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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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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르포상] 살아남은 르포작가의 슬픔

등록 2008-06-20 00:00 수정 2020-05-03 04:25

난지도 주민들 이야기로 데뷔한 유재순씨…그는 왜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나

▣ 도쿄=김순천 르포작가

도쿄 신주쿠 오쿠보 거리에 있는 한 찻집과 와세다 거리에 있는 집을 오가며 유재순(51) 르포작가를 만났다. 유씨는 르포가 활기찼던 19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작업을 해온 유일한 한국인 르포작가이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씨는 지금은 상암월드컵경기장으로 변한 서울 난지도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을 써서 신동아 논픽션상을 받으며 르포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그는 고단샤 소속 잡지 에서 북한 전문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담은 르포집을 준비 중이다. 그에게서 한국의 르포 역사는 물론 일본 르포 현황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르포작가가 10만 명은 될 것

2006년 일본에 갔을 때 나는 일본의 르포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돼 있음에도 많이 실망해서 돌아왔다. 일본 르포가 매우 다양해 한 가지 색으로 칠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 ‘르포저널리즘’의 경향이 강했다. 그즈음 나는 ‘르포’도 아닌, ‘르포저널리즘’도 아닌 ‘르포문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인간의 삶과 정서가 깊이 밴 풍요로운 글을 원했던 것이다. 일본식 르포는 ‘드러내기’와 면밀한 ‘사실보도’의 건조한 결합이 주였다. 그런 날카로운 글들에 마음을 주기가 쉽지 않았다. 에 살인사건 전문 르포를 주로 쓰는 젊은 일본 르포작가도 인터뷰에서 언젠가는 자신도 인간들의 삶을 풍부히 다룰 수 있는 글을 쓰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 친구는 고향이 오키나와인데, 오키나와의 푸르디푸른 삶의 색이 묻어나는 르포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변했다. 일본 저널리즘의 역사를 접하고 유씨에게서 30명이 넘는 르포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마음 한켠을 열어놓게 되었다. 르포의 기본에 대해서 더 깊고 섬세하게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르포는 자신의 취향, 심정, 기법 같은 것을 버리고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문제 상황’을 드러내야 한다.” 일본의 르포르타주 화가인 나카무라 히로시의 말이 깊게 다가왔다. 모든 색을 죽여 선과 형태를 뚜렷이 드러내는 흑백사진처럼, 그들은 핵심만 전하는 건조하고 날카로운 글을 통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사회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에 수많은 선들을 그어놓았던 것이다. 르포작가들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초를 단단히 잡아주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르포작가들이 열정을 다해 르포를 써냈던 것이다.

유씨가 컴퓨터를 켜더니 한 인터넷 사이트를 보여주었다. ‘블로그 르포르타주’였다. 대부분 일상생활을 담은 수많은 르포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어느 누구든 르포를 써서 올리고 그 르포가 승인되면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만큼 르포가 일상화돼 있었다. 유씨는 일본에서 이름 없이 뛰는 마니아층까지 합하면 르포작가가 한 10만 명은 된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으려고 마니아층의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프로 뺨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오히려 그곳에서 더 많고 좋은 정보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기록문화의 역사가 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월드컵 때 어느 외국 기자가 이런 글을 썼다. 골을 넣으면 한국인들은 ‘함성’을 지르지만 일본인들은 ‘빛’이 반짝인다고. 일본인들은 ‘내가 여기 있었노라’ 기록하고 증명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육체노동자, 주부, 학생, 화이트칼라 심지어 스모 선수들까지 일본인들은 자신이 만나는 세계를 기록했다. 그러니 르포가 섬세하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유씨에게 일본 하류사회에 대한 르포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인터넷에 수만 건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여줬다. 그것도 도쿄 하류사회, 기타큐슈 하류사회 등 지역별로, 분야별로 세밀히 분류돼 있었다.

