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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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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많아 토론 안되는 사회”

등록 2008-07-04 00:00 수정 2020-05-03 04:25

정치적 상황 따라 흥분하는 토론판 아닌 ‘교과서적 토론’을 강조하는 시사평론가 정관용

▣ 글 최성진 기자csj@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토론의 르네상스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토론을 한다. 방송에서도, 인터넷에서도, 광장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걸기를 시도한다. 할 말이 많다 보니 토론은 자주 말싸움으로 흐른다. 토론 진행자가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때다. 어디에도 그의 편이 없고 누구를 편들 수도 없지만, 진행자의 한마디는 내로라하는 논객들을 침묵하게 한다. 때로는 막말과 요설이 판치는 토론에서 진행자의 침묵은 가장 무거운 권위를 갖기도 한다.

‘대구의 밤문화’ 아찔한 인신공격

시사평론가 정관용(46)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토론을 진행해온 인물이다. 2003년 이후 6년째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저녁 한국방송 1라디오의 을 진행해왔고, 일요일엔 한국방송 1TV로 옮겨 의 중심을 잡았다. 시사 프로그램과의 인연은 좀더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CBS 뉴스 해설을 시작으로 방송계에 입문했고, 96년 처음으로 SBS 라디오 진행을 맡았다.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생활을 따진다면 올해로 벌써 12년째인 그는 “우리의 토론문화가 전반적으로는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정치적 상황에 따라 토론의 분위기가 너무 쉽게 흥분된다”고 꼬집었다. 그가 ‘흥분’ 사례로 꼽은 사람은 최근 문화방송 에서 촛불집회에 관해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과 설전을 벌인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였다.

“토론이 싸움이 되면 양쪽 모두 논점 일탈, 인신공격 등 각종 논리적 오류를 범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는데, 그러면 보는 사람들은 재밌다고 하죠.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토론문화의 성숙에는 역행하는 거란 말이죠. 몇 년 전 공판중심주의 도입과 관련해 검찰과 법원이 공방을 벌일 때였습니다. 검찰 쪽 누군가가 나와서 ‘대법원장, 그 양반이 변호사 개업하고 몇 년 만에 몇십억원을 벌었다’고 했는데, 이게 대표적인 인신공격의 오류입니다. 공판중심주의라는 논점과 대법원장 개인이 변호사로 몇십억원을 벌어들인 것은 논리적 상관관계가 전무하지만, 그런 발언이 지켜보는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쳐요. 그걸 노리는 겁니다. 이번에 진중권 교수가 에서 주성영 의원을 향해 ‘대구의 밤문화’를 얘기했다고 하던데, 그것 역시 전형적인 인신공격의 오류라는 거죠.”

역시 문제는 ‘재미’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토론에서 재미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등장했고, 심지어 ‘열사’가 나타났다. 토론에서 오간 말들이 유행어처럼 번지기도 했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정관용식 토론’은 교과서적 의미의 토론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쉽게 말해서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재미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그거도 역설입니다. 사람들에게 토론 프로그램을 평가하라고 하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결론도 못 내고 ‘싸우기만 한다’는 비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싸우는 걸 또 많이 봐요. 토론에 출연한 사람들이 격렬히 싸우면 시청률이 올라가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면 시청률이 내려갑니다. 이런 역설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도 설득당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이뤄지는 충실한 토론일수록 사실 재미가 없다는 거죠.”

‘싸우기만 하는’ 토론이 재밌다?

그는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고 세력과 세력이 충돌하면 자연스럽게 토론에 대한 수요도 폭증하지만, 토론에 임하는 양쪽이 서로를 적으로 규정할 때 제대로 된 토론은 멀어지게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할 말이 참 많은 사회죠. 해방 이후 근대화는 물론 산업화·민주화까지 한꺼번에 이뤄지면서 그때그때 풀어야 할 문제들을 미처 마무리하지 못하고 온 겁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가슴속에 앙금들이 많아요. 공통의 합의 기반과 상식의 영역도 좁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토론할 것도 많고 토론 자체도 어려운 나라입니다.”

