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뽑힌 쿠바 현지 리포트… “적어도 80%의 국민은 라울에 회의적이다”
▣ 아바나(쿠바)=하영식 전문위원 willofangels@yahoo.co.kr
쿠바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군복 차림에 시가를 입에 문, 긴 턱수염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다. 거리를 뒤덮는 정열적인 살사춤의 행렬, 가슴을 휘저어놓는 쿠바 가수들의 노래, 아바나 클럽과 쿠바 시가, 이 모든 것을 합쳐도 혁명가 카스트로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그는 살아 있는 쿠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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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발표 후 닷새 만에 선거
80살이 넘은 노혁명가 카스트로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2006년 여름부터 정치 일선에서 거의 물러나다시피 했다. 그리고 지난 2월19일엔 정치 세계에서 공식적인 은퇴를 선언했다. 대부분의 쿠바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노혁명가가 일선에서 물러나자, 그와 함께 세월을 보낸 많은 쿠바인들은 아쉬워하며 지난 세월을 추억하고 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대형 사진이 들머리에 걸려 있는 아바나 병원 앞. 간이상점을 운영하는 호세(72)는 카스트로의 은퇴 소식에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는 “어떤 사람은 그를 독재자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난 카스트로를 언제나 내 형제나 친구와 같은 존재로 마음속으로 존경했다”며 “피델은 쿠바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1959년의 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한 세대”라고 소개했다.
2006년 여름 카스트로가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이미 은퇴는 예정돼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은퇴 발표가 가져온 ‘슬픔’이 아바나의 거리를 무겁게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베나르도(54)는 “카스트로는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어릴 때 혁명이 일어난 뒤 줄곧 그와 함께 살아온 것 같다. 당연히 그의 은퇴는 내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노혁명가 카스트로가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하자마자, 마치 이미 모든 준비가 완료돼 있었던 것처럼 합법적인 권력이양 절차가 빠르게 진행됐다. 은퇴 발표 이후 불과 닷새 만인 지난 2월24일 쿠바 인민의회는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를 새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선출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새 국가평의회 의장을 선출하는 행사는 아바나 중심가에서 제법 떨어진 인민의사당에서 열렸다. 인민의원 614명 가운데 609명이 참석해 간접선거로 새 지도부를 선출했다. 이날 선거에서 라울 카스트로는 참석 인민의원 100%의 지지로 새 국가평의회 의장에 선출됐다. 이와 함께 내각 책임자와 인민의회 대표자도 한꺼번에 뽑혔다. 라울 카스트로 신임 국가평의회 의장이 맡아온 국방장관직에는 레오폴도 프리아스 전 육군참모총장이 올랐다. 신임 국방장관 선출은 이날 선거에서 이뤄진 유일한 변화였고, 다른 각료들이나 인민의회 대표들은 모두 자리를 지켰다.
국가평의회 의장과 더불어 쿠바 행정부는 6명의 부의장을 두고 있다. ‘2인자’ 격인 수석 부의장은 호세 벤투라가 차지했다. 이날의 선거 결과를 보면 대부분 참석 인민의원 100%의 찬성을 받거나, 1표가 모자라는 99.84%의 득표율로 유임됐다. 반면 호세 벤투라 수석 부의장은 8명의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져 98.69%의 가장 낮은 득표율을 기록해 눈길을 끌었다. 신임 국가평의회 의장을 비롯한 대부분 각료들의 나이는 70살 이상이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을 일궈온 세대다. 일부 외신들은 이를 두고 ‘노인 독재’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50년간 국방장관, 세계 최장수
인민의사당에서 새 지도부 선출 투표가 치러진 2월24일 오후, 아바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간접선거여서 국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가 배제된 까닭에, 평소의 일요일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아바나 주민 대부분 텔레비전 앞에 모여앉아 의사당에서 전해져오는 뉴스에 관심을 기울였다. 저녁이 되자 극장 앞은 영화를 관람하려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고, 시내 코넬리아공원에는 아이스크림을 사려는 이들이 기다랗게 줄을 늘어섰다. 공원 한편에선 쿠바 드럼에 맞춰 춤을 추는 젊은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새 국가평의회 의장 선출을 축하하는 행사나 모임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 평온한 일요일, 최고 권력의 변화라는 거대한 정치적 분수령을 넘어섰다는 현실이 느껴지지 않았다. 쿠바 국민들은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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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직에 오른 라울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 혁명을 이끌어낸 주역 가운데 한 명이다. 라울은 형인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현 인민의회 의장인 리카르도 드 케사다와 함께 혁명 지휘부에서 활동했다. 혁명이 성공한 뒤부터 거의 50년간 국방장관을 지내 ‘세계 최장수 국방장관’이란 기록을 갖고 있다.
