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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60주년] 피해 인정 못 받고 죽어야 하나

등록 2008-04-04 00:00 수정 2020-05-03 04:25

습격·고문당해 한평생 앓고살다 행정소송 나선 ‘불인정 4·3 후유장애인’들

▣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한겨레 지역팀 hojoon@hani.co.kr

“처음에는 경찰관이 ‘산에 쌀을 줬느냐’고 하는 말에 ‘안 했다’고 했어. 그러더니 나를 패기 시작하는 거라. 패다가 버치니까(힘드니까), 전깃줄을 양쪽 엄지손가락에 감는 거라. 전깃줄 감아서 옛날 수화기처럼 돌리는 거. 그걸로 돌리면 정신이 아뜩 없어져불주게. 정신을 잃어버리면, 한 걸로 인정해서 자기네끼리 박박 써서 들이쳐불기 때문에 ‘하고라’(했다), ‘말고라’(안 했다)도 못하고…. 그래서 수백 명이 하루에 군사재판을 받아서 인천형무소로 가게 됐지.”

걸을때마다 쑤시는 총상 부위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양일화(79)씨의 인생은 분단의 한국 현대사를 응축한 소설이나 다름없다. 4·3 사건으로 온 마을이 불타고 소개되면서 시내 친척집에 기거하게 된 그는 1948년 12월께 우익단체에 붙잡혀 산간마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산사람’으로 지목돼 갖은 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넘겨진다. 그 뒤 인천형무소 수감, 한국전쟁 발발, 인민군 생활, 지리산 도피, 거제도 수용소 생활, 한국군 육군 입대라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당시 우익 청년들과 경찰한테서 받은 고문으로 허리를 크게 다쳐 지금은 잘 움직이지도 못한다.

양씨는 당시의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며 2004년 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이하 4·3위원회)에 후유장애인 신청을 했으나 인정되지 않았고, 지난해 10월 열린 재심의에서도 마찬가지 결과를 받았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지 60년. ‘고통의 섬’에서 ‘화해’와 ‘상생’을 넘어 ‘평화의 섬’으로 가자는 구호가 메아리친다. 그러나 60년 세월의 언저리에서 맴돌며, 이제는 잊혀질 법도 한 고통을 더욱 또렷이 기억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불인정 4·3 후유장애인’들이다.

3월22일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에서 만난 제주4·3희생자후유장애인협회장 고태명(78)씨. 그가 자신의 왼쪽 종아리를 누를 때마다 피부가 움푹움푹 들어갔다. 한 달에 한 차례 진통소염제와 파스를 타고 물리치료를 받으러 제주 시내 병원으로 나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조금만 걸어도 총에 맞은 부위가 부으며 쑤신다. 그는 1948년 7월30일 경찰이 쏜 총에 맞았다. 총알은 다행히 뼈를 건드리지 않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관통했다. 경찰서로 끌려간 그는 몽둥이로 허리와 팔, 다리를 맞는 등 갖은 고문에 시달렸다. 전기고문으로 몇 차례나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다. 이후에도 하루하루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던 고씨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해 8월3일 ‘무적해병’의 신화가 된 해병대 3기로 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입대하지 않았더라면 예비검속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고씨는 정부가 인정한 후유장애인이 아니다. 지난해 4·3위원회에 재심의를 신청할 때 ‘좌측 하퇴부 총상 반흔, 요배부 다발성 찰과상’이라는 병력과 “4·3 사건 후유증으로 인한 병증으로 지속적인 약물치료 및 물리치료를 요하며 경과 관찰 요함”이라는 ‘향후 치료 의견’이 첨부된 제주대병원의 진단서까지 끊어 냈으나, 불인정됐다.

또 다른 불인정자 고순호(81·여·제주시 삼도1동)씨. 4·3 당시 무장대의 습격으로 척추와 귀, 옆구리 등을 죽창에 찔리고 전신을 구타당한 고씨는 지난해 12월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상처를 드러냈다. 그의 척추뼈는 돌출돼 있었다. 죽창에 찔린 복부 상처 때문에 평생 제대로 눕지 못했던 고통도 호소했다. 그러나 고씨는 “진단된 병명이 자연발생적 질환으로 판단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인정됐다.

