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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이직의 ‘무매너’

등록 2008-02-18 00:00 수정 2020-05-02 04:25

첫 출사표 던진 사람 벌써 40명 헤아려… 하루아침에 정치권으로 옮기면 그의 ‘입’을 누가 믿나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총선의 폴리널리스트]

2월14일 한나라당 당사에 낯익은 얼굴의 두 사람이 나타났다. 홍정욱 전 회장과 유정현 전 SBS 아나운서였다. 두 사람은 4월9일 총선을 앞두고 서울 동작갑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다. 이날은 공천 심사를 위한 면접이 예정돼 있었다.

이미 17대에서 ‘정치인 출신’ 다음

일부 여성 당직자는 ‘연예인급’ 외모를 지닌 두 사람에게 사인을 요청했다.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는 각 언론사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두 사람은 면접을 마친 뒤 별도의 기자회견을 가질 수 있었다. 언론 노출이 아쉬운 선거철에, 여느 정치 신인이라면 누리기 어려웠을 ‘호사’였다. 두 사람이 언론인 시절에 얻은 유명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치권을 찾는 언론인, 이른바 ‘폴리널리스트’(politics+journalist)의 발걸음이 바빠지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된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총선 예비후보 명부와 각 정당 공천 신청자 명단을 종합하면, 이번 제18대 총선에서 금뱃지를 노리는 방송사, 중앙일간지 등 주요 언론사 출신 인사들만도 2월15일 현재 40명에 육박한다(표 참조).

당락과 상관없이 제17대 총선에 출마했던 사람은 제외하고, 이번 총선에 새롭게 출사표를 던진 사람만 꼽아보더라도 그렇다. 통합민주당은 아직 공천 신청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결과에 따라 폴리널리스트로 옷을 갈아입을 언론인은 50명을 훌쩍 뛰어넘을 전망이다.

언론인이 정치권으로 유입되는 현상 자체는 이미 새로운 흐름이 아니다. 2004년 제17대 총선을 통해 국회로 진출한 언론인은 전체 299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40명(13%)이었다. 제16대 총선에서는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이 44명(16.1%)이었다. 이는 정치인 출신 49명(17.9%)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였다. 15대 총선에서도 언론인은 정치인과 관료 등 공직자 출신 다음으로 많았다.

이쯤 되면 싫든 좋든 언론인이 정치권으로 옮겨가는 현상 자체를 무작정 비판할 일만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법하다. 실제로 언론계 내부에서도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언론인이 정치권으로 몰려가는 현상은 이미 언론계가 당면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편집국장을 지낸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정치권에 가는 언론인이라고 해서 한 묶음으로 비판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며 “특정 분야에 관한 ‘스페셜리스트’로 성장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출입처를 전전하다 중년을 맞는 기자들이라면 언론사를 나와 갈 만한 곳이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전직 기자와 가장 잘 맞는 곳이 정치권이라는 분석이다.

‘나대로 선생’과 회장도

문제는 언론사에 있다가 하루아침에 정치권으로 옮겨가는 경우다. 실제로 이번 총선을 앞두고 폴리널리스트로 변신한 언론인 가운데 상당수가 이에 해당한다. 최근까지 한국방송에서 등을 진행했던 박선규 기자와, 같은 회사의 신성범, 안형환 기자가 그랬다. 대선 기간에 이명박 당선자에게 노골적으로 줄을 섰던 차갑진 전 시청자센터장도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다.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 SBS를 최근 그만둔 홍지만 전 앵커와 통합민주당을 찾아간 김문환 전 기자도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곧바로 말을 갈아탄 경우에 속한다. 총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청와대 부대변인 자리를 보장받고 문화방송을 나온 김은혜 전 기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문사에서는 얼마 전까지 에서 주목할 만한 활약을 펼치던 이진동 기자와 배한진 경기남부취재본부 기자가 역시 한나라당 지역구 국회의원 공천을 받기 위해 회사를 나왔고, 의 송승호 취재팀장도 하루아침에 펜을 놓고 정치로 뛰어들었다.

에서는 지난해 대선 직전 현직 기자들이 대거 이명박 당선자 캠프로 몰려간 탓에 대선 이후 추가로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 많지 않다. 만평 ‘나대로 선생’으로 유명한 이홍우 화백 정도가 추가 이탈자다.

