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진한 목향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화재현장을 지켜본 현대건축가 황두진씨의 기고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남대문)이 큰불에 사라진 지 일주일여가 지났다. 한국전쟁 이래 가장 충격적인 이 문화재 참극 앞에 복원 논란과 책임 공방이 시끌시끌하다. 운명의 2월10일 밤, 불타는 숭례문 누각이 무너지는 현장을 지켜본 현대건축가 황두진씨가 에 글을 보내왔다. 그는 전통 한옥에 대한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는 “가급적 감정이나 목적 없이, 한 개인의 정확한 현장 기록을 남기는 일이 지금 상황에서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에 글을 썼다”고 말한다. 편집자
▣ 황두진 현대건축가
긴 설 연휴가 다 지나 슬슬 다음날 일할 준비를 하고 있던 일요일 밤이었다. 밤 9시가 조금 지나서 TV 뉴스에서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진화가 되었다’는 속보와 함께 아직도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영상이 소개되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다가 밤 11시30분쯤 모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준비하면서 다시 TV를 켰더니 또 숭례문 화재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유독 한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붕괴 위험’.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냥 잘 것인가, 아니면….
△ 지난 2월11일 새벽 1시30분 불길에 휩싸인 국보 1호 숭례문의 2층 누각 지붕이 무너지는 순간. 우아하기로 이름 높았던 누각의 처마선은 흉하게 일그러지면서 회색빛 연기와 잿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560여 년을 견딘 누각이 불붙어 무너지는 데는 5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진/ 한겨레 강창광 기자)
맹렬한 불에 오래도록 버티다
택시를 타고 시청 앞 광장을 지나 태평로에 들어섰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숭례문이 눈에 들어왔다. TV 화면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이미지는 결코 현실을 대신할 수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붕괴 위험’을 다급한 상황에 대한 아나운서의 수사학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그 모습은 훨씬 더 심각했다. 숭례문 문루를 구성하고 있는 공포(전통 목조건물에서 지붕 처마 끝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등에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 사이사이로 뱀의 혀처럼 빨간 불길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2층 문루는 이미 그 내부가 불바다였다. ‘붕괴’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혼잡한 상황 속에서 대목장(전통 목조건축물 짓기에 능숙한 장인) 신응수 선생을 만났다. 이번 설 연휴 직전, 우리 사무실 직원들과 경복궁 건천궁 답사를 갔다가 마침 와 계시던 신 선생을 만나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선생은 내게 “저 불을 끄려면 처음부터 지붕을 뜯어내고 건물 안에 물을 뿌려야 했는데” 하며 아쉬워하셨다. “결국 다 타야 꺼질 것”이라는 한숨 섞인 말씀도 하셨다. 나는 선생께서 처음 목수 일을 배울 때 바로 이 숭례문 중건 공사에 참여하셨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씀을 건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분이 과연 어떤 심정이겠는가.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선생을 알아보고는 엉뚱하게도 ‘사인’을 부탁했다. 선생은 정중히 거절하셨다.
나는 이전에 화재 현장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불을 끄는 물의 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건 그게 아니었다. 불이 물을 조롱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물이 오히려 연료가 되는가 싶을 정도였다. 점차로 건물의 붕괴가 임박하고 있었다. 먼저 서서히 지붕의 윤곽선에 변화가 왔다. 한옥의 지붕선은 유난히 날씬하고 그 끝이 경쾌하다. 입을 닫았으되 살짝 미소짓고 있는 표정과도 같다. 그런데 그 미소가 점점 흉하게 일그러지면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르게 변해갔다. 처마 깊은 집의 구조상 지붕이 밖으로 벌어지더니 기와가 여러 차례에 걸쳐 무너져내렸다. 그러다가 점차로 중요한 목구조 부재들이 내려앉으면서 지붕 전체가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건물이 그 맹렬한 화재에 의외로 오래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관적인 느낌이었을까? 이전에 건축가 조남호와 함께 한옥과 같은 중목구조(重木構造·서양식 경골 목구조와 대별되는, 두꺼운 나무를 써서 만든 건물 얼개) 건축의 내화 성능에 대한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결론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화염이 거세게 타오르지만 그 두꺼운 외피로 인해 붕괴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불에 노출되면 금방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리는 철골에 비해서 나름의 장점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섬세하기만 한 공포들, 힘있게 뻗은 기둥과 보, 도리들이 시뻘건 불속에서 놀랍도록 오랫동안 견뎌내는 모습을 보며 실로 어떤 감동 같은 것을 느꼈다. 만약에 사람이 살고 있는 건물이었다면 건물은 타서 없어질망정 그 안의 사람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가 동원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켜보던 시민들의 절규와 원성
이 와중에 건물을 비추고 있는 조명이 아직도 켜져 있었다. 건물의 한쪽은 불에 타고 한쪽은 조명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조명을 켜고 끄는 스위치는 누구 소관이며,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현실만큼 초현실적인 것이 없다.
