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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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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년을 무너뜨린 5시간 아수라장

등록 2008-02-22 00:00 수정 2020-05-03 04:25

“기와부터 깨야 한다”는 고건축 전문가의 의견이 사령탑 부재 현장에서 전혀 먹히지 않아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그렇게 물을 뿌려도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황당할 노릇이지요.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박성규(36) 서울 중부소방서 구조대원은 2월10일 밤 숭례문 화재 진화 현장을 떠올리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날 저녁 8시50분. 중부소방서 상황실로 남산 소방종합방재센터에서 보낸 남대문 누각의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 박 대원을 포함한 중부소방서 119 구조대원 8명과 중부소방서 무악119 안전센터 대원 4명이 출발했다. 접수 뒤 7분이 지난 저녁 8시57분 숭례문에 닿았다.

직접 깨어본 뒤에 안 지붕 얼개

박성규 대원은 곧장 연기가 나는 숭례문 2층 누각으로 올라갔다. 계단은 한 번에 한 명씩만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비좁았다. 2층에서는 4분 전에 도착한 119회현안전센터 대원 4명이 호스로 연기가 나는 지점을 찾아 물을 뿌리고 있었다. “연기가 너무 짙어서 불뿌리 격인 화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숭례문 석축의 정중앙 홍예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두 번째 기둥 위부터 불길과 연기가 번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화점을 짐작하곤 한참을 물을 집중해 뿌려댔다. 개당 30분 정도 쓸 수 있는 산소통을 어느덧 두 개째 쓰고 있었다. 벌써 40여 분이 흘렀다. 10여 명이 물길을 뿌려댔는데도 연기는 잦아들지 않았다. 이상했다. 숭례문 목재에는 일종의 코팅 보호막인 방수액이 잔뜩 입혀져 있으며, 다른 한옥처럼 지붕 위 공간이 비어 있지 않다는 치명적인 사실을 박 대원과 동료들은 몰랐다. 기와지붕을 받치는 서까래 위로 15cm 두께의 목재 적심이 얽혀 있고, 그 위에 강회다짐과 또 다른 흙층이 빼곡하게 찬 숭례문의 물 샐 틈 없는 지붕 얼개를 직접 깨어본 뒤에야 알게 됐다. “이런 구조를 미리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진화가 안 되자 현장 토론이 벌어졌다. 문화재청, 전문가들의 지침은 당장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안으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박 대원은 오용규 진압팀장에게 바깥에서 지붕을 통해 천장에 구멍을 뚫고 직접 불을 꺼보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이미 끼얹은 소방수로 지붕이 얼어붙어 곧장 기와를 걷는 일은 힘들다는 견해였다. 먼저 서까래를 잘라보기로 하고, 보통 한옥에 쓰는 체인톱을 가지고 처마로 갔다. 이때가 거의 밤 11시께. 구멍을 뚫자는 생각을 하고 서까래에 체인톱질을 하기까지 거의 1시간이 걸렸다.

‘건물 파괴 뒤 진화’란 방치만 전달돼

톱은 무용지물이었다. 박 대원은 깍지를 껴 보였다. “약 15cm 두께의 잘 고른 단단한 목재들이 이를 물고 꽉 끼워져 있는 상태에서 톱을 아무리 갖다대도 잘리지 않았어요.” 1시간여 준비 끝에 시도한 서까래 절단 작업은 ‘헛수고’였다. 문화재위원인 김동현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는 “서까래는 부재가 단단해 대형 기계톱으로 작업해야 할 정도인데, 공간이 좁아 그런 공구들을 가져올 여건도 안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랗게 질린 대원들은 이어 지붕 위로 올라가서 기와를 걷어내보기로 했다. 문에 둘러쳐진 돌담들 때문에 굴절차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뿐. 굴절차 이동 사다리 맨 위에 ‘바스켓’을 얹어 기와 제거 작업을 시도했다. 지붕의 경사도는 35~40°. 지붕이 다 얼어붙어 두 발을 붙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스켓 안에서 한 발만 내놓고 다른 사람이 받쳐주는 가운데, ‘TNT’라고 불리는 해머로 기와를 내리쳤다.

