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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합민주신당 ‘쇄신 아노미’

등록 2008-01-05 00:00 수정 2020-05-03 04:25

2007년 12월27일 하루에만 초선·김한길 의원 기자회견, 토론회 열렸으나 결국은 ‘폭탄 돌리기’였네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아노미’(anomie).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아노미란 구성원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를 뜻한다. 어원은 무법, 무질서의 상태를 뜻하는 아노미아(anomia).

2007년 12월19일 대통령선거 이후의 대통합민주신당 상황을 설명할 때, 아노미라는 단어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다. 531만여 표 차의 참담한 패배는 신당에 ‘쇄신’이라는 이름의 거센 바람을 몰고 왔다.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바람이 중구난방이다.

쇄신 기준에 대한 합의도 없이 여기저기서 쇄신론이 불거지는 통에, 쇄신의 대상이 거꾸로 주체가 되기도 한다. 쇄신을 통해 좇아야 할 가치가 불분명하다. 무조건 쇄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낡은 것을 몰아내고 새것을 채우는 거대한 바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내상만 입히는 손바닥 바람에 그치고 있다. 폭풍이 아닌 장풍이다. 정풍운동이 아니라 장풍운동에 그치고 있다. 신당은 아노미 상태다.

정풍운동 아닌, 손바닥 장풍운동

12월27일 오전 문병호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이 국회 정론관을 찾았다. 문 의원은 당 전면 쇄신을 요구하고 나선 19명 초선 의원 모임의 연락간사를 맡고 있었다. 문 의원은 브리핑에서 “정부의 총리와 장관, 당의장과 원내대표를 지냈던 분들의 백의종군을 정중히 요청한다”며 “(백의종군에는) 당의 전면에서 물러나는 2선 후퇴도 있고 총선 불출마도 있다”고 말했다.

일종의 무기명 살생부였다. 이름이 적시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와 천정배·강금실 전 법무장관,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 그리고 정동영·김근태·문희상·정세균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물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 계파 의원을 모아 민주당으로 옮겨간 김한길 전 원내대표도 포함돼 있다.

초선 모임의 브리핑이 끝난 직후, 이번에는 김한길 전 원내대표가 급히 기자들을 모았다. 이제는 ‘노무현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는 것이 김 전 원내대표의 메시지였다. 김 전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말실수 몇 번 한 것 말고는 솔직히 잘못한 게 뭐냐’는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된다”며 친노 그룹을 겨냥했다. 대선 후보로 나섰던 정동영 전 의장에 대해서는 “정 후보가 패한 이유는 노 대통령의 대안세력이라기보다 승계세력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라며 두둔하고 나섰다.

“김한길 의원도 대상 아닙니까”

김 전 원내대표는 당 쇄신위원회의 구성도 문제 삼았다. 기존 지도부가 구성한 쇄신위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초선 모임의 주장과 다르지 않았다. 즉, 쇄신위가 이미 쇄신 대상이라는 지적이었다.

문제는 그 말을 하는 김 전 원내대표 본인도 쇄신 대상으로 지목됐다는 사실이다. 한 기자가 물었다. “오늘 오전 초선 모임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김 전 원내대표도 쇄신 대상에 포함되는 것 아닙니까.”

김 전 원내대표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다 충정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백의종군이라 했나요. 그렇지 않아도 저는 백의종군하고 있습니다.”

김 전 원내대표의 기자간담회가 마무리될 무렵, 국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의도 건물에서는 또 다른 행사가 열렸다. ‘광장’이 주최한 ‘한국 정치의 새로운 모색’이란 주제의 토론회였다. 광장은 이해찬 전 총리 등 친노 그룹이 주축이 된 연구모임이다. 모임에는 김형주, 백원우, 이화영, 윤호중, 이광철 의원 등이 모였다.

