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국면에서 벌어지는 잇단 집단행동들이 가능성 보여줘, 무엇보다 내부에서 수요 크게 일어야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오직 이 한마디 이후 지독한 신화와 금기가 돼버린 ‘무노조 삼성’도 이제 바뀌고 있는 걸까? 사실 ‘무노조 삼성’을 둘러싼 안팎의 사회적·제도적 환경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삼성 특검 국면 △삼역모 등 삼성 노동자들의 잇단 집단행동 △2010년 개별사업장 복수노조 허용 △산별노조 흐름 등이 대표적이다.
하이비트, 압력에 굴복한 첫 성과
이와 관련해 흥미롭게도 지난해 8월 말, ‘울산 삼성SDI 인사팀 ㅅ차장’이라고 실명을 밝힌 사람이 삼역모 카페 게시판에 “삼성의 노조 설립 시도 탄압을 알고 있다. 폭로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글을 올린 적도 있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삼역모 회원이 아니었던 ㅅ차장이 ‘회사가 나를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식으로 자신이 맡았던 노무관리 업무를 역이용한 것”이라며 “그가 얼마 안 있어 이 글을 지워버렸지만 삼성 사람들이 뭔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경기본부 미조직특위 관계자는 “정규직 삼성 사원들도 내부적으로 동요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삼역모 모임이 만들어졌듯, 조직관리나 충성도 면에서 삼성 기업문화가 예전 같지 않다”며 “수원 지역 등에서 삼성 사업장 노조 설립 시도가 수차례 있었지만 초기부터 덮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삼성 특검 등을 거치면서 노조 조직화에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어쩌면 노동 탄압도 삼성이 지금 시련을 맞고 있는 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경기본부 이종란 노무사는 “지난 5년간 수원 지역의 여러 삼성 노동자들을 상담했는데, 이제 우리도 노조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기 많다. 노조에 대한 강좌를 해달라는 요구도 있고, 견고한 삼성의 기업문화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삼성에서도 고용안정이 흔들리면서 노동자들이 이제는 시키는 대로만 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이 노무사는 “‘우리가 뭉쳐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 뿐, 아, 큰소리쳐도 되는구나’ 하는 게 요즘 분위기다. 지금 아니면 언제 큰소리쳐보겠는가라는 말도 들린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부터 삼성을 상대로 ‘원직 복직’ 싸움을 벌여온 삼성SDI 부산공장 협력업체 하이비트 여성 노동자 17명의 사례는 특히 눈길을 끈다. 업체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지난 4월1일 삼성SDI 1차 협력업체로의 재고용을 보장받았다. 넓게 의미를 달자면, 삼성이 압력에 굴복한 첫 성과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싸움 과정에서 산별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그래서 삼성 쪽으로서도 쉽게 탄압하거나 건드릴 수 없게 됐다.
또 삼성이 노조 결성을 무산시키는 데 이용해왔던 안전판인 복수노조 금지 조항도 머지 않아 사라진다. 삼성은 에스원·호텔신라 등에 조합원 2∼3명의 유령노조를 미리 만들어 실질적인 노조 결성을 방해해 왔다. 그러나 2010년 1월부터는 복수노조가 허용된다. 물론 동일 사업장의 여러 복수노조 중 최대 노조에만 배타적 교섭권을 부여할 경우 삼성 쪽이 어용노조를 의도적으로 육성(?)해 작은 민주노조를 깨는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지만, 노조 결성 자체가 막히는 지금과는 다른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다.