처음 기와를 내리치자 바위를 내리치는 것처럼 불꽃이 튀었다. 대여섯 차례는 내리쳐야 겨우 깨졌다. 하지만 그 안에 또 속기와가 있고, 그것을 깨어도 두껍게 깔린 흙층을 다시 파내야 했다. 박 대원은 “남대문 기와가 그렇게 단단한 줄 몰랐다”고 했다. 이런 속도로는 기와를 제대로 걷어낼 때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결국 기와를 깨는 작업도 중단됐다. 자포자기한 대원들은 “관계자 없나, 관계자 어딨나”란 말만 했다. 박 대원은 “바깥에서 물 뿌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크레인으로 걷어냈으면 됐을까, 관계자는 어디 없나 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소방관으로서 정말 참담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밤 11시께부터 진화 현장을 지켜본 시민 이은민(33)씨는 “길바닥이 한강이었다. 더 이상 맹렬할 수 없을 정도로 물을 쏘아대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박 대원과 동료들이 누각에서 한창 고투 중이던 밤 9시30분 숭례문 둘레 밖에는 서울에 사는 문화재청 간부 직원들과 서울중구청 간부, 시민단체 관계자, 고건축 전문가들이 모여 있었다. 앞서 밤 9시 대전 문화재청 청사를 지키던 당직 사령은 케이블TV 뉴스 속보를 보고서 화재 사실을 알았다. 즉각 비상연락망으로 알렸다. 소방방재청 쪽은 밤 8시56분과 9시25분에 문화재청 쪽에 사고를 알리는 팩시밀리 문서를 보냈으나 수신된 곳은 당직실이 아니라 연휴로 텅 비어 있는 문화정책과였다(문서는 11일 오전 직원이 출근한 뒤에야 확인됐다). 뒤이어 본청 간부들이 차를 타고 대전에서 현장으로 달려왔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부인과 함께 출장 중이던 유홍준 청장에게는 밤 9시15분께 휴대전화로 연락이 닿았다. 건물을 부수고 진화해도 좋다는 청장 지침을 소방 당국에 회신한 것은 그로부터 20분 뒤였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주무부서인 건축문화재과의 김상구 과장은 말했다. “대전에서 출발하기 전에 한 번, 차를 몰고 가는 중에 두 번 신원 미상의 소방 관계자로부터 진화 방향을 묻는 휴대전화를 받았습니다. 부숴라, 무조건 지붕을 해체하고 진화하라고 전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기와부터 걷으라”고 고함부터 질렀지요.” 그는 “불끄라는 소방서 쪽이 진화를 제대로 못한 것이 사실이지 않느냐. 우리는 정책기관일뿐 현장 관리에 법적인 책임은 없다”는 말도 했다.

현장에는 상황을 전체적으로 지휘할 사령탑이 없었다. 밤 11시30분 불길이 기와 사이로 삐져나오면서 2층 전체로 옮겨붙었지만, 건물 파괴 뒤 진화란 방침 외에 문화재청 사람들은 소방관들에게 사실상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일부 직원들이 전경들과 함께 기와 쪽과 불붙은 부재가 떨어지는 석축 부근으로 뛰어가 나동그라진 숭례문 현판을 둘러메고 나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강임산 문화재청 시민협력전문위원은 “떼어내 떨어뜨린 현판이 뒤집힌 채 홍예문 옆에 널려 있었는데, 급박한 화재 상황 때문에 누구도 신경쓰는 이들이 없었다. 방치했으면 잿더미에 묻혔을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현장의 고건축 관련 전문가들은 문화재청 따로, 소방관 따로인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조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복궁 홍례문을 복원한 신응수 대목장은 밤 9시에 지인의 전화를 받은 뒤 옷을 챙겨입고 나왔다. 1961~63년 자신이 직접 재건 작업을 하며 일을 배웠던 남대문에 불기둥이 올라오는 모습을 곧 보았다.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한창 불을 끄고 있는데 그 말이 먹혔겠느냐”며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경주 기림사 등에서 사찰 화재를 숱하게 겪고 진화했던 포항의 사찰 관리인 박찬용씨도 비슷한 시각 숭례문 기와지붕에 물만 퍼붓는 TV 생중계를 보다 못해 소방방재청에 시외전화를 걸었다. “‘기와부터 빨리 깨야 한다’고 절규했는데, 전문가들이 잘 협의 중이란 응답이 돌아왔다”고 그는 말했다. 새벽 1시 불덩어리가 된 2층 누각은 조금씩 무너졌고, 40여 분 뒤 영영 스러졌다.

