를 학부모나 학생들이 얼마나 신뢰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학생에게 다가가야”

참교육 세대 전교조 교사들은 ‘새로운 초심’을 말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학부모·학생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지역아동센터(공부방) 예산을 깎는다는데 그런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켜야 한다.”(정혜연 교사) “전교조를 뛰어넘는 새로운 교사운동이 필요하다. 전교조건 교총이건 가리지 않고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교사들끼리, 야간 자율학습에 문제를 제기하는 교사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학생·학부모의 관점까지 끌어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최동현 교사)

여러 우려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교조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많다. “결국 전교조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강희석 산청 간디학교 교사는 “그래도 교육과정을 재해석하면서 여러 수업 모형을 착실히 연구하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전교조 선생님들”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일제고사와 교원평가제는 하나로 묶인 교육정책인데, 일제고사를 반대하면 순교자처럼 보이고 교원평가제를 반대하면 밥그릇 챙기기로 보이는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년이 된 전교조는 이 문제를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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