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코미디에는 썩 괜찮아유~

등록 2008-05-02 00:00 수정 2020-05-03 04:25

가장 순수하면서도 새롭게 발견되는 웃음의 무기이자 고전적인 기술

▣ 이명석 자유기고가 manamana@korea.com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대한민국 쇼무대의 왕좌 ‘물랑루즈’ 극장. 원맨쇼의 황제로 당대를 주름잡던 남보원이 무대를 내려오더니,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그날 데뷔 무대를 가진 백남봉을 불렀다. “야, 너 이리 와봐. 사투리했어?” “예.” “그럼 얘길 해야지. ‘쪼다’ 됐잖아.” 남보원이 그날의 레퍼토리로 “태산이 높으믄 얼마나 높갔어?” 하며 팔도 사투리 시조를 불러제꼈건만, 이미 백남봉이 ‘김치 팔도 사투리’로 좌중을 휘어잡은 뒤였던 것이다.

흉내당하는 사람에게 모욕감 일으키기도

사투리만큼 고전적인 코미디의 기술도 없다. 여기저기 장터를 떠돌아다니던 장돌뱅이는 재 너머 김첨지의 말투를 흉내내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요즘 개인기 좀 하는 개그맨들 열 명을 데리고 와도 끄떡없을 남보원과 백남봉의 온갖 재주 중에서도 팔도 사투리는 으뜸의 유흥거리였다. 그들은 단순한 억양의 흉내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특산물과도 같은 다채로운 어휘들로 서민들의 삶을 풍자해댔다. 그러나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목포에서 전라도 사투리로 야구 중계를 흉내내다 조폭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등 사투리 코미디는 흉내당하는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 요소이기도 했다.

코미디의 중심이 TV로 옮겨간 뒤 사투리 코미디의 첫 대박은 최양락의 ‘괜찮아유~’라고 여겨진다. 충청도의 시골 마을 사람들이 특유의 느린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데, 온갖 시비와 걱정거리가 생겨도 “괜찮아유~” 하면서 속 타는 내면과는 다르게 느긋한 척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선사했다. 억센 전라도와 경상도의 다툼 속에서 유순한 척 당하고만 사는 충청도 사람들에 대한 자조적 의미도 담겨 있었던 듯하다. 이 장치는 현재 의 ‘웃지마 사우나’에 그대로 이어진다.

군부정권하의 코미디는 이래저래 눈치볼 것도 많아, 사투리처럼 지역적 특색을 강조하는 일 역시 조심스러웠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투리 해금이 본격화되는데, 공교롭게도 진원지는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애무부 장관은 애무나 하고, 이 지역은 강간지로 개발하고….” 서울대 출신의 초엘리트 대통령이라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사투리의 어눌함은 딱딱한 권위를 허무는 요소가 될 수 있었는데, 김 대통령의 속마음은 어땠을지?

의 ‘생활 사투리’ 코너는 본격적인 사투리 개그 시대를 열었다. 마치 외국어와 같은 전라도어와 경상도어의 특이한 표현들은 능청스러운 연기와 어울려 웃음 폭탄을 만들어냈다. 단순한 말투만이 아니라, ‘아따 거시기해’ ‘가시나 쥑이네’처럼 지방 특유의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들이 매력적이었다. 남북 화해 무드와 조선족과의 빈번한 만남은 북한 사투리, 옌볜 사투리를 개그 코너의 단골 메뉴로 만들기도 했다. 영화에서도 사투리 마케팅이 본격화돼, 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생활 사투리’의 영화판이 되었고, 은 따라 하기 힘든 강원도 사투리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표준말 ‘대화가 필요해’ 상상할 수 있어?

연이은 조폭 코미디의 유행은 ‘전라도 사투리=깡패’라는 관습적인 사고를 확대해왔다. 사투리 코미디는 종래의 지역에 대한 편견을 고착화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투리만큼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성격을 부각시키며 캐릭터화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경상도 사투리를 뺀 ‘대화가 필요해’를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코너에서 김대희의 사투리는 무뚝뚝한 경상도 가장의 성격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고, 신봉선의 맛깔스러운 어휘는 그 지역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풍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사투리는 가장 순수하면서도 새롭게 발견되는 웃음의 무기다. 버라이어티쇼에 등장한 신인 연예인은 자신의 도회적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투리 몇 마디로 웃음을 불러올 수 있다. 시청자도 과거의 지역적 편견이나 자격지심은 많이 떨쳐낸 듯하다. 대한민국이 ‘서울말 공화국’이 되어가는 이때, 사라져가는 각지 어휘들이 코미디를 통해서라도 살아남길 바란다.

[한겨레21 관련기사]

▶뭐라카노, 가심패기 말 서울말로 우야노
▶코미디에는 썩 괜찮아유~
▶권력의 표준어 경상도 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