전화 건 사찰 관리인에게 “잘 협의 중”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불을 꺼달라’고 말했다는 문화재청 사람들과 스스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불을 꺼야겠다’고 생각한 소방대원들. 정작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560살 묵은 남대문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박성규 대원은 “남대문의 특성을 미리 알지 못했던 우리로서는 부딪히면서 해결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문화재 데프콘이 시급하다

시스템이 부재해서 생긴 ‘인재’, 특수성 고려한 대응 전략 세워야

‘문화재 데프콘이 시급하다!’
숭례문 화재의 전말을 지켜본 일부 전문가들은 국방전략 개념으로 국내에 실행 중인 ‘데프콘’ 시스템을 문화재 방재 체제에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데프콘은 ‘방어준비태세’(Defense Readiness Condition)의 줄임말. 위기상황, 전면전 등에 대처해 한·미 양군에서 단계별 대응 태세가 자동 실행되는 전투방어 전략을 뜻한다. 이 개념을 문화재 화재나 방재 예방 등에 응용하자는 것이다.
이 개념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숭례문 화재가 진화의 물리적 조건을 갖췄는데도, 무형의 진화 운용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인재였기 때문이다. 도심 대로의 숭례문에는 발화 5분여 만에 소방대원들이 출동했다. 소방 인력 300여 명과 소방 차량 90여 대가 집중 투입됐다. 일반 건물이라면 금방 진화될 상황이었지만, 고건축 화재의 특수한 성격, 진화 요령에 대한 정보 공유가 이뤄지지 않아 화를 키웠다.
고건축 전문가인 김동현 문화재위원은 “10일 상황은 누가 진화를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양상이었다”고 단언했다. 현장 소방관들은 목조 문화재에 대한 진화 훈련이 전무했다. 주로 빌딩 등 현대건축 화재를 맡은 중부서 소방관들은 한옥집 진화법을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현대 건축과 전혀 다른 문화재 화재 진화의 절차와 요령은 무지했고, 문화재청과도 정보 공유가 이뤄지지 않았다. 유리창이 없고, 부재 짜임 구조가 복잡하며 진화 공간이 턱없이 비좁은 상황에서 목조 한옥에 대한 최소한의 식견과 감각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진화에 참여한 박창기 소방대원은 “문화재를 따로 분류해 부재, 건물 구조, 디테일한 진화 방식 등을 같이 연구개발하고 교육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한동수 한양대 교수도 “비싼 설비 문제보다 기관, 전문가들끼리 특수 진화 방식의 개발 연구, 화재 재질 실험, 교육 훈련 시스템 창안 등이 필요하다. 반사적으로 당국과 전문가들이 위기 상황에 즉각 대처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훈련 매뉴얼과 콘텐츠는 문화재청과 전문가들이 지자체, 소방당국과의 공조 아래 개발해야 할 대상임은 물론이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동현 문화재위원 등은 문화재 데프콘의 관건으로 비상시 우선 집중 관리할 필요가 있는 문화재를 등급별·소재지별로 20여 종으로 분류하고 그 특성에 맞는 진화 방법과 훈련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지역별 특정 영역 문화재별로 진화 조건, 재질 조건 등에 정통한 전문 소방 인력을 문화재청과의 공동 훈련을 통해 육성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된다. 일본의 경우 나라, 교토 등 고도에는 특정 문화재 현황에 정통한 문화재 소방관제도 등 전문가제도가 운용되고 있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응급실로 실려온 중환자의 징후를 먼저 분석하고 처방을 토의하는 대학병원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김봉렬 교수의 권고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첨단 방재 장비 개발과 복원 역량 등 곁가지 하드웨어에만 집중해온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청 쪽은 “참신한 제안이라고 본다. 새 매뉴얼 및 법제 개정 작업 때 반영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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