서방세계, 특히 미국 언론의 라울 카스트로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차갑다. 혁명이 성공한 초기에는 반대세력에 대해 잔인한 처형을 주도했고, 그 뒤에는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을 자행한 ‘냉혈한’이란 게다. 라울 카스트로가 혁명 이후 강력한 스탈린 체제 구축의 주역이었다는 주장은 찬반 양론으로 갈린다. 하지만 그가 미국과의 협상도 마다하지 않는 유연한 정치노선을 보여왔다는 점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라울 카스트로가 직면한 가장 큰 현안은 무엇보다 형인 피델 카스트로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지난 1년 반 동안 ‘피델 카스트로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대중에게 자신도 1959년 혁명을 주도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어쨌든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처럼 바깥 세계에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고, 더구나 은퇴한 지도자의 동생이라는 점이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쿠바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점진적인 변화를 원하는 ‘보수적인’ 쿠바인들은 그를 “정의의 사나이”이자, “정열적인 활동가”로 평가하고 있다.
라울 카스트로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조짐은 선거 이튿날부터 아바나 시내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2월25일 아침, 시내 한구석 간이식당에 자리를 잡고서 선거 결과를 보도한 조간신문을 펼쳐들었을 때다. 출근길에 왁자지껄 아침식사를 하던 한 무리의 젊은이 중 한 명이 “카스트로 디나스티아!”(카스트로 왕조)라고 외쳤다. 조금 흥분한 듯 보였다.
그에게 다가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라울 카스트로의 집권을 지지하느냐”고 물었다. ‘상황’을 깨달았는지 목소리가 잦아든 그는 “적어도 80%의 국민은 라울이 피델의 뒤를 이은 것에 회의적”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적지 않은 쿠바 국민이 라울 카스트로의 집권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젊은 층만이 아니었다. 피델-라울로 이어진 수뇌부 교체는 지식인 사회에서도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가 통제되고 있다”
이날 오전 1930년대에 지어진 아바나대학을 찾았다. 인문대학 건물을 둘러보다 한 교수를 만났다. 정치철학 전공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한사코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는 연방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말투 역시 자못 불안하게 들렸다. ‘반정부적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것 자체가 그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구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정권이 바뀌었다고 쿠바 정치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의 지적은 목소리보다는 단호했다. 그는 “현재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개방정책은 지속적으로 수행할 것”이라며 “하지만 새로 짜인 정부 진용을 볼 때 과거의 정책은 폐기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정부가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하고 있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쓴소리를 했다.
말을 이어가던 그는 “내 이름이 활자화돼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쿠바 정부가 아바나에서 먼 지방으로 자신을 좌천시킬 수 있으며, 가족의 삶도 뒤죽박죽될 수 있다는 게다. “한국 언론에 날 거니 걱정 마라”는 말도 그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한국의 미국 대사관에서 자료를 수집해 미국으로 보내면, 미국에 사는 쿠바 스파이들이 쿠바 정부로 그 자료를 보낸다. 동료 교수 중 한 명도 예전에 외국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다가 하루아침에 삶이 풍비박산이 난 적이 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모든 교수들이 반정부적인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아바나대 역사학과 마티니 교수는 “새 정부를 지지하고, 혁명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혁명 이후 지금까지 쿠바에서는 많은 변화가 이뤄졌으며, 가장 중요한 성과라면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이웃한 작은 나라 쿠바가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는 것”이라며 “쿠바 국민의 자존심을 지켰고, 이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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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엔 문맹률이 30%를 넘었지만 지금은 문맹률이 0%다. 무엇보다 인구의 100%가 12년간 무상 의무교육을 받고 있다. 또 무상 의료서비스 덕분에 혁명 전 60%를 넘어섰던 유아사망률이 지금은 5.5%로 현저하게 낮아졌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혁명을 통해 수많은 진보를 이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쿠바 혁명의 ‘성과’를 조목조목 거론하던 마티니 교수는 권력 교체 이후에도 “계속 혁명과업을 수행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캠퍼스를 거닐다 이공계 도서관에 다다랐다. 뒤쪽 출입문이 열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살며시 문을 열었다. 한쪽에 있는 책상 위에 낡은 컴퓨터 3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논문 읽기에 몰두하고 있던 수학과 학생 아리페르(가명)는 “벌써 두 달 전부터 컴퓨터 2대가 고장난 상태로 방치돼 있다”며 “도서관 직원 누구도 컴퓨터 고장 따위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쿠바의 자랑 대학, 유학 꿈꾸는 학생들
쿠바의 자랑은 대학이다. 학비도 없고 입학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정부가 대학 교육 투자에 무관심하거나, 적어도 투자에 인색하다는 것은 아바나대학 구내에 들어서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열악한 교육환경을 반영이라도 하듯 열심히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 절대다수는 외국 유학을 꿈꾸고 있었다. 아리페르는 “대부분의 쿠바 학생들은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강한 반면, 정부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며 “그저 쿠바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아리페르 역시 유학을 원하고 있다.
