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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마다 백일홍·천일홍 꽃이 피네

등록 2008-01-18 00:00 수정 2020-05-03 04:25

[정겨움] 뒷길을 야생화 가득한 화단으로 꾸민 인천 산곡 무지개아파트

▣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1월9일 오후 인천시 산곡2동 산곡무지개아파트. 두 동짜리 아담한 단지의 입구에 들어서자 102동 벽면에 초가집과 인공폭포, 장독대, 절구 등이 눈길을 끈다. 입구 오른쪽으로 작은 오솔길이 보인다. 오솔길 양쪽으로는 40여 개의 이랑이 늘어서 있다. 이랑마다 금계꽃, 메가골드, 백일홍, 천일홍, 코스모스 등이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스산한 겨울 날씨만 아니었다면 백화가 만발했을 것이다. 산책로 가운데에는 인공 연못이 있다. 겨울이라 물을 빼놓았지만 여름이면 물고기들이 이곳에서 헤엄치며 논다. 모두 330세대가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이지만 환경운동연합의 제2회 환경아파트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뒷길 화재 뒤 환경 바꾸기 시작

무지개아파트가 환경아파트로 거듭나는 데는 주민들의 노력이 컸다. 김순옥(56)씨는 1991년 이 아파트가 준공되면서 입주했다. 13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던 동네는 2004년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 9월 나무들이 방치돼 사람이 잘 다니지 않던 아파트 뒷길에서 불길이 솟아오른 게 계기였다. 한밤중에 주민들이 모두 뛰어나와 물을 뿌렸다. 즉시 발견돼 다행히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좁고 노후한 환경을 바꿔보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며칠 뒤, 관리소 직원들이 뒷길 나무를 제거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김순옥씨는 일꾼들이 더울 것 같아 매실즙에 얼음을 띄워 가지고 나갔다. 나가보니 감자를 삶아 온 주민, 국수를 준비해 온 주민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음식을 나누고 일을 거들었다. 하나둘 주민들이 더 모였다. 10년을 넘게 살았지만 처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많았다. 날이 지나면서 음침한 뒷길이 서서히 밝아졌다. 고목은 없애고 작은 나무들은 옮겨 심었다. 조병환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오솔길 옆을 야생화로 채워 어린이 학습장으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가을이 되어 주민들은 함께 강화도로 야생화씨를 채집하러 나섰다. 길을 가다가 꽃이 보이면 차에서 내려 씨를 따는 식이었다. 김씨의 옆집에 살고 있는 박보영(49)씨는 “어릴 적 고향에서 꽃씨를 따던 생각이 난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러던 중 2004년 12월 함께 살던 김순옥씨의 시어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는 돌로 된 절구를 남기셨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면서 시어머니가 생전에 산책하던 곳은 온통 야생화로 가득 찼다. 아파트 입구는 인공 폭포와 초가집으로 꾸며졌다. “물이 가까이 있으면 사업이 망한다”고 걱정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공사가 끝나자 표정이 밝아졌다. 다들 초가집과 연못에서 고향을 떠올렸던 것이다. 김씨는 시어머니의 유품인 절구를 관리사무소에 기증했다. 딱딱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교육이 될까 싶어서였다. 절구를 꺼내놓으니 항아리, 키, 맷돌, 홍두깨틀을 내놓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다들 각 집의 베란다나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있던 것들이다. 한쪽에 공간을 내어 꾸며놓으니 초가집과 어우러져 구수한 분위기가 났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이 분위기에 이끌려 주변 아파트 주민들까지 찾아왔다.

절구 옆에 항아리, 키, 맷돌…

김씨는 지난해 9월 손녀를 얻었다. 그의 꿈은 따뜻한 봄날에 야생화가 핀 산책로에서 손녀와 함께 사진을 찍는 일이다. “손녀에게 이 공간을 선물하고 싶어요. 손녀가 자라서 할머니집을 생각할 때 딱딱하고 삭막한 회색 벽이 아니라 아기자기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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