이화영 의원이 행사 도중 잠시 빠져나왔다. 김한길 전 원내대표가 제기한 ‘친노 그룹 책임론’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이 의원은 “국민들로부터 혹독하게 야단맞은 마당에 우리끼리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한 뒤 “계속 우리끼리 치고받는 모습을 보인다면 지지자들이 더 실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의원은 “김한길 그룹의 ‘의도적’ 도발에 대해서는 우리 쪽에서도 적잖은 불만이 있다”며 “그래도 지금은 이 전 총리를 중심으로 격앙된 분위기를 추슬러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단지 인적 청산론, 묻지마 쇄신론일 뿐

12월27일 하루 종일 대통합민주신당 안팎에서는 쇄신론이 분주히 오갔으나 실속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저마다 ‘폭탄 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셈이다.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대선 패배의 1차적 책임을 떠맡아야 할 정동영 전 의장까지도 여전히 ‘관망 중’이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로 나선 정동영 전 의장의 패배를 의외의 결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패배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 탓일까. 대선 결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사라져버렸다. 특히 쇄신위 밖에서 제기되는 쇄신론은 엄밀히 따지면 쇄신론이 아니라 ‘인적 청산론’에 불과했다. 대선 결과에 대한 합리적 평가는 물론, 쇄신의 기준과 방향도 없었다.

당 일각에서는 특히 19명 초선 모임의 쇄신론을 ‘묻지 마 쇄신론’으로 평가하고 있다. 12월25일 성명을 통해 쇄신론을 제기한 이들이 12월28일까지 내놓은 것은 이른바 ‘살생부’가 전부였다. 대선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당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놓은 살생부에는 강금실 전 법무장관 등 당 안팎의 유력 인사들 모두가 총선 불출마 대상으로 분류됐다. 유일하게 남는 인물은 손학규 전 경기지사였다. 자연스럽게 ‘손학규 추대 모임’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초선 모임의 인적 구성도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12월25일 이들이 처음 성명을 발표했을 때, 여기에는 ‘김근태계’로 분류되는 이기우 의원도 함께 참여했다. 그런데 이틀 뒤 이 의원이 빠지고 이 자리에 김재홍, 우제창 의원이 참여했다. 초선 모임에 참여한 19명 중 절반 이상이 DY(정동영)계 의원들로 채워진 셈이다. 특히 최재천, 채수찬, 서혜석 의원 등 정동영 전 의장 쪽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이들이 초선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실을 마뜩잖게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핵심 관계자는 “(초선 모임의) 주장은 크게 틀린 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과연 이들이 직접 깃발을 들고 나올 사람들인지 의문”이라며 “이들의 주장도 지금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직접적 대안이라기보다는 당위론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가운데 당 일각에서는 DY계가 책임론을 피해가기 위해 당 쇄신위와 참여정부 핵심 인사들을 향해 ‘선제 공격’을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어찌됐든 이들 초선 모임을 중심으로 쇄신론이 불거지면서 집중적으로 표적이 된 쪽은 당 지도부와 쇄신위였다. 결과적으로 대선 패배의 1차적 책임을 떠맡아야 할 정동영 전 의장은 자신의 책임을, 다른 핵심 인사들과 ‘n분의 1’로 나누게 됐다.

쇄신위에 외부 인사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는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겉으로 내뱉는 말과 실제 속마음은 다를 수 있지만 초선 모임의 주장 자체에는 타당성이 있다”면서도 “다만 인적 청산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면 1차적으로 정동영 전 의장과 당 지도부가 책임지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반성, 목표, 대안 없는 ‘3무 쇄신’

대선 패배 직후 대통합민주신당 안에서 논의되고 있는 ‘구원투수’는 손학규 전 지사와 강금실 전 법무장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유력해 보이는 인물은 손 전 지사다. 수도권 의원들과 경선 과정에서 손 전 지사를 도왔던 쪽을 중심으로 ‘손학규 대안론’을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손 전 지사 카드에 대한 비토론도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손 전 지사가 당을 이끌게 되면 다음 총선에서 원내 1, 2, 3당 모두 한나라당 출신이 이끌게 될 가능성이 높다. 손 전 지사가 과연 신당의 쇄신과 개혁을 대변해줄 수 있는 인물이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김근태 전 의장 쪽 핵심 관계자는 “531만여 표라는 엄청난 차이로 졌으면 그에 맞게 혁신적 변화를 꾀해야 한다”며 “인물이 없다면 키워서라도 그러한 변화를 상징할 수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없고, 상대방을 향한 손가락질은 난무하고 있다. 쇄신해야 한다면서 정작 자신들이 왜 졌는지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혁신의 구체적인 목표도 없다. 쇄신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없으니 내놓는 대안도 빤하거나 아예 없다. 대통합민주신당의 ‘3무 쇄신’ 모습이다. 신당의 쇄신 결과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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