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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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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제도는 어떤가

등록 2007-11-30 00:00 수정 2020-05-03 04:25

기쁨과 보람을 빼앗는 현재 시스템, 환자를 많이 봐야 하는 강박 벗어나는 방법 고민해야

▣ 고병수 연세의원 원장·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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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가 당뇨, 고혈압을 앓고 계셨는데 자꾸 쓰러지셨다. 나는 의과대학 1학년생이었지만, 의대 다니는 아들이 함께 병원에 가면 덜 불안해하실 것 같아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시던 병원에 갔다. 중소 규모의 병원이어서 그런지 환자도 많고 대기 시간도 길었다. 30분쯤 기다렸을까. 아버지 이름이 호출되고 드디어 담당 의사의 진료가 시작됐다. 의사는 빠른 말로 여러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단지 당뇨약을 줄인다는 말과 가끔 병원에 와서 혈당을 재보라는 말만 기억되었다. 아버지가 왜 자꾸 쓰러지시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못 알아들었다.

의대생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당뇨 합병증으로 생기는 ‘저혈당’ 증세였던 것 같다. 당이 너무 떨어지면 어지럽고 가끔 가벼운 졸도도 하게 된다. 저혈당 증세는 잘못 관리하면 합병증으로 인해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당뇨 환자를 다룰 때는 혈당 조절보다 합병증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가 교과서에 나온다. 아버지는 이런 점들을 하나도 모른 채 그저 병원만 왔다갔다 하셨던 것이다. 의대 다니는 아들도 못 알아들었는데 오죽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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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때는 한밤중에도 환자들의 불편에 대한 연락을 시도 때도 없이 받게 된다. 그럴 때면 병실로 가서 환자를 진찰하고 면담한 뒤 ‘오더’(order)나 필요한 투약 지시를 내리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후배 전공의들이 전화로 간호사에게 오더만 내리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하루 수면시간 3~4시간, 며칠씩 이어지는 밤 근무로 늘 부족한 잠과 싸움하는 것은 알지만 그런 후배들을 보면 불같이 화를 내며 병동으로 쫓아 보내곤 했다.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서는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 더욱이 절대 환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련 시절에는 지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병원의 의사 수도 부족하고 환자와 교감을 나눌 시간도 부족하기에 수련 시절부터 환자와 충분한 대화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과정을 밟아온 건 아닐까 하는 회의도 든다.

개원해서 동네 주민들과 같이 지낸 지 7년이 넘었다. 나는 진료를 하면서 되도록 환자의 불편함을 다 듣고 최대한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러기까지는 환자를 바라보는 의사로서의 의식과 관련한 몇 가지 경험이 있었다.

몇 년 전 일로 기억된다. 기침을 보름 이상 한다고 찾아온 20대 여성이 있었다. 다른 병원에 다니다가 왔기에 약을 처방할 테니 잘 복용하라고 일러주고는 잊고 있었는데 한 달 정도 지나서 그 여성이 다시 찾아왔다. 무척 화난 표정이었다. 기침이 안 나아서 대학병원에 갔더니 ‘폐결핵’이라고 했단다.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되돌아봤다. 환절기 감기가 크게 유행할 때였다. 환자가 많아 문진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고, 청진에서 폐 상태가 정상 소견을 보이기에 감기가 오래가는 걸로 생각했다. 좀더 시간을 들여 얘기를 나눴거나 의심을 해봤다면 X-레이만 찍어도 진단할 수 있는 문제였다. 바쁜 와중에 환자의 호소를 일일이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는 건 변명일 뿐이다. 만성 기침을 하면 반드시 기관지 결핵을 의심해보면서 진찰을 하는 게 기본 상식이다. 나는 시간을 핑계로 기본조차 무시해버렸던 것이다.