‘깔끔하고 합리적인’ 토론 진행만큼이나 인터뷰에서 내놓는 답변도 기름기 하나 없이 담백하다. 슬며시 그에게 “토론 기법상 공격적 토론도 필요하고 심지어 인신공격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그것도 제가 논리적으로 설명해볼게요. 이미 자기 편인 사람에게 통쾌함을 주는 토론과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한 사람을 1%라도 더 설득할 수 있는 토론을 비교하면 어떤 게 더 유의미합니까. 자기의 소속집단에서 박수를 받으려면 소속집단의 논리와 언어를 구사하면 됩니다. 하지만 토론의 진짜 중요한 목적은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을 향해,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에는 가운데를 향해 조근조근 이야기를 잘 안 합니다.”

그는 ‘합리적인 대신 딱딱한’ 심야토론의 분위기를 한번 바꿔볼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다시 한 번 토론 프로그램의 원칙과 기본을 강조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역사가 제일 오래된 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토론 프로그램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원칙에 충실하려고 더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건 주제를 선정할 때도, 연사(패널)를 섭외할 때도, 토론을 이끌어나갈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겁니다. 내친김에 이 이야기도 하죠. ‘A라는 사람이 살인자냐 아니냐’처럼, 뜨거운 관심이 집중되더라도 어느 것 하나가 명백한 진실일 경우 이는 토론의 논제로 삼을 수 없어요. 그런데 타 방송에서는 그런 걸 논제로 막 올리죠.”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내내 무색무취한 성향을 보인 그에게 ‘당신은 진보인가 보수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한 나는 중도”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만난 패널 가운데 최고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사람 이름을 거명하는 질문은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토론을 계속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끝장토론’ 진행자 백지연 인터뷰

“아직 우리에겐 ‘논객’이 없다”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조기 교육을 하려거든 토론을 가르쳐라.”
최근 커뮤니케이션 교육서비스사업 ‘PJY 홀딩스’를 설립한 백지연 대표는 토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케이블 채널 XTM의 사회자이기도 한 그는 “한국에 ‘토론의 달인’이라 할 만큼 논리적인 토론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다”며 “토론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사람조차 그 독선과 아집에 ‘뜨악’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토론 공부법’을 물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나.
=말은 사고의 전개다. 그리고 생방송이다. 사고의 프레임이 정리돼 있지 않으면 틀에 맞게 서론-본론-결론으로 얘기할 수 없다. ‘논리적 읽기-논리적 쓰기-그중 좋은 것만 빼서 말하기-그 과정을 반복하기’의 4단계가 우리 교육 과정의 뼈대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읽기·쓰기·말하기의 모든 과정을 통해 체계적인 토론 교육을 해야 한다. 지금 교육 현장엔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 아직도 웅변학원에 찾아가 ‘길거리에 나가 소리 지르기’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소통이 아니다.
논술세대인 젊은이들의 경우는 기성세대보다 토론 실력이 좀 낫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젊을수록 어휘력이 부족하다. 입시를 위한 공부에만 매달리다 보니 자신만의 철학이나 사고의 틀이 잡히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사고한 내용도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형용사·부사가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동사가 부족한 정도다. 젊은이들 중 장학생을 선발해 지원하고 싶은데 뽑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
지금의 토론 활성화 분위기를 어떻게 보나.
=토론을 향한 열정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토론 방향도 바람직하게 가려면 서로 철저히 논리로 반박해야 한다. 좌우 양쪽에서 논리와 논거로 무장한 논객이 나와줘야 한다. 한데 아직 논객을 키우는 토양이 없는 듯하다. 이번에 불타오른 김에 토론 훈련을 많이 해보고 제대로 된 토론문화가 발전한다면 그게 우리 사회가 부자 되는 길이다.
지금 논객들은 실력이 부족한가.
=예를 들어 ‘쇠고기 청문회 스타’라면 정부가 잘못한 부분을 조목조목 논거를 들어 지적하고 반박했어야 한다. 그런데 “어린애한테 이런 거 먹이겠습니까?”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 대중에게 통한다. 언론에서도 제목으로 뽑기 좋은 한마디 혹은 과격한 언어를 사용한 논객을 과대포장하곤 한다. 논거도 없이 극단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건 보수·진보를 떠나 논객 자격이 없다. 사안에 대해 철저히 알고 사고하고 나서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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