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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장관의 이상한 ‘원기회복’

등록 2008-03-14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상희 장관 기자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예비역한테 빼앗긴 기운을 여군한테서 보충받는다”는 말 인용해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3월3일 오후 5시40분, 국방부 기자실에 새로 취임한 이상희 국방장관이 나타났다. 그는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막 육군 5군단과 3·6사단 등 전방부대를 방문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그는 이날 아침 국무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들으라”고 했다면서, 약간 흥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오늘 GP(경계초소)에 가서 군단장부터 말단 초병까지 다 만났다. 예전에 아무개 장군이 한 말인데, 재향군인회 모임에 가서 예비역 200명 정도랑 악수를 했더니 기운이 빠진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을 안내하던 여군들을 불러 한 20여 명하고 악수를 했더니, 다시 원기가 보충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군이 여군을 보는 시선인 것 같아 씁쓸”

10분 남짓한 간담회를 마치고 이 장관은 다시 한 번 ‘현장’을 강조한 뒤 기자실을 떠났다. 그가 실명을 거론한 아무개 장군은 전직 군 수뇌부 인사 중의 한 명이다. 그 자리에 있던 군 관계자들은 내심 놀랐지만, 이 장관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이 장관의 이날 발언은 군 최고 책임자의 여군에 대한 인식, 나아가 ‘공적 감수성’에 의문을 품게 할만한 내용이라 논란이 예상된다. 새 정부의 국무위원들이 인선 과정에서 각종 의혹을 받다가 해명 과정에서 더 큰 파문을 일으킨 것도, ‘공적 발언’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한 탓이다.

이 장관의 발언에 대해 국방부 대변인실은 “젊은 병사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돌아온 터라 기분이 좋은 상황에서, 취임초 기자들과의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편한 농담을 한 것”이라며 “절대 여군이나 예비역을 비하할 뜻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졸지에 군 수뇌부의 ‘원기 보충’ 상대가 된 여군들은 이 소식에 발끈하는 분위기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현직 여군은 “새 장관이 여군을 농담 소재로 삼은 것도 문제지만 그 내용이 여군의 사기를 치명적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라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한 예비역 여성 장교는 “장관 개인 자질을 떠나 여전히 군이 전반적으로 여군을 보는 시선을 담은 것 같아 ‘아직도 우리 군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다. 씁쓸하다”고 말했다.

이 장관이 전직 장군의 실명을 거론한 것은 ‘남성 문화’로 꼽히는 국방부의 위계에서도 부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한 국방부 관계자는 “친분이 있어서 그랬는지 친분을 강조하려고 그랬는지…, 어쨌든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희 장관은 “전략가이자 지침이 명확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스스로도 “군령 전문성”을 강조한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41년 군 생활을 하면서 군령 분야에 오래 있었다. 군정 분야는 별로 힘쓰는 자리에 있지 못했다. 군령 분야에서 느낀 것을 장관으로서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취임사에서도 ‘강한 군대’와 ‘실질’을 강조해, 이명박 대통령의 ‘실용’과 코드를 잘 맞춘 것으로 꼽힌다.

‘여군 리더 양성’ 및 ‘양성평등 시스템 정착’이라는 구호가 나온 지 오래됐지만 상당수 여군들은 이 구호가 전시행정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다. 여군학교 폐쇄(2002년) 뒤 여군발전단으로, 다시 여군발전팀으로 여군 정책 주무부서가 줄곧 축소·개편돼왔기 때문이다. 최근 국방부가 여군발전팀 책임자 인사를 개방형으로 한 것도 여군들의 이런 우려를 부채질한다. 사실상 유일한 여군 정책 부서인데다 책임자 자리는 몇 안 되는 주요 보직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 장관의 이번 발언도 겉 다르고 속 다른 여군 정책의 일면을 여실히 드러낸 셈이다.

여군발전팀 책임자 공무원 채용도 논란

이상희 장관은 3월5일 국군간호사관학교 임관식에 참석해, “투철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으로 소중한 책무를 다해달라”고 축사했다. ‘소중한 책무’를 가진 여군들의 지휘권자로서 ‘원기’ 이전에 어떤 ‘상식’부터 회복해야 할지 이 장관은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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