일본에는 르포가 실린 잡지를 다 모아놓은 잡지도서관도 있었다. 유명한 평론가이자 르포작가였던 오야 소이치가 만든 도서관이었다. 이곳에 가면 그동안 일본에서 나온 르포는 거의 모두 찾을 수 있다. 유씨도 미처 보관하지 못한, 자신이 썼던 르포를 찾으러 그곳으로 간다고 했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휴일이어서 아쉽게도 들어가보지 못했다. 필요한 자료를 언제든지 가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일이었다. 인터넷에 나오지 않는 자료를 하나 구하기 위해 여러 군데를 전전긍긍하면서 돌아다닌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르포문학상에 해당하는 논픽션상은 오야 소이치, 고단샤, 쇼각관, 신조, 가이코 다케시 등 다섯 개가 있는데 그중 가장 권위 있는 상이 바로 이 도서관을 설립한 오야 소이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논픽션상이다. 지금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을 쓴 다치바나 다카시 등 유명한 르포작가들은 대부분 이 상을 거쳐갔다. 미국에서 딸기농장 일을 하는 일본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이시카와 요시미, 에이즈 환자들과 1년간 생활한 체험을 르포로 썼던 이에다 쇼코, 일본 사회에서 금기였던 조선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을 쓴 혼다 야스하루 등 좋은 르포작가들이 많았다.

수많은 자료가 쌓여 있는 유씨 서재에서 나는 재미있는 르포 하나를 발견했다. 여러 지역에 있는 일본 공무원들의 일상을 좇으면서 쓴 르포집이었다. 거기에는 오후에 졸음에 겨워 자는 모습도 보였고, 부정을 저지르는 현장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난지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유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30∼40대를 일본에서 보낸 것을 행운이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르포작가에 대해 철저히 예우할 줄 알았다. 한국에서 1980년부터 88년까지는 르포의 전성시대였다. 군사정권에 의해 언로가 차단된 가운데 현장 중심의, 소외된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는 르포는 많은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석정남의 , 유동우의 , 유재순의 은 그 대표격이었다. 거기에 힘을 받아 각종 잡지, 일간 신문들에 르포를 담는 난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르포 전문 특집도 편성됐다. 불과 1년 사이에 르포작가 수십 명이 생겨나기도 했고, 르포작가 중에는 소설이나 시 쓰는 사람들이 전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부에는 르포를 담당하는 전문기자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88올림픽이 지나면서 르포를 싣는 지면들이 사라졌다. 유씨도 30편 정도 되는 르포를 지면이 없어 실을 수 없었다고 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르포를 주로 읽던 중산층들이 해외로 관심을 돌리면서 밑바닥 계층의 목소리로부터 멀어졌다. 그전에는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 양다리라도 걸쳤던 사람들이 남은 조그만 양심마저도 버렸다고 했다. 철저히 개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90년대 르포작가들은 참 쓸쓸했어요. 침체라기보다는 ‘사장’된 거죠. 윤재걸씨 등 유능한 르포작가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어요.”

유씨가 처음으로 르포를 쓴 것은 1981년 초였다. 잡지사에 취직했는데, 편집장이 원고뭉치를 기무사에 가지고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원고는 거의 다 빨간 줄이 그어져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나왔다. 7개월 정도 근무하는 동안 기사가 두세 번밖에 나가지 않았다. 사회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였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유 선생은 난지도에 갔다. 수색에서 논과 밭길을 지나 1시간쯤 걸으면 난지도가 나왔다. 당시 난지도에는 2천여 명이 쓰레기를 파헤쳐서 먹고살고 있었다. 이 사실이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두환씨가 정권을 잡자마자 차라리 쓰레기를 줍고 사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난지도로 들어가게 되었다. 르포를 쓰려고 들어간 게 아니었다. 난지도에는 아이들이 200명 정도 있었는데, 학교를 잘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냄새난다고 차별하고 무시해서였다. 유씨는 그들을 가르쳤다. 스스로 아이들을 돌봐줄 수 없는 어머니들은 굉장히 고마워했다. 수업료는 ‘박카스’ 한 병이었다. 가르치면서 간첩으로 몇 번 신고당하기도 했다. 나중에 난지도 사람들이 5천 명으로 늘어났다. 한번은 교회 전도사 부인이 불도저에 깔려 죽었는데, 유씨가 직접 그 으스러진 주검을 들어올렸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유씨는 아직도 목이 메었다. 그 사건을 기사로 쓰게 되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에서 어떤 내용이든 좋다면서 10쪽 분량의 지면을 할애해주었다. 유씨는 그 지면에 10년 동안 르포를 썼다.

