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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이름을 보낸다

등록 2008-01-11 00:00 수정 2020-05-03 04:25

그에게 꼭 맞는 한자 지어주기… 좋아하는 후배 소설가에게는 ‘연’을 선물하리라

▣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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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엔 친구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놀이를 즐겼다. 글 쓰는 친구가 새로이 한 명 생기면, 생일에 이름을 지어 도장을 파서 선물했다. 그땐 인사동 어느 골목 도장 파는 집에서 할아버지에게 전각을 배웠다. 낙관석에 조각칼을 대고 살살 긁어내면 어느새 글자가 드러났다. 친구에게 어울리는 한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옥편을 뒤지며 밤을 새우곤 했다. 그때 지어주었던 이름들은 어째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멋을 내기 위해서 꼭 한 글자엔 ‘풀 초’(艸)가 다른 한 글자엔 ‘실 사’(絲)가 부수로 들어간 글자들을 골랐다. 전서체로 도장 안에 새겨넣기에 모양이 났고, 어딘지 여성스럽고 곱다고 생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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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멍청해지고 홀가분해지다

문자는 그 자체가 기호이자 그림이다. 그게 문자가 지닌 일차적인 매력이다. 그런데 한자는 기호보다 그림 쪽에 약간 더 치우쳐 있다. 그 점 때문에 나는 서예도 좋아하고 전각도 좋아한다. 찬찬히 좋은 구절을 찾아서 천천히 한획 한획을 만드는 일은, 일순간에 나를 사람답게 만든다. 그 천천함 덕분에 내가 사람다워지는 느낌이 난다. 사각사각 돌을 갉아내어 글자를 새기는 시간은 너무도 단순하고 천천하기에, 나는 저절로 멍청해지고 동시에 홀가분해진다. 그런 시간은 너무도 더디며 촘촘하기 때문에 일상의 잡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단지, 그냥 나는 내가 되어 있다.

언젠간 내가 꾸려가는 작은 도서관에서, 아이들하고 이 놀이를 해본 적이 있다. 옥편을 뒤져서 자기 호를 짓고, 그리고 그것을 붓을 들어 먹을 찍어 화선지에 썼다. 어떤 열 살짜리 아이 하나는 한자를 발명하기도 했다. ‘치타’라는 글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도저히 찾아지질 않자 스스로 글자를 만들어냈다. ‘군파야’라는 음을 먼저 생각해내고서 임금 군, 치타 파, 들판 야, 라고 세 글자의 뜻을 채웠다. 치타처럼 실컷 달리며 놀아보고 싶다는 뜻이라 했다. 운동을 좋아하고 뛰어놀기를 좋아하던 녀석다운 이름이었다.

목월의 시집 뒤에 있던 인지를 인상 깊게 쳐다보던 한 선배가, 자신이 시집을 내면 꼭 이 초생달을 도장 안에 새겨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도장 안에 글자만 새겨넣는 게 아니라 간단히 요약한 그림을 새겨넣으면, 그것이 나름대로 새로운 한자가 되어 있다. 그렇게 책에 인지를 붙이던 시절에는 도장 선물을 하는 재미가 컸는데, 요즘은 이런 놀이를 자꾸 잊는다. 이런 놀이를 여유 있게 하기엔 생활이 근근하다고 말한다면 변명이겠고, 이름을 선물할 사건이 흔치 않다는 게 더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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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좋아하는 한 후배 소설가에게 ‘전각’을 직접 새겨 선물하기로 약속했다. 어떤 선물을 늘 하고 싶었는데, 기발하고 깔끔한 정성을 그 어떤 물건이 대신할 길이 없어 막막해하던 차에 도장 파던 일이 기억났다. 그 후배에겐 딱 한 글자를 선물해주겠다고 혼자서 미리 정해두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만들어본 한자, ‘여기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있을 연’. 하늘을 나는 연(鳶)을 뜻하는 이 글자는 순전히 ‘연’이란 원래 한자에 실망을 하고서 만든 글자이다. 나는 그 글자에 반드시 ‘실 사’(絲)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만든 열일곱의 발상이다. ‘이래야 하는데 이러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을 받아들이지 않고서 이내 무언가를 만들어낸 열일곱의 치기와 낭만이 그 글자 안에는 들어 있다. 그리고 ‘연’은 하늘을 날지만, 가느다란 한 줄 실에 이어져 이 지상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갸륵했다. 그 갸륵함이 또 그 후배 소설의 매력이고 보면, 그 한자는 그 후배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있을 연’

내일은 꼭 인사동에 나가서 모양 예쁜 낙관석을 하나 사야겠다. 그리고 솜씨가 무뎌진 만큼 더 천천히, 사각사각 도장을 파야겠다. 다음에 만날 술자리에 들고 가서 내밀어보아야지. 자, 이게 내가 보내는 너의 이름이야, 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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