대화 부족 현상은 나이 드신 분들께 적용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어르신들의 경우엔 자신의 병에 대한 관리 요령이나 약 복용 방법을 잘못 알아듣는 일도 많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더 큰 위험을 야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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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부담 없이 세세한 이야기 나눈다

진료 현장에서 가끔 생각해본다. 무엇이 문제인가?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적은 시간에 환자를 너무 많이 봐야 하는 게 문제다. 전공의든 개원의든 대학병원 교수든 진료실에서 몇 마디로 진료를 끝내고 싶은 의사들은 사실 별로 없다. 진료 내용을 상대방이 잘 알아듣도록 하고 병의 경과가 좋아지는 걸 지켜보는 것은 의사들에게 진료 기술 이상의 기쁨이고 보람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에서는 이런 게 불가능하다. 만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외래 진료를 볼 때 환자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눈다면 두 가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진료실 밖 대기자들의 불만이 폭발하거나, 환자가 너무 없어서 충분한 대화는 할지 몰라도 석 달 안에 병원 문을 닫거나.

미국에서 조사한 바로는 일반 내과계 외래 진료실에서 평균 진료시간은 26분 정도다. 우리나라 병원이 그렇게 못하는 이유는 빨리빨리 환자를 봐야 하고, 그래야만 진료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치졸하다고 쉽게 여기지 말자. 현실이 그렇다. 환자의 얘기를 많이 듣고 설명도 충분히 할 수는 없을까? 물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주치의제도(주치의등록제)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런데 의사들도 거의가 필요성을 느끼는 이 좋은 제도가 실행이 안 된다.

영국에 갔을 때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선배의 딸은 5살이었는데 웬만하면 병원에 가는 일이 1년에 두세 번이라고 한다. 열이 아무리 펄펄 나도 전화로 상담하고, 해열제 먹이고 하루 이틀 견디게 하며, 기침을 조금 하는 정도로는 그냥 지낸다. 의사가 병원에 오지 말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가벼운 증상들은 큰 문제가 없는 한 잘 낫기 때문에 집에서 관리한다고 했다. 이러한 영국의 주치의 제도가 다 훌륭한 것만은 아니다. 정해진 비용으로 진료를 하니까 충분한 진료와 검사가 안 이뤄져 국민의 불만이 크다고 한다. 2007년 초부터는 인센티브제를 적용해 필요한 검사나 시술에 대해서는 수당을 더 주도록 했다고 한다. 단점을 보완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영국 환자들의 불만이 다소 덜어질 듯하다.

주치의제도는 주로 1차 진료소(동네병원)에서 적용된다. 상상을 해보자. 어느 지역에 세 명의 의사가 진료소를 차렸다. 의사 한 명당 300가구를 담당하면 900가구를 책임지게 된다. 주치의를 관리하는 기구(상급단체)에서 일정액씩 월급 형식으로 진료행위에 대한 ‘적절한 대가’를 주기 때문에 의사들은 환자를 많이 봐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적절한 대가란 현실성 있는 금액 수준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제까지 이 제도를 선뜻 적용하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가 이 금액을 정부 재정에서 만드는 게 쉽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환자 또는 환자의 가족은 주치의와 세세한 부분도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전화 상담도 하고, 인터넷 상담도 가능하다. 필요하면 진료소에서 진찰을 받거나 검사를 한다. 이후 상황에 대한 설명도 계속 들을 수 있다. 물론 본인 부담은 없다. 진료소에는 여러 명의 의사와 직원들이 상주할 수도 있다. 한밤중에도, 휴가철에도, 명절 때도 언제든지 상담이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꿈같은 얘기가 아니다. 환자 수가 줄고, 약제비·검사비가 엄청나게 줄어드니 국가 의료비 지출이 줄어든다. 줄어든 재정에 국가 지원을 조금만 더 보태면 진료소 운영비는 거뜬히 나온다. 환자는 예방과 적절한 치료를 경험하고, 의사도 만족할 수 있다. 정부는 국가적으로 보건 인프라를 공고히 하면서도 재정을 그다지 축내지 않을 수 있다.

의료비 지출 줄인 데 지원 조금 보태면

병은 약으로만 낫는 게 아니다. 자기 병에 대해 충분히 알고 의사와 교감을 할 때 치유도 잘되는 법이다. 의사는 환자의 집안 분위기는 어떤지, 가족 문제는 없는지 세세히 살펴가면서 진료를 할 수 있다. 이제는 정말 정부나 의료인들이 생각을 합쳐서 주치의제도와 같은 새로운 의료체계 방안을 적극 내놓을 때라고 본다. 장벽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는 것 또한 정책 입안자들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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