아바나에서 목도한 쿠바는 마치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것 같은 착각을 불렀다. 1950~60년대에 생산된 고물차들이 도로를 질주하고 있고, 세계 어디를 가도 흔해빠진 인터넷 카페 하나 길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게 아바나, 아니 쿠바의 오늘이다. 컴퓨터는 ‘귀한 물품’으로 아예 구경하기조차 힘든 형편이었고, 인터넷은 대형 호텔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대학에서도 접속이 불가능했다.
쿠바의 미래는 라울 카스트로의 취임 연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2월24일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직후 인민의회에서 “더욱 공고한 불패의 (사회주의) 국가”를 새삼 강조했다. 더불어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를 유도하는 민주주의적인 개혁도 진행할 것임을 예고했다. 이 밖에 사법제도 개혁과 지방 개발, 지역 자치권 확대도 약속했다. 쿠바의 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정책들도 눈길을 끌었다. 대표적인 게 ‘우유’ 배급 문제다. 그는 “지금까지 어린이들과 특별한 용도 이외에는 배급이 금지됐던 우유를 연령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배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비자발적 채식주의자’의 나라 쿠바에선 우유와 육류가 귀하다.
경제정책 면에서 큰 변화를 예고하는 공약도 있었다. 라울 카스트로는 우선 쿠바 페소화(CUP·내국민용)와 외국환 페소화(CUC·외국인용)로 나뉘어 운용하던 화폐제도를 단일화할 뜻을 밝혔다. 관광산업을 가장 중요한 수입원을 삼고 있는 쿠바 정부는 사회주의적 경제제도를 보호하면서, 외화벌이를 하는 방법으로 이중 화폐제도를 채택해 운용해왔다. 하지만 CUP와 CUC의 이중구조는 쿠바 경제를 부패시키면서 지하경제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았고, 특히 빈부격차를 키우는 주범으로 지목돼왔다.
또 하나 경제의 중요한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은 라울 카스트로가 쿠바 국민의 삶을 지탱해온 ‘배급카드 제도’를 폐지할 뜻을 내비쳤다는 점이다. 배급카드는 쿠바인이면 누구나 소지하는 것으로, 이를 제시하면 국영시장에서 생필품을 거의 무료로 배급받을 수 있다. 가령 배급카드를 들고 국영상점에 가서 물건을 구입할 경우 치약은 우리 돈으로 10원에 구입할 수 있고, 비누는 5원 정도에 살 수 있다. 대신 일반 노동자들이나 교사·교수 등 전문직이 받는 월급이 대략 2만5천원 수준으로 낮다.
가격 자유화의 전 단계로 볼 수 있는 배급카드 철폐는 이중 화폐제도 폐지와 맞물리면서 쿠바 경제제도의 근간을 뒤바꾸는 개혁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두 정책이 폐지된다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사회주의적 시장제도’ 도입으로 이어지며, 쿠바 경제가 개혁·개방으로 나아갈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라울 카스트로는 ‘방침’만 밝혔지, 실행 시기나 내용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배급카드도 폐지, 시장제도로 가나
라울 카스트로의 집권은 쿠바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임이 분명하다. 물론 조만간 급격한 변화를 예상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생존해 있고, 그의 정치적 권위가 쿠바에선 여전히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라울 카스트로가 국가평의회 의장에 선출된 뒤 공식적으로 “중요한 사안은 피델과 상의해서 결정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가 숨을 거둔 뒤의 상황은 누구도 내다볼 수 없다. 대대적인 지도부 물갈이와 이 과정에서 정치적 생존을 위한 치열한 권력투쟁까지 벌어질 수 있다고 점치는 이들도 있다. 쿠바의 정치적 변화는 피델 카스트로의 사망 이후에나 비로소 본격화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의 시대’는 갔지만, 그 ‘다음 시대’가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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