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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도 결국 문제는 경제

등록 2008-04-11 00:00 수정 2020-05-03 04:25

‘햇볕정책’ 뒤 남북의 날씨는 싸늘… 경협 지렛대 삼아 당국 간 대화 재개해야 “안보위기 속에 경제 살리기는 공염불”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반도 상공에 ‘이상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남한과 북한이 말의 ‘한랭전선’을 만들어내는 사이, 북한과 미국은 행동의 ‘온난전선’으로 다가서고 있다. 찬 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만나면 한바탕 빗줄기를 뿌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두 기단의 세력이 엇비슷해 정체전선이 형성되면 오랜 장맛비로 이어질 수도 있다. 4월18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으로선 하루하루가 곤혹스러운 시험 무대일 터다.

예상된 이명박 정부의 ‘움직임’

“새 정부는 오히려 더 남북이 진정한 대화를 하자는 관점에서 대남전략이나 대북전략과 같은 전략적 차원에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남북이 가슴을 열고 대화하자는 것이다. 남과 북이 다시 대화를 통해 한 단계 차원 높은 협력을 하는 게 좋겠다.”

이 대통령은 4월3일 청와대에서 군 중장 진급과 보직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선제타격’ 논란을 부른 김태영 합참의장의 ‘북한 핵무기 사용 이전 타격’ 발언에 대해서도 “국회의원이 물으니까 당연한 대답을 한 것이고, 그 정도 선에서 일반적인 대답”이라고 덧붙였다. 북의 잇단 독설에도 “로우 키”(대응 자제)를 강조하던 기존 태도와는 조금 다른 ‘적극성’을 보인 게다. 대통령이 직접 ‘상황관리’에 나서려는 걸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침묵을 지키던 북한이 최근 보인 일련의 ‘움직임’은 기실 예견된 일이었다. 새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관찰하던 북한으로선, 최고위층에서 자신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발언이 잇따르면서 ‘반응’을 보일 때가 됐다고 느꼈을 게다.

이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북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적을 할 것”이라며 “인권 문제도 불가피한 영역”이라고 공언해왔다. ‘햇볕정책에 대한 반성’을 거론했던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북핵 문제가 타결되지 않으면 개성공단 확대는 어렵다”며, 아예 ‘상호주의’를 들고 나왔다. 여기에 김태영 합참의장이 지난 3월2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적이 핵을 가지고 있을 만한 장소를 빨리 확인해서, 적이 그것을 사용하기 전에 타격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불씨를 키웠다.

사전 준비라도 했던 걸까? 북한은 조금씩 대응 수위를 높여가며 위기감을 키우려 애썼다. 개성 남북경협사무소 남쪽 요원 철수(3월27일)-미사일 발사 시험(3월28일)-군부의 남북 대화 중단 선언(3월29일)이 꼬리를 물었다. 이어 3월30일엔 이 ‘잿더미 발언’을 내놨고, 4월1일엔 이 이 대통령에게 ‘역도’ ‘매국 역적’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북 군부는 4월3일에도 전날 국방부가 김 의장의 발언이 “곡해된 것”이라고 밝힌 것을 “한갓 변명”이라고 일축하며, ‘군사적 대응조처’를 거론한 전통문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쯤되면 말로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다.

현안에 위계서열, 군사안보가 먼저

우려스러운 건 북이 ‘한랭전선’의 장기화에 대비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는 4월4일치에서 “북한이 남한에 식량과 비료를 지원해달라고 먼저 요청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하고, 중국에 대규모 식량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남북 대화의 ‘시급성’을 줄여보겠다는 포석으로 읽힌다.

북쪽의 ‘불편한 심기’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압축한 ‘비핵개방 3000’ 구상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극명히 드러난다. 은 4월1일치에서 ‘비핵개방 3000’ 구상에 대해 “극히 황당무계하고 주제 넘은 넋두리로서 민족의 이익을 외세에 팔아먹고 대결과 전쟁을 추구하며 남북관계를 파국에로 몰아넣는 반통일선언”이라고 야멸차게 몰아붙였다.

서보혁 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은 ‘비핵개방 3000’의 특징을 이렇게 분석했다. “먼저 논리상 조건부 또는 선후관계다. 북한이 먼저 뭔가를 하면, 남한도 북에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게다. 둘째, 북한을 시혜 또는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남북 간 현안에도 위계서열을 매기고 있는 모습이다. 군사안보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경제·사회·문화 영역의 문제 해결에 다가설 수 있다는 기본 원칙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북으로선 기존 남북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모욕’으로 느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교착상태에 빠졌던 북핵 ‘불능화’ 협상이 묘수풀이를 통한 돌파구 마련에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다. 북-미는 핵심 쟁점이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과 북한-시리아 핵협력 의혹을, 비공개를 전제로 한 ‘비밀의사록’에 담아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는 4월4일 인도네시아를 방문 중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6자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의 말을 따 “빠른 시일 안에 북한의 핵 신고가 마무리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과 미국이 만들어내는 ‘온난전선’은 남과 북 사이의 찬 기운을 밀어낼 수 있을까? 부시 행정부는 늦어도 8월 말까지는 핵시설 신고를 끝내고, 불능화 단계를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자세다. 이 시기를 지나면 사실상 남은 임기 안에 북핵 폐기 협상을 시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임 클린턴 행정부가 동결시켰던 북핵은 부시 행정부 들어 ‘무기’로 바뀌었고, 북한은 ‘핵 보유국’의 지위를 꿰찼다. 남은 300여 일 임기 안에 불능화 단계를 마치지 못하면,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그야말로 총체적 실패로 기록될 게 뻔하다. 부시 행정부로선 시간이 많지 않은 게다.

‘선핵폐기론’이 ‘병행해결론’ 흔들어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 6자회담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눈여겨봐야 한다. 어차피 북한의 핵 폐기에 대한 ‘상응 조치’라는 게 북-미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그리고 경제협력이다. 평화체제 구축과 경제협력 분야에선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중요하다. 한반도 군사구도가 주한미군에서 한국군으로 많이 이양된 상태고,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에서도 남북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평화체제는 물론 경제협력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지나친 ‘선 핵폐기론’ 강조가 자칫 6자회담의 성과인 ‘병행해결론’ 구도를 흔들어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남북의 한랭전선이 지나치게 팽창한다면, 고빗길로 들어선 북핵 협상이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정부의 한 외교·안보 당국자는 “다가오는 정상회담을 계기로 부시 행정부가 북핵 불능화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남북관계도 보조를 맞춰달라고 주문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 때문에 정상회담 뒤 남한 쪽에서 되레 북한에 대화의 손을 내밀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명박 정부로선 당혹스런 상황일 게다.

정치와 당국 간 남북관계는 닫혀 있지만, 경제와 민간 쪽은 여전히 열린 채다. 경협을 지렛대 삼아 당국 간 대화를 재개해야 하는 게 급선무다. 김연철 교수는 “결국 문제는 경제”라고 강조한다. “안보위기 속에 경제 살리기는 그야말로 공염불”이란 얘기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실용’의 실체는 조만간 확인이 가능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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