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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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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아버지의 길을 걷다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대학생이 아버지를 인터뷰하다… 뜬금없이 소리친 뒤 조심스럽게 대화의 포문을 열었네

▣ 이재영 대학생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 목욕탕을 같이 간 게 다다. 내 머리가 굵어진 사춘기 시절부터 아버지와 나는 바쁜 삶을 핑계로 서로 외면한 채 살아왔다. 퇴근하고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집에서 마주치면 “잘 있었냐” “네” “밥 먹었냐” “네” 같은 질문과 답변만 오갔다. 대화 같은 대화, 의미와 내용이 있는 대화는 우리 사이에 없었다. 어쩌다가 집 거실에 아버지와 나 단둘만 남겨지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함, 참을 수 없는 벌쭘함이 우리를 둘러싸서, 결국 나는 방으로 도망와버린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둘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어본 일도 거의 없다.

“아버지 탓”인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다

내가 아버지와 대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일이 터지고서다. 나는 지난해 2월, 20일 정도 병원에 입원했다. 일종의 스트레스성 질환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고 그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입원과 퇴원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것을 아버지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아버지 때문이야. 아버지 성격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야.’

나와 아버지는 성격이 닮았다. 남들에게 쉽게 다가서지도, 남들 앞에 잘 나서지도 못한다. 작은 일에 쉽게 상처받기도 한다. 퇴원한 지 며칠 뒤, 나는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아버지는 도대체 왜 그래요? 저라도 한 대 쳐보시든지요!” 아버지에게 그렇게 소리친 건 처음이었다. 마음에는 뾰족한 비수를 꽂았다. 나조차도 뜬금없는 그 한마디. 그 뒤 나는 나를 위해서라도, 아버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왜 그런 성격을 갖고 있는지. ‘아버지 성격의 실마리를 풀면 나도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1월19일 토요일 오후.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시던 아버지 옆에 앉았다. 그때 그 일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는 그때 정말로 아버지가 싫었고 화가 났었다고. 아버지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내가 미안하다” “고맙다” 그런 유의 말들이었다. 이것 참, 뭐라고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왕 시작한 거, 내처 물었다. “아버지, 왜 고등학교를 안 가셨어요?” 난 왜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안 갔는지가 항상 궁금했다. 아버지는 올해로 쉰다섯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는 전쟁 뒤라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다. 아버지 집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5남매 중 막내인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중학교에 갈 1967년은 중학교 입학시험이 치러지던 때였다. 좋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어쨌든 아버지는 공부를 잘했는지, 그 지역에서 제일 좋은 여수중학교에 들어갔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중학교 졸업 무렵, 아버지는 당시 전국에서 ‘날고 긴다’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서울고등학교에 지원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민족사관고쯤 될까? 그러나 아버지는 떨어졌다. 인생의 첫 번째 실패를 맞본 것이다. 1970년 1월, 아버지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쓸쓸히 밤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도 일류병의 희생양일지도

아버지는 출세에 대한 욕구가 강했나 보다. 아니면 공부 그 자체에 대한 욕구가 강했거나…. 고교 진학을 포기하면서까지 서울고에 한 번 더 도전했다. 고입 재수를 택한 것이다. 당시 4대 명문고(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는 출셋길의 직행버스였다. 4대 명문고는 곧 서울대 입학을 담보했고 서울대 출신은 아무 기업에서나 데려갔다. 명문대만 들어가면 출세가 보장되었던 시대, 1960~70년대 고도 성장기의 한국 사회가 그랬다. 남들이 ‘명문대’라고 말하는 학교를 다니지만 ‘88만원 세대’의 그늘과 공포를 벗어나기 힘든 나로서는 사실 그때가 부럽기만 하다. 어쨌든 인생은 아버지에게 또 한 번의 쓴 잔을 마시게 했으니, 서울고에 또 떨어진 것이다.

실패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는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듯도 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 망할 놈의 공부가 뭔지. 아버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아버진 결국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니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서울고가 아닌 고등학교는 가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명문고에 가지 못한 것이 창피했던 걸까? 아니면 공부 욕심이 많아서였을까? 어쨌든 아버지는 검정고시를 택했고 1971년 여름, 5개월 만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 그리고 독학으로 1974년 전남대 의대에 들어갔다.

나는 아버지와 ‘대화’를 한 며칠 뒤,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대신 다닌 검정고시 학원 자리에 가봤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지금은 ‘백상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친구들이 모두 학교를 다닐 때, 혼자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는 아버지 마음은 어땠을까?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아버지도 ‘일류병’의 희생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웠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고등학교를 가지 않아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 없어 하시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의대에 들어가서도 고민은 계속됐다. 본과 1학년, 외워도 외워도 공부가 끝이 없어 계속 학교에 남을지, 다시 시험을 봐서 학과를 바꿀지 고민하며 한 달을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는 학교에 남기로 했다. “고향에서 가난에 허덕이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공부를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때 이야기를 하며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나 역시 경제적인 걱정이 없어서 마음이 더 나약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학교를 마치고 지금은 경기도 부천시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신다. 나 역시 지금 전공인 토목공학이 맞지 않아 고민이 되는데, 본과 1학년 때 힘들었다는 아버지의 마음과 닮았을까.

무엇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이번 ‘대화’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부분도 있지만 그건 어렴풋할 뿐이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풀리지 않은 질문들, 묻지 않은 질문들, 그리고 몇 가지 원망들이 자리하고 있다. 어색하고 짧았던 아버지와의 세 시간, 아버지가 열일곱에 다니던 학원 길을 걸었던 한 시간은 그 모든 것을 완전히 풀어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아버지가 나를 이해하려면, 뭐가 더 필요할까. 우리 부자 사이에, 혹은 내가 아버지에게 갖고 있는 앙금을 풀어내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과연 풀리긴 하는 걸까. 아버지는 나에게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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