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양극화’라는 단어는 아시나요

등록 2008-06-19 00:00 수정 2020-05-02 04:25

성장제일주의자로 이루어진 이명박 경제팀, 고환율 정책이 물가 부추겨 서민경제는 총체적 위기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올 1분기 경제성장률은 5.7%다. 그런대로 높은 성장률이다. 주요 수출기업들의 올 1분기 영업이익은 1년 전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삼성전자의 이익증가율은 82.1%, 현대자동차 81.6%, 현대중공업 58.9%다. 그런데도 서민경제는 바닥을 기고 있다. 기름값이 무섭게 치솟고 각종 생필품 가격이 덩달아 급등하면서 ‘죽을 맛’을 호소하고 있다. 5월 소비자물가는 4.9%까지 치솟았다. 200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IMAGE4%%]

‘먹고, 입고, 타는’ 기초품목들이 껑충 뛰었다. 밀가루값은 1년 전에 비해 66.1%나 폭등했고, 빵류(11.4%)·스낵과자(16.0%)·라면(14.4%) 등이 두 자릿수로 올랐다. 자장면값도 14% 뛰었다. 대부분 대통령이 집중 관리를 지시한 52개 품목(이른바 ‘MB 물가’)들이다. 돼지고기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의 여파로 24.7%나 올랐고, 파(43.0%)·양파(19.0%)·달걀(21.9%)·두부(17.1%)·콩나물(11.3%)값도 폭등하고 있다. 물가 폭탄을 맞아 서민들의 생활고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상·하위 20% 계층 소득 최대 격차

소득 상위계층 20%의 소득(월 731만원)을 하위계층 20%의 소득(월 86만원)으로 나눈 소득 5분위 배율은 올 1분기에 8.41배로 확대됐다.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최대 격차다. 경제성장도 중요하지만, 양극화 해소가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당면 과제인데도 이명박 경제팀의 성장만능주의 정책 틀에서 양극화는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 대통령부터 강만수 경제팀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이명박 경제팀은 ‘양극화’란 말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7% 경제성장 목표만 달성하면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최근의 물가폭등세는 불에 끼얹은 기름이다. 양극화 심화 속에 물가 폭등이 겹치면서 서민들의 고통이 극심해지고, 더는 못 살겠다는 말이 촛불집회장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김기원 한국방송대 교수(경제학)는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 정책 덕분에 수출 대기업들의 수익은 계속 좋을 것이고, 그래서 성장률이 크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지금 한국 경제가 당면한 문제는 성장률이 아니라 양극화다. 사실은 서민 지지표도 많이 받은 정권인데 분배나 양극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하고, 그러다 보니 당면 문제에 대처할 능력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가계부를 들여다보면 서민들의 생활이 팍팍해지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올 1분기 전국 가구소득 하위 20% 계층의 월평균 가계소비지출 항목 가운데 보건의료비는 9만7천원으로 5년 전(6만1천원)에 비해 59.2% 급증했다. 반면 소득증가율은 같은 기간에 24.7%에 그쳤다. 교육비는 9만2천원에서 13만1천원으로 42.1% 늘었고, 보육료 등 가사서비스 지출이 5년간 126%나 증가했다.

내수 침체의 타격을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크게 받을 수밖에 없는 취약계층의 고용도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다. 5월 고용동향에서 신규 취업자는 1년 전에 비해 18만1천 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3월(18만4천 명)과 4월(19만1천 명)에 이어 석 달 연속 20만 명 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실업자와 ‘그냥 쉬고 있는 사람’ 등 유휴인력은 261만6천 명에 이른다. 특히 고통은 청년층과 중고령·저소득층에 집중되고 있다. 공기업 민영화와 ‘작은 정부’ 지향에 따른 공공부문 인력감축으로 공공기관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4월에 도소매·음식숙박업 종사자 4만8천 명, 건설업 종사자 2만2천 명, 임시근로자 10만9천 명, 일용근로자 4만 명이 줄었다. 민주노동당 민경우 정책위원은 “지금은 이명박 정부의 성장만능주의가 파산을 맞고, 물가 폭등과 내수 침체, 양극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서민경제가 총체적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이라며 “유가와 물가 폭등 속에서 생활고에 직면한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긴급하고 광범위한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작은 정부’ 아래 저소득층 정책은 말장난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해 민간투자가 확대되고 있는 증거도 없다. 2005년 현재 국내 1천대 기업의 사내유보(순이익 가운데 배당금 등 외부로 나가는 부분을 제외한 금액)는 364조원으로, 법인세를 5% 인하하면 대기업은 8조∼9조원의 수혜를 보게 된다. 그러나 대기업이 성장해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더라도 고용은 늘지 않는다. 500인 이상 대기업 소속 노동자 수는 1993년 210만 명에서 2005년 131만 명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분기에 민간소비와 투자가 크게 위축되면서 내수는 1년 전에 비해 2.7%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07년 4분기(4.5%)에 비해 크게 둔화했다.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내수의 기여도는 -0.1%로, 내수가 오히려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감세, 규제 완화 그리고 ‘더 많은 시장경제’를 외쳤으나 서민생계는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다.

어차피 세금은 고소득층이 내는 것이므로 감세는 기득권 부유층 중심의 정책일 수밖에 없다. 저소득층의 생계를 지원하려면 오히려 세금을 더 걷어서 이를 재원으로 적극적인 재정지출 정책을 펴야 한다. 감세로 대표되는 ‘작은 정부’ 아래서 저소득층 정책은 말장난에 그칠 수밖에 없다.