MRI·CT 등 비용 때문에 정밀진단 포기

2004년 신고한 184명 가운데 4·3위원회가 후유장애자로 인정한 사람은 155명에 그친다. 나머지 29명은 불인정 결정됐다. 이들 중 19명이 재심의를 신청했으나 지난해 10월 모두 또다시 불인정됐다. 지난해 재심의를 신청하는 과정에서는 짧은 진단 기간과 재심의에 드는 비용도 문제가 됐다. 구타와 고문 피해처럼 외상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 그 후유증을 60년이 지난 시점에서 육안 검사나 엑스레이 검사만으로는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4·3위원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후유장애와 ‘4·3과의 연관성’을 밝혀내려면 정밀검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4·3사업소가 후유장애 재심의 신청에 드는 진단 비용을 보조하려고 편성한 2500만원은 비급여 항목에는 지원되지 않았다. 핵자기공명장치(MRI)나 컴퓨터단층촬영(CT) 비용을 부담하기 힘든 재심의 신청자들 가운데 정밀진단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개인병원도 아닌 국립대병원에서 전문의의 진단서를 받고 신청했는데도 후유장애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것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돈을 받기 위해 후유장애인으로 인정해달라는 게 아니다. 4·3 후유장애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4·3 피해자가 아니라는 얘기나 다름없지 않느냐.” 고태명씨의 말에는 60년 세월의 분노와 한이 서려 있다. 후유장애를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하면 4·3 희생자로 선정되는 것도 영영 불가능하다. 두번 죽임을 당하는 셈이다.

4명은 끝내 불인정 상태로 눈 감아

이제 이들이 유일하게 기대하는 것은 행정소송이다. 지난해 재심의에서 불인정된 19명 가운데 고태명씨 등 13명은 지난해 12월10일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1월부터 재판이 진행 중이다. 팔십 줄에 들어선 이들의 외침은 소박하다. “정부에 바라는 다른 건 없다. 60년이 흘렀다. 4·3 피해자로 인정해달라는 것뿐이다. 우리는 4·3을 체험한 직접 당사자이자 증언자다.”

4·3 후유장애 신청을 했다가 불인정된 29명 가운데 김여량씨 등 4명은 이미 사망했다.



4·3에 민감한 제주도 민심

이명박 정부 출범 뒤 ‘살얼음판’

제주도에서 선거에 나오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꼭 공약이나 정책에 포함시킨다. 감귤 정책과 4·3에 대한 견해이다. 평소 제주도민들은 4·3 이야기를 그리 자주 하지 않는다. 그러나 4·3을 왜곡하거나 흔들려는 외부의 움직임이 있으면 도민들의 여론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지난 1월 인수위가 4·3위원회 폐지를 거론하자 여론이 급격히 악화됐다. 한나라당 총선 후보들조차 “온몸으로 4·3위원회 폐지를 막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4·19 혁명 이후 일각에서 4·3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곧이어 일어난 5·16 쿠데타로 논의 자체가 금기시됐다. 그 뒤 1980년대 후반까지 오랜 시간 침묵해야 했다. 살아남은 ‘4·3의 자식들’은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사관학교 입학이나 경찰관 채용은 물론 일반 사기업 취직에도 불이익을 받았다. 제주4·3희생자후유장애인협회장 고태명씨도 한국전쟁에 참전까지 했으나, 경찰관이 되려고 경찰학교에 들어가 훈련받던 도중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퇴교당했다. 금기의 시기에 소설가 현기영(전 한국문화예술원장)은 북촌리 학살사건을 소재로 한 을 썼다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88년 5월 현기영·문무병(제주전통문화연구소 이사장)·고희범(전 한겨레신문 사장)·강창일(국회의원)씨 등이 모여 제주4·3연구소를 만들며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지역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4·3 보도를 시작했다. 2000년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과거 국가권력의 남용을 공식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당선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여전히 4·3은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일부 보수 세력들이 4·3을 ‘반란’으로 규정하려는 노골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60주년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4월3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리는 위령제에 이 대통령이 참석할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새 정부의 4·3 정책을 가늠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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