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탄원서로 이건희 선처 요청하고 싶어도 너무나 불리한 양형 사유 넘쳐나니 자식들이 나서길 </font>
▣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법학
이건희(66) 전 삼성 회장에게 합당한 형량을 정하기 위해 재판부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은 어떤 것들일까? 삼성 사건 법정에 이른바 양형증인으로 출석 요구를 받은 때부터 나는 이 질문과 씨름했다. 통상적인 양형 참고사항은 범죄의 동기와 정황, 피해 회복 여부와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 반성과 개전의 정 등인데 구체적 맥락을 살펴볼수록 의외로 생각할 구석이 많았다.
범죄 동기는 욕심, 집행유예 중 범행
첫째, 범죄 동기. 이건희 전 회장의 범죄 동기는 물론 세금을 내지 않고 경영권을 세습하려는 욕심이었다. 1998년 2월에 등장한 김대중 정부가 재벌 경영권 승계 과정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나섰지만, 이 전 회장은 일단 시작한 무세(無稅) 세습작전을 쉬지 않고 밀고 나갔다. 예컨대, 에버랜드는 98년 12월 삼성생명의 지분 20%를 취득한다. 이로써 이재용(40) 삼성전자 전무로의 3세 승계는 실질적으로 완료된다. 이 전무를 정점으로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돌고 도는 소유지배구조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범죄 동기를 무세 세습 욕망에서 찾지 않고 ‘경영권 방어’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들은 이건희 전 회장 등 피고인들에게 한결같이 “(공소대상 범죄행위가) 경영권 방어를 위한 목적이었지요?”라고 물었다. 경영권 방어에는 뭔가 공익이 숨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경영권 방어는 철저하게 총수의 사적 이익에 속한다. 경영권을 목적으로 한 총수의 배임과 집 장만을 목적으로 한 직원의 배임은 스케일만 다를 뿐 개인적 이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법적 평가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선처의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범죄 정황.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배임 발행은 96년 10월에 시작해서 12월에 완료됐다. 이때는 이건희 전 회장이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확정받은 직후였다. 집행유예 기간 중에 범죄를 저지르면 집행유예를 취소하고 곱징역을 살린다. 선처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99년 2월의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배임 발행 사안은 죄질이 더 나쁘다. 때는 바야흐로 외환위기로 말미암아 국민의 고통이 극에 달하고 강도 높은 재벌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시기였다. 더욱이 이 전 회장은 삼성차 부실 책임으로 98년 내내 여론의 십자포화를 받아왔다.
이런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삼성SDS 배임 발행은 △경영권 승계 작업이 98년 12월에 마무리됐음에도 순전히 한몫 더 챙길 욕심으로 추진됐고 △CB 발행이 세법상 규제대상이 되자 BW 발행을 획책해서 법과 당국의 뒤통수를 쳤으며 △김용철 당시 삼성 법무팀장이 법적 위험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만류했음에도 강행했다는 점에서 선처의 여지가 전혀 없다.
셋째, 여죄 여부. 기소된 범죄 혐의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도 이 전 회장에게 불리한 양형 요소다. 주지하다시피 배임을 통한 경영권 승계 작업은 94년 10월부터 98년 12월까지 4년에 걸쳐 수많은 계열사들의 직·간접적 참여와 협력 속에서 단계적으로 추진됐다.
여죄가 많고 피해 회복 어려워
각종 시효와 수사의 한계 때문에 대표적으로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의 배임 발행만 기소됐을 뿐 삼성전자, 제일기획, 서울통신기술, e삼성 등 기소되지 않은 판박이 사례가 많았다. 다시 말해서 기소장에 명시된 범죄 및 피해 규모는 공소시효와 조세시효 등 각종 시효 덕에 대폭 축소된 것일 뿐 여죄가 많다는 점도 불리한 양형 요소다.
넷째, 피해 회복 여부. 삼성 쪽은 몇 해 전 8천억원의 사회환원을 약속함으로써 이재용 전무 남매의 부당이득을 전액 사회에 반납했으므로 선처해달라는 입장이다.
이 전무 남매가 불법 취득한 보유지분의 가치는 2007년 말 현재 각각 1조1500억원, 2500억원, 2천억원 정도로 평가된다. 사망한 이 회장 딸도 2천억원의 상속재산을 남겼다. 이것만 합해도 총 1조8천억원이다. 더구나 이런 재산평가액은 이 전무 남매의 보유지분이 모두 지배지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추가해야 할 해당 계열사에 대한 경영권의 가치를 조금도 반영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 전무는 단순히 계열사 지배주주가 아니라 그룹 전체의 지배주주다. 당연히 삼성그룹 전체 경영권의 값을 쳐 줘야 하는데, 모르긴 해도 수십조원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재용 전무 남매의 부당이득을 다 반환했다는 셈법은 정말 터무니없다. 더욱이 8천억원 중 이 전 회장 일가의 신규 출연금은 3300억원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과거부터 활동해온 꿈나무장학재단의 출연금을 이름만 바꾼 것이다. 아무튼 3300억원대의 사회환원 약속으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속셈은 최소한 십수조원에 달할 부당이득의 실제 규모에 비춰볼 때 국민 눈속임에 가깝다. 선처 사유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다섯째, 경제 악영향 우려. 사법실무에서는 그동안 재벌 총수를 엄벌에 처할 경우 그룹 경영과 국가 경제에 적지 않은 악영향이 초래될 것을 우려해서 선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반성도 않는데 선처를 어찌할꼬
다행히 이건희 전 회장을 위시한 삼성 쪽 피고인들은 이미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라 이런 우려를 할 필요가 없다. 지난 4월 이 전 회장의 전면 퇴진이 발표됐을 때 주식시장이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하는 게 좋겠다.
여섯째, 반성과 개전의 정. 97년 9월 안기부가 도청한 이른바 ‘X파일’의 내용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에 따르면, 삼성 쪽은 검찰 간부와 기타 국가기관을 상대로 엄청난 뇌물을 살포해왔다. 2002년 대선 기간에 500억원대 대선자금을 불법 제공한 사실도 수사결과 드러났다.
지난 5년간 삼성에버랜드 기소, 대선자금 재판, X파일 소동, 비자금과 차명계좌 폭로 등 비상한 국면을 거쳤지만 이 전 회장은 문제가 된 과거의 불법 비리와 단절하기 위해 어떤 실질적인 노력도 한 바 없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던 이 전 회장이 정작 자신의 오랜 불법 관행을 혁파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전 회장에게 유리한 양형 사유는 삼성반도체 신화의 주인공으로 국가경제에 기여했다는 점 하나인 반면 불리한 양형 사유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재판부의 선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배임 범죄의 산물로 부당하게 취득한 범죄의 과실(보유지분)을 완전히 포기하는, 너무나 당연한 방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범죄의 과실은 원칙적으로 몰수당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억울할 것도 없다.
물론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전무 남매가 삼성에버랜드를 비롯한 불법 취득 보유지분에 대해 깨끗이 포기 선언을 하면 당장 내가 앞장서서 이 회장에 대한 선처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할 참이다. 사실 처음 삼성을 고발한 법학교수들은 모두 이런 광경을 꿈꿔왔다.
요컨대, 이 전무의 범죄과실 포기와 배임승계 포기는 이 전 회장과 가신들에 대한 선처는 물론 이 전 회장 부자와 삼성그룹이 지난 10년간의 원죄에서 벗어나 국내외의 신뢰와 사랑을 불러올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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