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군 약속’ 어긴 한국 정부, 에르빌 상황은 악화되는데 국익은 어디로?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정부가 지난해 한 약속과 다른 제안을 드리게 된 점에 관해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23일 이라크 북부 에르빌에 주둔하고 있는 자이툰 부대의 ‘임무 종결 시기’와 관련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철군 약속’을 어기게 된 데 대해 그는 이런 설명을 내놨다.
“지금은 6자회담이 성공적 결실을 맺어가는 국면에 있으며, 남북 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고,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협력도 논의되고 있다. 이 모두가 미국의 참여와 협력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운 일들이다.” 노 대통령은 이어 “그 어느 때보다 한-미 간의 긴밀한 공조가 절실한 시점”이라며 몸을 낮췄다. 처연한 일이다.
자이툰 부대 주둔 지역 ‘일촉즉발’
자이툰 부대 1200여 장병이 주둔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가 심상찮다. 쿠르드노동당(PKK)의 오랜 무장투쟁에 속을 끓여온 터키 정부가 마침내 ‘거사’를 도모하기 시작한 탓이다. 지난 10월17일 터키 의회는 자국군이 앞으로 1년 동안 이라크 국경을 넘어 쿠르드노동당 게릴라 소탕작전을 벌일 수 있도록 승인했다. 쿠르드노동당은 지난 1984년부터 터키 남동부 이라크 국경지역을 무대로 분리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벌여왔다. 현재 이라크 북부지역엔 약 3천명의 쿠르드노동당 게릴라가 은신한 채 국경을 넘나들며 무장저항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키 의회의 결정이 나온 다음날 터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라크 최북단 다후크의 거리에선 5천여 명의 주민들이 몰려나와 대규모 항의시위를 벌였다. 자이툰 부대의 주둔지인 쿠르디스탄의 수도 에르빌에서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시민들 수천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터키 정부를 비판하는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상황은 빠른 속도로 긴장감을 더하는 모양새다.
현지 상황에 대한 엇갈린 보도 속에, 터키 반관영 는 10월24일 “터키 공군이 이라크 국경지대에 있는 쿠르드노동당 게릴라 은신처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고 보도했다. “국경지대 디야르바키르의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터키 전투기들이 국경을 따라 게릴라 은신처를 폭격했으며, 이날 작전엔 공격용 헬리콥터도 투입됐다”는 게다. 이에 앞서 지난 10월21일엔 쿠르드노동당 게릴라들의 기습작전으로 터키군 12명이 목숨을 잃고, 8명이 ‘실종’되기도 했다.
“전투기를 동원한 공습이 아니라, 국경지역에서 게릴라 은신처를 겨냥해 포격을 했을 뿐이다.” 〈AP통신〉은 터키 정부 당국자의 말을 따 ‘공습설’의 무게를 낮췄지만, 터키군이 이미 이라크 내부에서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도 떠돌고 있다. 아랍 위성방송 는 10월25일 인터넷판에서 터키군 관계자 등의 말을 따 “터키군 전투기가 국경을 20km 가량 넘어 이라크 영공에서 작전을 벌였으며, 약 300명의 지상군 병력도 지난 사흘 동안 약 10km 가량 이라크 영토로 진입해 들어갔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쿠르드노동당 소속 게릴라 34명이 교전 중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터키 정부 “쿠르드노동당 지도부 넘기라”
“이라크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하지만, 터키 정부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 땅이 테러 목적에 사용되는 것을 더이상 용인하지 않겠다.” 압둘라 굴 터키 대통령의 성난 목소리가 아니어도 이라크 북부의 분위기는 이미 일촉즉발이다. 그럼에도 이라크 정부로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현지 인터넷 매체 는 지난 10월22일 압둘 카디르 우베이디 국방장관의 말을 따 “현재로선 다국적군의 허가없이 이라크 중앙정부가 북부 (쿠르드) 지역으로 군병력을 보낼 수 없다”며 “이라크의 안전을 지킬 책임은 다국적군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쿠르드 자치정부 역시 곤혹스런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이란·터키·시리아 국경지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을 통합해 단일 쿠르디스탄 건설을 ‘숙원’으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위기에 처한 ‘형제’를 외면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반면 광범위한 자치 속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온 이라크 쿠르드족 입장에선 터키군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부른 쿠르드노동당을 두고 볼 수만도 없는 처지다. 여기에 외부의 압박도 만만찮다. 터키 정부는 공개적으로 쿠르드노동당 지도부의 신병을 넘기라고 요구하고 있고, 미국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고 못하는 상황 속에 자치정부 내부에서도 이견이 불거지고 있다. 아랍권 일간 는 10월24일 “쿠르드노동당 지도부의 신병을 넘기라는 터키의 요구를 놓고 쿠르드 정치권이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마수드 바르자니 자치정부 대통령은 협력을 거부하자는 쪽이지만, 일부에선 쿠르드노동당 지도부를 넘기는 것이 쿠르드 자치정부의 안위에 도움이 된다고 맞서고 있다”고 전했다. 자칫 쿠르드민주당(KDP)와 쿠르드애국동맹(PUK)로 갈려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던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는 상황이다. 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에 위태롭게 머물고 있는 자이툰 부대가 아득하기만 하다.
파병과 ‘국익’을 말하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셈은 지독히 간단하다. 이라크 파병에도 한-미 동맹은 참여정부 내내 여러차례 파열음을 내왔다. 주한미군 기지이전과 전략적 유연성,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 등 한-미 동맹 재편 과정에서 정부는 “줄 건 다주고, 욕은 욕대로 먹는다”는 쓴소리를 쉴 새 없이 들어야 했다. 북핵 문제는 냉온탕을 오가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대북정책의 근본을 뒤집으면서 숨통이 트였다. 악화일로를 치닫는 이라크 상황과 그에 따른 지난해 중간선거 참패가 분수령이었다. 이를 ‘파병 효과’로 내세우는 건 차라리 우스개다.
‘미국이 어떻게 받아들까’ 눈치만?
미리부터 공언했던 ‘전후 재건 특수’는 우리 기업의 이라크 진출을 정부가 가로막고 나서면서 사실상 공염불이 됐다. 자이툰 부대 주둔지인 에르빌에서조차 ‘드림시티’니 ‘엠파이어 월드’니 하는 대규모 재개발 프로젝트가 이어졌지만, 초기 참여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꼴이다. 반미정서가 대세인 아랍·이슬람권에서 ‘파병국가 한국’의 이미지가 나아졌을리 없다는 건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다. 쿠르드의 석유자원 확보를 말하지만, 북부 유전의 심장부 키르쿠크의 쿠르디스탄 귀속 문제와 중앙-자치정부 간 석유이권 배분을 둘러싼 분란이 매듭지어지기 전까진 ‘김칫국’일 뿐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라크가 안정을 되찾아 본격적인 재건·복구와 석유자원 개발에 나설 것으로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체 뭘 근거로 파병이 가져온 ‘국익’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이라크 파병 문제를 파병 그 자체로만 따져본 적은 단 한반도 없었다.” 청와대 출신 한 안보 전문가는 “미국은 자국의 국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에서 원칙에 따라 행동해왔지만, 우리 정부는 모든 문제를 ‘미국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중심에 놓고 판단해왔다”며 “이런 사고방식이 남아 있는 한 파병과 국익의 함수를 푸는 실타래는 풀기 어려울 것”이라고 꼬집었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파병논쟁, 우리 스스로 쳐놓은 ‘동맹의 덫’에서 언제까지 허덕일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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