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무혐의 결론이 이보라씨 귀국 뒤 급반전… “검찰은 국정원 통한 참여정부 개입으로 결론 내리고 싶어해”
▣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5월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 재판정. 지난해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BBK 연루 의혹을 제기했다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정봉주 통합민주당 의원에 대한 결심공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재판 막바지에 검찰(서울지검 특수1부)이 갑자기 재판부에 “판결 선고를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검찰은 “현재 진행 중인 김경준씨의 ‘기획입국설’ 수사에서 정 의원의 공소 사실을 명확히 해줄 증거를 추가로 확보해 제출하겠다”고 이유를 말했다. 기획입국설 수사가 5월 말까지 종결되는 만큼, 수사 종결 때까지 결심공판을 연기해달라는 취지였다. 피고인석에 서 있던 정봉주 의원은 물론, 방청석에 앉아 있던 정동영 전 대선 후보 등 통합민주당 쪽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확 가시는 순간이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 소환 추진
그러나 재판부는 “증거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검찰은 “기일을 추가로 지정해주시면 제출하겠다”고 답했다. 재판부는 “지금까지 전혀 거론되지 않은 부분이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검찰의 요청을 잘랐다. 결국 검찰은 이날 정 의원에게 “정치 영역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을 넘어 상대 후보의 낙선을 목적으로 악의적인 허위 사실을 공표했다”며 징역 2년형을 구형했다.
지난 대선을 뜨겁게 달궜던 이른바 ‘기획입국설’ 수사의 한 자락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검찰은 과연 정봉주 의원과 기획입국 사이의 무슨 연관성을 확보한 것일까.
통합민주당에서는 검찰이 정봉주 의원의 기획입국 개입 혐의를 추가로 기소하려는 것을 두고 정치권을 대상으로 한 ‘신공안정국’의 신호탄이 아닐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김경준씨의 입국 뒤 김씨에 대한 조사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문무일)는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BBK 관련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른바 ‘기획입국’의 실체 규명이다. 기획입국설의 핵심은 김경준씨의 귀국에 참여정부 또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통합신당·현 통합민주당)이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취재 결과, 현재까지 특수1부는 통합민주당 의원·당직자와 국정원 전·현직 고위 간부부터 친박근혜계 한나라당 전·현직 의원과 당직자까지 모두 30명이 넘는 정치권 및 전 정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계속해왔다. 또한 검찰은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 당시 활동한 검증위원부터 기자까지 60여 명의 통화 내역을 조회했다. 검찰이 현재까지 기획입국의 피의자로 확정한 이들은 김경준씨와 부인 이보라씨, 그리고 누나 에리카 김 변호사 등 3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출두를 요청한 민주당 의원은 박영선·김현미·서혜석·김종률 의원 등 모두 4명이다. 또한 전·현직 국정원 간부 2명을 소환해 조사했고, 수사를 마무리 짓기 전 김만복 전 국정원장을 소환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의 핵심 관계자는 “검찰에서는 기획입국에 정동영 전 대통령 후보쪽만 아니라 국정원 개입 사실을 통해 참여정부까지 개입되어 있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검찰은 애초 기획입국과 관련해서는 무혐의에 가까운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경준씨의 부인 이보라씨가 5월3일 귀국(709호 줌인 ‘검찰, 이보라 극비 송환 추진’ 참조)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이씨는 김씨 가족과 한국 쪽 통화 내역 일체를 가지고 들어왔다. 검찰은 이씨가 가져온 통화 내역에서 정봉주 의원과 이보라씨가 통화한 증거를 확보했다.
또한 한나라당쪽에서 5월 초에 검찰에 기획입국설을 비롯한 대선 관련 고소·고발 사안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는 설도 정치권에 파다하게 퍼져 있다.
한나라당 ‘수사의뢰서’ 입수·분석
그렇다면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기획입국의 정체는 무엇일까. 은 한나라당이 지난 대선 직전인 12월14일 검찰에 제출한 ‘기획입국 수사의뢰서’를 입수했다. 수사의뢰서를 보면, 기획입국설의 뼈대는 김경준씨가 당시 통합신당 쪽 인사들과 사전에 짜고 귀국해 이명박 후보의 낙선을 위해 허위 사실을 폭로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수사의뢰서에서 기획입국 당사자로 정동영 전 후보의 핵심 측근이던 박영선 의원,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그 핵심 측근,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에서 근무했던 정동영 전 후보의 학교 선배를 지목하고 있다.