구로공단에 있는 소니전자 하청 부품공장에 한 달 동안 들어가서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취재하기도 하고, 사북탄광에 들어가 광부들의 집 구조에 대해 취재하기도 했다. 해외에 함부로 나갈 수 없었던 83년, 르포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아시아 8개국 빈민 지역을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공원에서는 유럽인에게 성매매하는 아동을 만났고, 타이에서는 판자집 서민들을, 필리핀에서는 쓰레기 산을, 대만에서는 고산지대 사람들을, 싱가포르에서는 밀림으로 고무를 채취하러 가는 노동자를, 홍콩·일본에서는 빈민가 사람들을 만났다. 취재하는 동안 유씨는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나중에 일본 의 초청을 받아 갔을 때 그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하나 보았다. 카메라가 현장을 따라가는 프로그램이었다. 한국방송 신안수 PD에게 제안을 하고 함께 취재해 이란 이름으로 방영하게 되었다.

르포의 퇴보는 언론사 책임

유씨는 한국 르포가 자꾸 퇴보하고 사장되는 것은 한국 언론사들의 책임이 크다고 했다. 가끔 한국 신문이나 잡지사에서 일본 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르포 요청이 오는데, 기본도 안 지키는 경우가 많다. 며칠 전에도 한 언론사에서 일본에 살고 있는 유명한 어떤 사람에 대한 르포를 요청했는데, 정말 꼭 필요해서 한 게 아니라 화제가 되고 있으니까 취재를 부탁했다. 이것부터 문제이다. 왜 꼭 써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다. 그러니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 되는 것이다. 유씨가 거리가 멀어 취재비가 들어가겠다거나 일본 관례대로 인터뷰비가 필요하겠다고 하면 ‘인터뷰비를 줘가면서 취재를 해야 되나?’라고 도리어 반문한다. 중간에 선 유씨로서는 황당해지는 것이다. 취재할 때도 필요한 질문을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주지도 않는다.

한국의 대부분 언론사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일본인에게 부끄러워질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취재를 하면 할수록 마이너스가 된다. 르포의 하이라이트는 완성도인데, 그런 분위기에서는 완성도를 높이는 게 힘들어진다. 고단샤 같은 경우 잡지만 해도 100여 개를 출간한다. 조·중·동 다 합한 것보다 매출 규모가 더 크다. 이 회사는 이익의 일정 부분을 팔리지 않아도 꼭 기록으로 남겨야 할 부분에 재투자한다. 유씨가 경험한 대부분의 언론사나 출판사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 가와무라 미나토 호세대 교수는 15년이 걸려 인문학 성격의 르포집을 냈다. 출판사가 15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지원을 해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일본은 오랫동안 르포를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60년 동안 스모만 르포 작업을 한 작가가 있는가 하면, 유바리 광산에 대한 작업을 10년 넘게 한 사람도 있다. 시민들도 ‘라멘’을 사랑해주듯 이런 르포작가에게 오랫동안 신뢰를 보내고 지지해주었다. 출판사의 열정, 르포작가들의 성실, 일본인들의 신뢰가 결합해 아직도 일본에서는 르포가 싱싱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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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100과 함께하는

제2회 한겨레21 르포상 공모

르포는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출발하십시오.
르포는 희망입니다. 다른 세계를 상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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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200자 원고지 800장 안팎의 르포
     (워드 작업 뒤 출력해 제출)

취재 과정에서 찍은 사진들(일반 흑백 프린터로 한꺼번에 모아서 출력해도 무방함)
*원고지 10장 안팎의 내용 요약서를 첨부하고 원고 매수를 적어주세요.

주제 제한없음

응모자격 기성, 신인 구분 없음.
            팀으로도 참여 가능.

마감 2008년 9월31일(마감 당일 소인 유효)

심사 심사위원은 나중에 밝힘

발표 2008년 11월 말 지면과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고

상금 당선작 1편 1천만원

보낼 곳 (121-750)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16-25
          한겨레신문사 4층. .
          ‘한겨레 21 르포상 응모작’이라고 적으십시오(우편으로만 받습니다).
          반드시 본인의 이름, 주소, 연락처를 적으셔야 합니다.

문의 bretol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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