민주노총은 오래전부터 조직 강화 차원에서 ‘삼성 재벌 사업장 노조 조직화’를 주요 전략사업으로 설정하고, 산별연맹별·지역별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1977년 제일제당 공장에 위장취업자를 보내 조직화를 시도했듯이 지금도 비공식적으로 조직가들이 취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민주노총 엄미경 조직국장은 “민주노총 안에서 삼성 조직화 기획단을 구성해 회의를 거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각 지역과 금속노조에서 삼성 노조를 핵심사업으로 배치하지는 못하고 있다. 문제는 ‘승리하는 싸움’이 없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엄 국장은 또 “삼성 무노조 백서를 보면 수많은 노조 설립 시도가 나와 있고, 삼성 노동자들의 분노와 요구가 점차 늘고 있지만, 딱히 조직이든 투쟁력이든 위력 있는 사례가 없었다”고 말했다. 작더라도 첫 단추를 끼우는 ‘성공 이벤트’가 있어야 ‘아, 삼성에서도 노조가 가능하구나’라는 불씨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비자금에서 노조로 옮겨붙을 수도
물론 ‘무노조 삼성’이 깨지려면 민주노총의 조직화 사업과 별개로 삼성 노동자들 내부에서 자발적인 ‘노조 수요’가 크게 일어나야 한다. 이와 관련해 삼성 안에서도 구조조정 바람이 불고 고용불안이 가시화하면 노조 수요가 폭발하게 될 공산이 크다. 특검 국면에서 삼성의 조직문화도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특검 이후 이른바 ‘삼성 문제’의 불씨가 ‘비자금’에서 ‘노조’로 옮겨붙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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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역모의 의의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삼역모’는 그동안 삼성 안에서 시도됐다가 와해되고 말았던 몇 차례의 노조 설립 시도들과 어떤 점이 다를까?
첫째, 대리·과장급 등 관리자 중심의 모임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대기발령, 구조조정, 명예퇴직 등 당장 닥친 고용불안이 모임 결성의 배경이었다는 점은 기존 사례들과 흡사하다.
둘째, 시작할 때부터 삼역모 인터넷 카페를 오픈해 공개 활동에 나섰다는 점이다. 그동안에는 대부분 비밀리에 노조 설립 시도가 이뤄지다가 나중에 발각돼 회유·협박·매수·탄압 속에서 와해되곤 했다. 반면 삼역모는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삼성 쪽의 대응도 약간 달랐다. 즉, 회사 쪽은 대기발령 상태인 삼역모 가담자들에게 업무를 주면서 달래고 사태를 진화하려 했다. 비록 낯선 업무여서 ‘회사를 떠나라’는 압박의 성격은 여전했지만, 어쨌든 과거에 견줘 대응 수위가 다소 약화된 셈이다.
셋째, 그동안 삼성 안에서 일어난 노조 설립 시도를 깨는 데 동원됐던 회사 쪽 노무관리 담당자 몇몇이 삼역모 회원에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들이 알고 있는 ‘삼성 노무관리 비밀’ 때문에 삼성 쪽은 고강도 대응을 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삼성이 잘못된 노무관리 역사에 스스로 발목 잡힌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관리의 삼성’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태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성의 잘못된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으로 등장했던 이 모임이 과연 이름에 걸맞은 활동을 했는지, 진정으로 노조를 지향했는지에 대해선 부정적인 평가도 나오고 있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이들이 노조 설립을 탄압했던 자신의 과오를 양심선언 하기보다는 자신의 과거 행적을 오히려 무기로 활용하지 않았는가 싶다”며 “구조조정과 관련해 신분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이익집단 성격이 강한 것으로 비쳐졌다”고 말했다.
사실 삼역모 회원 일부가 개별적으로 금속노조 경기지부 조합원으로 가입했으나, 이는 곧 삼역모의 내분으로 이어졌다. 지난 2000년 삼성SDI 해고자로, 삼역모의 시작부터 곁에서 지켜봐온 김갑수씨는 “금속노조 가입을 둘러싸고 ‘그러면 삼역모가 노조에 이용당할 수 있다’거나 ‘하청업체 노동자나 비정규직과 우리가 같이 싸울 순 없다’는 의견도 꽤 있었다. 민주노총과의 연대에 일정한 선을 긋기도 했다”고 말했다. 모임 수준으로는 삼성과 붙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노조를 찾긴 했으나, 결국 이때부터 모임 내부에 분란이 생겼고 일부는 금전적 회유에 넘어간 셈이다. 금속노조 경기지부 관계자는 “하청업체 조합원 등 일부가 지금도 조합원으로 남아 있다. 과장급 등 직급 있는 사람들은 초기부터 행동이 달랐고, 어느 정도 위로금을 더 받자 우리와 연락을 끊어버린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김갑수씨는 “간부들이 갖는 보수성 등 한계를 갖고 시작한 조직임에는 분명하지만 1년 넘게 회사와 대립각을 세운, 삼성 안에서 드문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며 “노조 결성 시도와 좌절이 반복되지만 결국 내부 구성원들이 해내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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