“더 오른다” 기대감이 물가 상승 견인

결국 문제는 경제정책 기조다. 수출 대기업과 부유층, 성장에 편중된 정책에서 탈피해 저소득층 서민과 중소기업 그리고 고용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대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사실 이명박 경제팀이 성장주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국제유가와 곡물가격 폭등이라는 외부 쇼크가 겹치면서 성장만능주의는 파산을 맞고 있다. 물가 상승세가 가속화하고 이런 국면이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성장주의 경제정책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명박 경제팀의 정책은 급속히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수출을 통한 성장을 고집하던 환율정책을 대폭 수정하고, 공기업 민영화와 한반도 대운하 정책도 뒤로 미뤘다. 국민의 저항과 불만이 임계점에 도달하자 어쩔 수 없이 성난 민심이 수습될 때까지 추진을 당분간 보류한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 줄곧 제기돼왔지만 강만수 경제팀이 전혀 귀기울이지 않고 오만을 부리다가 사태가 더 악화됐다”고 말했다. 김기원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표방한 ‘실용’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실사구시가 아니라 ‘부패한 관료라도 능력만 있으면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출범 100일이 지나고 나서 보니 이명박 경제팀이 사실은 유능하지도 않고 무능한 사람들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사실 국내 물가 급등이 국제유가 폭등이라는 외부적 탓만은 아니다. 국제유가와 농산물 가격 변수를 제외하고 산출하는 근원인플레이션의 경우 2007년 2.3%에서 올 5월 3.9%로 치솟았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6월12일 “앞으로 물가는 상당 기간 매우 높아질 것”이라며 “물가가 많이 오른 건 원유 등의 수입가격이 크게 올랐고, 지난 몇 달간 환율이 상당히 오른 것도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특히 “최근 몇 달간 가격이 상승한 품목들 중 수입물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많이 받지 않은 품목들의 상승도 눈에 띈다”고 말했다. 경제주체들 사이에 ‘기대 인플레이션’이 확산되고 있다는 얘긴데, 수출 대기업 위주의 성장주의 정책을 고집하면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커지고 있고, 이것이 실제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임경묵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명박 경제팀이 그동안 높은 환율을 유지하는 정책을 통해 경상수지 개선을 시도했는데, 고유가로 인한 해외 충격을 환율이 전혀 흡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증폭시키면서 내수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유가 충격에 ‘환율 충격’까지 겹친 것이다.

삼성전자의 1분기 영업이익 2조1천억원 중 환율 요인만 3천억원에 이른다. 수출 대기업 위주의 고환율 정책이 대기업에 엄청난 특혜를 준 반면, 거꾸로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국내 물가 인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격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은 한 보고서에서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4.1% 가운데 0.8%는 국제유가 등 원자재값 상승에서 비롯된 것이고 0.5%는 환율 상승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유가 급등이라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쇼크가 큰 상황에서 수출을 통해 무리하게 성장률을 끌어올리려다 보니 물가 상승만 부추기는 부작용을 초래한 셈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달러당 947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한때 1050원대까지 육박했다. 김경수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은 “정부가 수출 활성화를 위해 높은 환율을 지지한 건 글로벌 차원의 물가 급등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물가를 더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며 “수출의 환율 효과가 예전처럼 크지 않다는 사실을 정부가 간과한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수입물가 상승은 공산품 가공원료와 사료 등의 가격 상승을 불러오고 이는 상하수도·이미용·외식 등 서비스 가격에 영향을 줘 전반적인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 대다수 경제주체들이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를 볼 때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원가 상승률보다 더 높게 미리 제품 가격을 높이고 있는 양상이다. 송태정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의 추경 편성 논란 역시 ‘돈 풀어 내수를 부양하려는 것을 보니 인플레이션이 계속되겠구나’ 하는 기대를 사람들에게 심어줬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원가 상승 부담이 없는 기업들조차 제품 가격을 올려 물가 급등이 현실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억제하지 못해 추가적인 물가 상승을 초래했고, 오히려 기대심리를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공기업 팔아 보조금, 돈 미끼로 파업 차단

성장률에 집착하면서 고환율과 수출 대기업 중심의 정책을 편 탓에 물가 관리 실패에 봉착한 이명박 경제팀은 이제 ‘때려잡기식’ 물가관리에 나서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랴부랴 가격담합 단속에 나서는 등 억지로 가격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무려 10조5천원(일반회계예산의 약 8%)의 현금을 푸는 ‘유류세 환급’ 정책까지 성급하게 제시하는 등 뒤늦게 민심 수습에 나서고 있다. 이 방안에 따르면, 저소득층 근로자 980명, 영세자영업자 400만명 등 1380만명 정도가 1년간 한달 5천원∼2만원 정도 혜택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얇게 펴서 광범위한 계층에게 ‘푼돈’을 나눠주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공기업을 팔아 벌어들인 돈으로 국민들한테 유류세 보조금을 준다는 지적도 있다. ‘공기업 민영화에 따른 공공서비스 요금 폭등은 감수해라. 대신 보조금을 주겠다’는 식의 ‘돈’을 앞세운 기만적인 방안이란 얘기다. 한 회계사는 “취업자가 아닌 사람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고, 소득세 신고를 하지 않는 일용직·노점상도 지원받기 어렵게 된다”며 “오히려 이 돈으로 최저임금을 더 높이는 게 효과적일 것 같다”고 말했다.

한발 더 나아가 정부는 ‘돈’을 무기로 생계형 파업을 차단하는 구상까지 하고 있다. 화물연대 총파업과 관련해 집단 운송 거부에 동참하는 차량에는 연간 최대 1490만원에 이르는 유가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고, 운송 거부에 참여하지 않는 차량에는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주겠다는 것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