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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호텔 파티장에서 야학을 떠올리다

등록 2008-01-04 00:00 수정 2020-05-03 04:25

30년 전 금호동·약수동 일대에서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했던 ‘시정의 배움터’

▣ 김갑수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2007년 가을 신라호텔 특별고객 초대파티에 갔다. 내 행색을 아는 사람이 들으면 웬일이야, 하며 ‘깜짝’ 놀랄 일이겠지만 사실이다. 강의를 나가던 최고위 과정 대학원 학생의 강청으로 그런 자리에도 섞여본 것이다. 내 옆자리에 당일 파트너 격으로 앉은 여성은 진짜로 국내 굴지 재벌회장의 사모님이었다. 평소 알던 여성들과 눈코귀입 어디 하나 다른 점은 없었고, 실은 매우 우아하고 상냥했다. 식전 기도를 지나치게 길게 한다는 점 빼고는. 식사 뒤 호텔 야외 라운지에서 지휘자 금난새씨 일행의 공연이 펼쳐졌다. 흥겨운 로시니 음악을 들으며 널찍하게 펼쳐진 호텔 경내와 그 바깥을 내다봤다. 뒤편으로 저 멀리 변해버린 약수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가슴이 뻐근해져왔다. 아, 약수동 그리고 그 너머 금호동. 그곳이 내게는 특별한 기억의 장소였던 것이다.

△1970년대 말은 야학의 전성기였다. 대학생들이 ‘강학’으로, 공단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들이 ‘학생’으로 배움의 꿈, 변혁의 꿈을 키웠다. 1980년대 ‘노학연대’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1988년 한 야학연합 행사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어우러져 춤추고 있다. (사진/한겨레)

“광야에서 왔어요” “저는 들불입니다”

대학 시절에 신라호텔을 자주 다녔다. 근처 약수동 산동네에서 야학을 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웬일이야, 할 텐데 분명히 사실이다. 주말이나 일요일, 비교적 일찍 모이는 날이면 교사, 학생들이 소풍 삼아 스터디물을 챙겨들고 호텔 로비에 막무가내로 들어가 앉았다. 몇몇은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거나 휴지, 비누, 수건 등을 챙기고 같은 책으로 스터디를 했다. 당연히 호텔 안 모든 사람의 주시를 받았지만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때 중년의 호텔 매니저가 참 점잖았다. 몇 차례 협박도 했지만 대개는 통사정이었다. “이러는 기분은 알겠는데, 제발 내 입장도 봐달라”고. 무언가 터질 듯한 기분으로 그 화려하고 찬란한 로비에서 버티다가 바깥으로 나오면 일행 모두가 우하하하 미친 듯이 악쓰며 웃고 언덕배기를 뛰어달리곤 했다.

어느새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버린 옛 풍경이다. 그때는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야학의 전성기였다. 1980년대 초반 서울 시내에 있는 야학 수가 200개가 넘는다고 했다. 장소는 대부분 공장지대 인근의 교회 교육관 같은 곳을 빌려서 했다. 여러 야학이 모이는 기회가 있으면 야학 이름으로 소속을 밝히곤 했는데 이런 식이다. “저어… 광야에서 왔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들불입니다.” 내가 속한 야학 이름은 ‘시정의 배움터’였는데 교가도 있었고 대표를 희한하게 교주라고 불렀다. 한신대, 서울대, 인하대, 서강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동국대, 연세대, 고려대, 경희대, 성균관대… 그러고 보니 참 여러 대학 출신이 잡탕으로 모였던 연합야학이다.

야학은 무엇을 하는 곳이었나. 지금 대학생이라면 어쩌면 제재소 뽕나무에 아이들이 매달려 ‘배워야 산다’를 외치던, 채영신과 박동혁이 연애하던 일제하 ‘상록수’ 같은 야간 한글 강습소를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하긴 1970~80년대에도 초·중등 학과 과정을 가르치던 야학이 존재했다. 경찰서나 사회복지시설 같은 곳에서 맡아 했는데 우리는 그런 곳을 ‘검야’라고 불렀다. ‘검정고시 야학’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야학은 1970~80년대에만 존재했던 전혀 다른 성격의 공간을 의미한다.