홍정욱 전 헤럴드미디어 회장은 언론사 사주로서는 처음으로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 홍 전 회장은 2월14일 한나라당 공천 심사를 위한 면접을 마친 뒤 “언론사 CEO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씌워지는 ‘혐의’는, 현직에 있는 동안 정치권과 모종의 거래를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정치권으로 옮기는 문제를 하루아침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만큼, 언론인 신분 상태에서 특정 정당과 끊임없이 협의할 수밖에 없다. 또 이 과정에서 양쪽이 자연스럽게 ‘코드’를 일치시켜가는 결과가 뒤따른다는 분석이다.

김서중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성공회대 교수)는 “언론인의 정치권 진출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일정 기간의 공백기도 없이 곧바로 옮겨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렇게 곧바로 옮겨간다면 독자나 시청자는 지난 몇 개월간 해당 언론인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이었느냐 하는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는 1차적으로 독자와 시청자에게 돌아간다. 해당 언론사와 동료 언론인이 받게 되는 피해도 상당하다. 매체 보도에 대한 수용자들의 신뢰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뢰를 먹고사는 언론으로서 이 피해는 생각보다 클 수 있다.

일정 부분 ‘특혜’를 안고 출발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로 지목된 당사자들은 물론 반론을 제기한다. ‘언론인이 정치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의 공백기를 가져야 한다’는 일반론적인 틀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이다.

최근 한국방송에서 한나라당으로 곧바로 옮겨간 박선규 전 기자는 “내가 진행했던 등 모든 프로그램과 모든 보도를 되짚어보면 알겠지만 현직에 있는 동안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공정하게 사안을 다뤘다”며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정치에 뛰어들었는데, 당위론적인 이야기로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몸담았던 언론사의 신뢰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겠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나는 내 소신에 따라 행동한 것이지만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면, 그 부분만큼은 내가 받아들여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언론인의 정치권 진출 이후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언론인은 사실 일정 부분 ‘특혜’를 안고 출발한다. 홍정욱 전 회장과 유정현 전 아나운서가 등장한 서울 동작갑 지역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원래 이 지역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서장은 동작갑 당협위원장과 권기균 한나라당 부대변인이 그들이다. 두 사람은 나름의 지역적 기반과 당내 기여를 통해 국회 진출의 꿈을 키워왔다. 두 당직자의 존재는 두 언론인의 등장으로 왜소화되고 말았다.

이처럼 정치권에 진입할 때 다른 어떤 직종의 신인보다 수월하게 첫발을 내딛는 쪽이 언론인이다. 위치가 역전되는 것은 국회 진출 이후다. 진입은 쉬웠지만 정작 그 이후 주목할 만한 활약을 보인 사례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는 것이 정치권의 분석이다. 물론 평가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견이 나타나기는 한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이목희 통합민주당 의원은 “언론이 직접 평가해봐도 알겠지만 지금 활동하고 있는 국회의원 가운데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긴 언론인 출신 의원이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며 “특히 기자들의 경우 다양한 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순발력은 뛰어나지만 특정 분야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연구한 사람이 적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통합민주당의 한 다선 의원 역시 “언론인으로서 성숙하기도 전에 정치권에 들어오는 사례가 많아 언론과 정치 양쪽 모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일부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 검사 출신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언론사 출신 의원들을 비교적 높게 평가했다. 홍 의원은 “나는 법조인 출신이지만 순발력과 유연성이 있는 언론인 출신이 법조인 출신보다 오히려 낫다고 본다”며 “다만 정치권에 와서 기자티 내지 않고 밑바닥부터 해주면 (정치권으로서는) 나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언론 공공성에 걸림돌이 돼온 ‘불량 전과’

언론을 가장 잘 아는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이 오히려 언론의 공공성과 독립성을 가로막는 데 앞장서왔다는 사실도 지적받는 부분이다.

언론계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대표적 인물은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이다. 박 의원은 2004년 국가기간방송법을 발의했다. 국가기간방송법은 한국방송 예산에 대한 국회의 직접적 간섭과 문화방송 민영화를 사실상 전제하고 있다. 언론계에서는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방송의 공공성과 독립성이 무너질 것으로 보고 있다. 박 의원은 출신이다.

한국방송 출신인 같은 당의 박찬숙 의원도 언론계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17대 국회에서 문화관광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박 의원은 신문·방송 겸업 금지 등을 강제하는 현행 신문법의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최상재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언론인 출신이 정작 국회에 진출했으면 언론의 독립성 등에 대해 적어도 일반인보다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데 실제 활동을 보면 오히려 거꾸로인 것 같다”며 “언론인 출신인 박형준,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물론 통합민주당 소속 문광위원들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최 위원장은 또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들이 언론을 위해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앞장서고 있으니 언론계에서는 (언론인의 정계 진출을) 더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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