또 하나 밝힐 것이 있다. 그것은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에게 퍼부어졌던 수많은 시민들의 절규와 원성이었다. 쌍욕에 가까운 고성이 건물에 물을 퍼붓고 있던 소방대원들에게 가해졌다. 잔디밭에 서 있던 한 남자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물을 지붕에만 퍼부으면 뭐해, 건물 안으로 넣어!”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는 이날 소방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해서야 소방복을 입는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날 그들의 모습은 뭔가 한 템포 느리고, 스스로도 어쩔 줄 몰라하는 듯했다. 시민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답답한 정도를 넘어 거의 화가 날 지경이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온 국민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던 그런 소방대원들의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날의 상황은 그랬다.
그런 원성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될 때나 나온다.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침묵이 현장을 덮기 시작했다. 여전히 수많은 물줄기가 숭례문을 향해 뿜어지고 있었지만, 이제 숭례문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당일 현장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은 경찰과 소방대원들을 제외하고 500명 정도였을까. 어떤 사람들은 울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물론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모두가 똑같이 느끼라는 법은 없다. 기자 출신인 친구 하나가 부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자기도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부인과는 초면이어서 인사를 나눴다. “이런 데서 이렇게 뵙네요.” 주위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도대체 정부는 뭘 한 거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이야”. 비난의 대상이 뻔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이렇게 서울이 봉헌되는구나….”
일반적인 화재 현장에서는 역한 냄새가 난다고 들었다. 각종 화학물질이 타면서 나는 냄새들이다. 그런데 숭례문 화재 현장의 냄새는 그렇지 않았다. 표현이 잘못되었다면 미안하지만 그것은…, 향긋했다. 아, 순수한 목구조 건물은 이렇게 타는 냄새도 달랐다! 이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 사냥꾼들이 육식동물을 잡아 배를 가르면 그 냄새가 역하지만 초식동물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숭례문은 이렇게 수백 년 무거운 삶의 내역을 진한 목향에 담아 태워 보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는 사진을 몇 장, 그리고 동영상을 여러 개 찍었다. 한 손에 꼭 들어가고 이런저런 기능이 많은 내 디지털 카메라를 보니 참으로 요술상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참 좋아진 것이다. 그런데 그 잘난 세상이 숭례문을 불길에서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태어나기 직전인 1960년대 중건되어 중년이 된 지금까지 내 삶의 배경 어딘가에 있어왔던, 너무나 많은 것이 너무나 빨리 변해버린 이 지긋지긋한 속도전의 나라에서 그나마 항상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어주었던, 몇 안 되는 귀중한 내 삶의 동반자 같은 존재가 이제 내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국보이기 이전에 그것은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하나의 고정된 상수였다. 온통 변수들로만 만들어진 듯한 이 도시에서 그것은 변하지 않았기에 가치가 있었고, 항상 그 자리에 있었기에 그만큼 든든했다. 그런데 그것이 불에 타서 없어지다니. 그리고 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니.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역시 조금 슬퍼져야 건축이 눈에 들어온다”고.
슬퍼져야 건축이 눈에 들어오는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TV를 통해 지붕의 맨 나머지 부분이 내려앉고 이윽고 불길이 잡히는 모습을 보았다. 새벽 2시가 이미 넘었고 극도로 피곤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아침에 정확히 출근해 회의를 하고, 오랜 연휴로 끊어졌던 회사의 업무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자리에서 내 할 일을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나의 최선이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제 막 사라진 숭례문에 대한 경의의 표현임과 동시에 내 마음속의 숭례문을 조금씩 다시 지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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