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이 두렵지 않다는 이명박 쪽의 ‘이중 플레이’… 미 연방법원의 송환 판결로 대선 전 한국으로 와야
▣ 특별취재반
2007년 10월18일(현지시각), 미 연방 제9순회항소법원에서는 아주 짧은 판결이 있었다. 캐롤라인 제이콥스 판사는 항소인 김경준의 신청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항소인의 자발적 항소포기 신청을 받아들인다. 본안의 항소건은 기각됐다. 본안과 관련해 제출된 모든 신청 또한 일괄적으로 기각한다.”
이 내용이 전부다. 이 짧은 판결문은, 그러나 한국에서는 거대한 태풍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둘러싼 ‘BBK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경준 전 BBK투자자문사 대표의 한국 송환을 법적으로 확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태풍이 몰아치게 만들지도 모를 로스앤젤레스의 나비 날갯짓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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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8일 미국 법원의 판결로 김경준씨가 오는 12월19일 대선 전에 한국으로 송환된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법원의 송환 결정 판결문과 이명박 후보가 ‘BBK 사건’과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거 중 하나로 거론되는 BBK 투자자문사 브로슈어.
로스앤젤레스의 나비 날갯짓
이날 재판부가 받아들인 것은 김경준씨가 한국 송환을 거부하며 낸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 관련 재판에 대한 자발적 항소포기 신청이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2003년 5월27일,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은 미국 베버리힐스의 320만달러짜리 대저택에 있던 김경준씨를 전격적으로 체포한다. 한국 검찰이 주가조작 혐의로 김경준씨를 상대로 발부한 체포영장에 근거해, 김경준씨의 신병을 인도해달라는 한국 검찰의 요청을 미국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 구치소에 갇힌 김경준씨는 법원에 인신보호 요청(구속의 적법성에 대한 이의제기)을 한다. 자신을 상대로 미국 현지에서 진행되는 민사재판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국 송환을 막아달라는 취지였다. 미 연방법원은 2005년 10월21일과 2007년 1월18일 두 번에 걸쳐 이 신청을 기각했다. 김경준씨는 미국 법에 따라 한 번 더 항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김씨는 그 항소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고, 미국 연방법원은 이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김경준씨가 이 시점에서 한국행을 택한 것은 이명박 후보의 차기 대통령 당선이 유력한 상황에서, 대선 전에 자신에 대한 검찰의 수사와 재판을 시작해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법정 생활 20년에 이런 신청은 처음”
그러나 한나라당은 김경준씨의 이런 의도를 의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김씨가 3년이 넘게 한국행 송환을 거부하면서 송환 판결에 항소 중이다가 대선에 임박해 갑작스럽게 항소를 취하하고 귀국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야말로 여권의 정치 공작 때문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나 대변인은 “그가 갑자기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한 것은 한국 내 형사처벌에 관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도 가능케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작 의심스러운 것은 이명박 후보 쪽의 행보였다. 이명박 후보는 김경준씨의 항소포기 신청이 등의 보도로 알려진 이후 인터뷰와 문화방송 에서 “김씨가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명박 후보를 대리해 미국 현지에서 김경준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 중인 법정대리인 김백준 전 서울메트로(옛 서울시지하철공사) 감사는 10월9일 김경준씨의 송환을 연기해달라는 신청서(motion)를 미 연방법원에 제출했다. 김경준씨의 송환을 90일간 연기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대선이 끝나는 시점까지 김씨의 송환을 연기해달라는 뜻인 셈이다. 김경준씨 쪽의 게일 이벤스 변호사가 그 다음날(10월10일) ‘김백준씨는 미국 연방정부와 김경준씨가 당사자로 있는 송환 관련 재판에 제3자일 뿐이라는 취지로 신청을 기각해달라’는 반대 신청서를 내자, 김백준씨는 아예 자신을 당사자로 인정해달라는 개입신청서(Motion to Intervene)까지 냈다. 10월12일의 일이다. 게일 이벤스 변호사는 “법정 생활 20년에 이런 신청은 처음 본다”며 황당해했다.