유신체제가 등장한 뒤, 많은 대학생들이 학교 바깥으로 쫓겨났다. 징역 살고 나서 학교로 되돌아갈 길도 없었지만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기성취’라는 단어가 그때에는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수가 ‘사회과학출판사’라고 따로 부르던 운동권 출판물에 한 다리 걸치면서 온통 생각은 ‘유신 타도’에만 골몰했다. 학생운동이 사회혁명의 기지라고 생각하던 때의 풍조였다. 그때 일부가 노동자에게 눈을 돌렸다. ‘노학연대’의 개념은 1980년대 들어 형성되지만, 70년대 야학운동가들이 선각자였던 셈이다.

가 필독서

이같이 새로 생겨나는 야학을 일컬어 ‘노야’와 ‘생야’라고 불렀다. 노동야학과 생활야학의 줄임말이다. 노조, 그러니까 조직 근로자의 가능성이 많은 공단 지역을 대상으로는 당연히 노동야학이 설립됐고, 그 외 빈민 거주지 등에는 생활야학이 들어섰다. 사실 ‘제품집’이라 부르던 소규모 봉제공장 등에서 노동야학을 일으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바람이 노동 운동가가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습 내용은 워낙 야학마다 교사마다 자의적이어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근로기준법 등 법규를 읽기 위해 한자 공부가 강조됐다. 또 ‘강학’이라고 부르던 야학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피억압자의 교육학)와 이반 일리치의 를 숙독하는 것이 필수였다. 모두 남미의 혁명적 교육이론을 담은 내용이다.

나는 공교롭고도 우연하게 야학을 통해 한국 사회운동의 변화를 체험하게 됐다. 1978년 금호동 ㅊ교회를 빌려 세워진 시정의 배움터는 소박한 의미의 생활야학이었다. 인근 산동네에 사는 공원들이 대상이었다. 대개 초등학교 3~4학년 정도를 다니다가 공장에 취업한 이들이었다. 야학생활 4년 동안 초등학교 졸업자는 한 명도 못 보았다. 그 때문인지 영어에 대한 갈망이 학생들에게 아주 컸다. 지금 떠올려보면 도대체 무얼 가르쳤는지 모르겠다. 그저 교사끼리 날마다 무지하게 술을 마셨다는 것과 한시도 쉬지 않고 말싸움에 가까운 토론을 벌였다는 것만 생각난다. 그러다 결국 교회에서 쫓겨났다. 술과 담배 때문이었다. 예배당과 벽 하나를 둔 교사실에서 목청이 터져라 운동가를 부르고 담배 연기를 예배실로 모락모락 피워 넣으니 목사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1979년 10월27일로 예정된 2기 졸업식을 앞두고 연극을 한참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 전날인 26일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어버렸다. ‘수학 선생’ 역이었던 나의 첫 연극 데뷔 무대는 김재규 덕분에 무산되고 말았다. 1980년 접어들어 시정의 배움터는 약수동 형제교회에서 재건됐다. 그런데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만다.

통상 1970년대 학생운동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라고 부른다. 비하의 의미다. 실제로도 소박했다. 1980년 광주를 거치고 그해 늦가을 ‘무림사건’에 이어 ‘학림사건’이 터지면서 운동은 혁명으로 변한다. 국가를 ‘총자본’이자 ‘적’으로 규정하는 레닌이즘이 사상적 배경이고 행동강령이었다.

수배·연행·투옥으로 이어진 험한 세월

재건된 시정의 배움터에 서울대 한우리 멤버들과 연세대 쪽이 합세하면서 험한 세월이 시작된다. 대상 학생은 청계피복 노동자들로 바뀌고, 스터디 내용도 근본적으로 바뀐다. 그리고 기수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수배와 연행, 투옥이 이어진다. 그 안에는 너무나 많은 눈물과 분노, 참담한 절망과 고통, 차라리 죽고만 싶었던 격정이 담겨 있다. 나는 차마 그 시간들의 증언자가 될 수 없다. 지금도 대부분 경기도 부평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때 그들, 자격 있는 사람이 말을 해야 한다.

시정의 배움터에서는 대학생 교사와 노동자 학생이 결혼한 커플이 모두 다섯 쌍이 나왔다. 신부 한 명은 목매어 자살했지만 나머지는 그럭저럭 잘 산다. 세상은 변해버렸고 우리는 이제 모두 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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