기획입국설에 핵심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김경준씨와 로스앤젤레스 연방구치소에 1년가량 함께 수감돼 있던 신아무개씨다. 한나라당은 수사의뢰서에서 신씨를 가장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웠다. 신씨는 지난 3월14일에 열린 김경준씨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등장하면서 언론에 공개됐다. 그는 이 자리에서 메가톤급 증언들을 쏟아냈다. 신씨는 “2007년 9월13일께 로스앤젤레스 연방구치소에 함께 있던 김경준씨가 ‘한국에 먼저 송환되면 이명박 후보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허위 사실들을 폭로해달라’고 부탁했다”며 “허위 사실을 폭로해주면 (신씨의) 감형과 가석방을 도와주고, 로스앤젤레스에 300만달러(약 30억원) 정도의 술집을 차려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관심이 가는 부분은 신씨가 김경준씨로부터 폭로를 부탁받았다는 허위 사실들의 내용이다. 이명박 후보가 미국에서 측근인 김백준 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한국계 미국인인 미 연방검사를 통해 김경준씨에게 ‘빅딜’을 제안했다는 내용과 로스앤젤레스에서 김경준씨가 가지고 있는 이른바 ‘한글 이면계약서’(이명박 후보가 BBK의 실제 소유자라는 사실이 적힌 이면계약서)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는 내용 두 가지였다. 신씨는 “김경준씨가 ‘한국으로 송환되면 정치권에서 특별면회를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에게 이런 사실들을 말해주면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김경준씨가 누나 에리카 김 변호사를 통해 한국 정부의 고위직 및 국가정보원 등과 접촉이 끝나서, 한국에 들어가면 호텔에서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고 결국 사면받게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덧붙였다.
신씨는 김씨의 송환(2007년 11월15일) 한 달 전인 10월25일에 한국으로 송환됐다. 송환된 신씨와 신씨 가족을 두 명의 변호사와 한 명의 통합신당 당직자가 접촉한 것으로 한나라당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검찰은 현재까지 김경준씨가 로스앤젤레스 연방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당시 면담한 사람들의 기록과 김씨의 부인 이보라씨 및 누나 에리카 김 변호사와 한국 쪽 인사들 간에 이뤄진 통화 내역, 그리고 주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에 근무한 국가정보원 인사들의 명단 등을 주요 증거로 확보한 상태다.
박근혜 캠프 인사도 김씨와 접촉
검찰은 현재 박영선 의원과 김경준씨의 미국 재판 당시 변론을 맡았던 심원섭 변호사, 그리고 김만복 전 국정원장을 중심에 두고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5월 중순부터는 박영선 의원실의 보좌관들에게 참고인 자격으로 출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심원섭 변호사에게도 연락해 “기획입국의 당사자로 조사할 것이 있으니, 귀국해서 조사를 받으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선 의원은 이런 검찰의 수사 방향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진행되고 있는 마녀사냥식 수사”라며 “반드시 끝까지 진실을 밝히겠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통합민주당 핵심 관계자도 “아무리 조사해봐도 없는 실체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며 “검찰이 만약 무리하게 기소를 한다면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검찰도 에리카 김 변호사나 이보라씨가 정치권 인사와 통화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또 정치권 인사가 이들로부터 어떤 자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이들에게 적용할 혐의가 마땅찮다는 점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전후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캠프의 인사들이 김경준씨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된 것도 검찰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김경준씨의 구치소 면회 기록에서는 지난 4월9일 총선에서 경기도 지역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낙선한 유아무개 후보가 면회를 온 사실이 확인됐다. 변호사인 유씨는 김경준씨의 변호를 맡고 있던 심원섭 변호사의 협조를 얻어 김경준씨와 옥중 면담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유씨의 로스앤젤레스 방문에는 한나라당의 홍아무개 전 의원도 동행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보라씨가 가져온 통화 내역에서는 이혜훈 한나라당 의원의 것도 상당수 나왔다. 이혜훈 의원은 “전화를 한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걸려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런 사정 탓인지 검찰 핵심 관계자는 “기획입국 수사 결과가 발표돼도 정치권에서 주목할 수사 내용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국가정보원의 개입 여부를 밝히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과는 달리,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김경준씨 가족을 접촉했다는 사실만 확인되더라도 법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보라씨의 귀국 직후인 5월9일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측근인 윤아무개씨와 국정원 전 직원 정아무개씨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압수수색 결과를 바탕으로 윤씨를 소환해 한 차례 조사를 벌였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이 사건을 공소시효(6월18일) 전까지 기소하기 위해 5월30일까지 수사를 매듭지을 예정이다(선거법의 공소시효는 6개월이기 때문에 지난해 12월19일 끝난 대선 관련 고소·고발건은 올해 6월18일 시효가 만료된다).
18대 국회 개원 협상과 연계해 취하 가능성
정치권에서는 한나라당이 6월 개원될 제18대 국회 개원협상의 지렛대로 대선 관련 고소·고발건을 일괄적으로 풀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안상수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김효석 통합민주당 원내대표가 5월21일 “대선 관련 고소·고발건은 17대 국회에서 털고 가자”는 취지의 통화를 나눈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통과 문제와 고소·고발 취하가 연계될 것이란 말이 나오면서 협상은 결렬됐다. 이와 관련해 홍준표 신임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과의 인터뷰에서 “통합민주당의 태도를 보고 해법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제18대 국회 개원협상과 이 문제를 연계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정치권의 움직임과는 무관하게 기획입국설 수사가 향후 정국을 뒤흔들 고폭탄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당 내부(박근혜계)부터 야당(통합민주당), 그리고 정보기관(국정원)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그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기획입국설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뜻이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차장검사나 특수1부 부장검사 등은 기획입국설 수사 상황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간부들이 보안에 그만큼 신경쓴다는 것은 ‘뭔가’가 있다는 방증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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