이를 둘러싸고 정치권에서 ‘의도적인 지연작전’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한나라당은 공세적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판사 출신의 나경원 대변인은 “김경준씨에 대해서는 미국 현지에서 송환 재판과 별도로 자본금 횡령으로 인한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 민사소송에서 당사자 본인신문(deposition)이 10월1일부터 진행 중이었는데, 김경준씨 쪽 변호인의 신문이 3일간 진행된 후 원고 쪽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진행되다 중단됐다”며 “원고 쪽 변호사는 중단된 반대신문의 완료를 위하여 필요 최소한 범위에서의 귀국 연기를 송환재판부에 요청한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법원의 정당한 법률적 절차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고 부당한 정치 공세일 뿐이란 게 나 대변인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김경준씨 쪽 주장은 달랐다. 김경준씨 쪽의 심원섭 변호사는 “본인 신문은 닷새간 진행됐고, 피고 쪽과 원고 쪽 변호인이 각각 이틀 반씩을 진행해 신문 절차는 모두 끝났다”고 밝혔다. 역시 미국 변호사 출신인 서혜석 대통합민주신당 의원도 “전산망을 통해 공개된 본인신문의 전문을 읽어보면 양쪽 변호사가 이틀 반씩 신문을 마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거들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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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한나라당 쪽 일부에서는 미국 현지의 변호인들이 민사소송에서의 승리에 집착해 이명박 후보는 물론, 대리인인 김백준씨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자체적으로 진행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명박 후보가 보고를 받고 화를 냈다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로스앤젤레스 현지의 한 한국계 변호사는 이를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종류의 긴급신청을 작성하고 제출할 때는 평소보다 2배 정도의 수임료를 받는데, 그런 ‘비싼’ 결정을 의뢰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변호인이 자체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었다. 김백준씨의 재판에 참여하고 있는 변호인들은 시간당 수임료가 500~600달러에 이르는 로펌(법무법인)의 대표변호사들이 대부분이다(상자기사 참조).
9월부터 지연작전 시작?
이명박 후보 쪽의 김백준씨가 지난 9월부터 한 조처들을 살펴보면, 김경준씨의 귀국을 늦추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서혜석 의원은 10월16일 이 과정을 추적한 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월1일 있었던 김경준씨의 증인신문은 애초 8월27일에 하도록 되어 있었다. 김경준씨는 지난 8월9일 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김경준씨는 8월22일에는 이명박 후보의 처남 김재정씨와 큰형 이상은씨가 대주주로 있는 다스와의 민사소송에서 승리한다. 이명박 후보의 대리인 김백준씨는 그 직후 다스 소송 패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자신이 진행하고 있던 LKe뱅크(이명박과 김경준이 공동으로 대표이사를 맡았음) 투자금 반환소송의 변호사를 ‘림, 루거 앤드 김’과 ‘리, 홍, 디저먼, 강 앤드 시마다카’에서 김재수 변호사로 변경한다. 새로 선임된 김재수 변호사는 9월3일 김경준씨 쪽 변호사와 법정에 “본안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니, 신문 날짜를 3주간 연장해달라”고 요구한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신문은 한 달 이상이 늦춰졌다.
그런데 “패소 때문에 변호사를 바꿨다”는 설명 역시 앞뒤가 맞아 보이지 않는다. 김경준씨에게 다스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로펌인 ‘림, 루거 앤드 김’이 다스의 항소심을 계속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패소한 변호인은 그대로 두고, 이를 핑계로 다른 재판의 변호인을 바꾼 것이다.
이런 ‘지연작전’에도 불구하고, 미 연방법원이 김경준씨를 한국으로 송환하기로 판결함에 따라 김씨의 귀국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대선 딱 두 달 전 판결, 절묘한 시점
한-미 범조인인도협정에 따라, 연방법원의 판결일(10월18일)로부터 2개월 이내에 김경준씨는 서울로 송환되어야 한다. 이 시한을 넘기면, 상대국이 처벌 의지가 없다고 보고 범죄인을 보석으로 석방하도록 되어 있다. 공교로운 것인지, 절묘한 것인지 김경준씨의 송환 시한은 대선(12월19일) 바로 전날이다.
김경준씨의 존재는 이번 대선에서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할 수 있다. 상자가 열리고 그 마지막에 남은 ‘희망’이 이명박 후보의 것이 될지, 아니면 다른 후보의 것이 될지는 그 상자에서 쏟아져나올 진실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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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쪽이 미국 현지에서 김경준씨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민사소송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현지의 변호인단 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3개의 로펌(법무법인)에서, 10명이 넘는 대형 변호사들이 투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경준씨를 상대로 치열한 법률전을 벌여온 셈인데, 막대한 변호사비는 어떻게 동원되고 있는지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김경준씨를 상대로 이명박 후보 쪽이 직·간접적으로 벌이고 있는 민사소송은 2개다. 이명박 후보는 법정대리인 김백준 전 서울메트로 감사를 통해 LKe뱅크 투자금 35억원과 자본금 65억원 등 모두 100억원을 되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명박 후보의 처남과 큰형이 대주주로 있는 다스(옛 대부기공)는 김경준씨가 대표로 있던 BBK에 투자한 돈 190억원을 되돌려달라고 소송을 하고 있다.
이 두 소송은 ‘리, 홍, 디저먼, 강 앤드 시마다카’(리·홍)와 ‘림·루거 앤드 김’(림·루거)이란 현지의 로펌이 맡고 있었다. 이들 로펌은 변호사 수만 20명에 가까운 중견 로펌이다. 그런데 지난 8월22일 다스 소송에서 김경준씨 쪽에 패소하자, 김백준씨는 이들을 빼고 현지의 ‘김재수 합동법률사무소’를 LKe뱅크 소송의 공식변호인(attorney of record)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리·홍은 이 소송의 법률고문(associate counsel)으로 계속 활동하고 있다.
김백준씨가 제기한 김경준씨의 송환 연기 신청은 ‘리·홍’에서 대행했다. 김백준씨가 이 신청에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리·홍에서 동원한 변호인단 수만 봐도 알 수 있다. 리·홍에 이름을 내건 대표변호사(partner) 중 사이먼 홍, 데이비드 디저먼 그리고 래리 시마다카 등 대표변호사만 3명이 참여하고 있다. 일반변호사(associate)도 마크 폴크너, 빅토리아 화이트 변호사 등 2명이 지원하고 있다.
다스 쪽의 소송에도 변호사들은 대거 동원됐다. 소송을 대리한 림·루거의 대표변호사인 존 림과 크리스토퍼 김이 직접 소송을 맡았고, 실제 심리가 열리는 날이면 크리스토퍼 김 변호사와 일반 변호사인 필 그렌트와 리사 양 등 3명이 재판정에 출두한다고 한다.
문제는 막대한 변호사비다. 로스앤젤레스 현지의 변호사들에게 문의한 결과, 중견 로펌의 대표변호사는 시간당 500~700달러를, 일반 변호사는 시간당 200~300달러 정도를 수임료로 받는다. 미국 변호사들은 법정에 제출할 기록을 법률적으로 검토하는 시간부터 문서 작성 시간, 그리고 법정에 출두해 변론을 하는 시간을 모두 비용으로 청구한다.
김경준씨 쪽은 막대한 변호사 비용 때문에 심원섭 변호사 한 명에게 모든 소송을 맡기고 있고, 송환재판의 경우는 국선변호인의 지원을 받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현지의 한 변호사는 “다스 재판에만 그간 300만달러가 넘는 소송비용이 들어갔다는 말이 있다”며 “3개의 로펌을 동시에 동원하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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