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10일 ‘사실상 사형폐지 국가’가 된 한국…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희생자 가족들
▣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27년 전의 한 사형수가 연단에 섰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장 바로 앞까지 갔던 그는 “저는 불행 중에도 (사형 집행이 유예되고 무죄가 선고된) 행운을 얻은 사람이지만 저와 제 가족이 겪은 고통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 사형수는 이후 대통령이 됐고, 그가 대통령이 된 1998년부터 한국 사회에선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사형 집행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제 인권단체 앰네스티는 법적으로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10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 나라를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간주한다. 우리나라도 12월30일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면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된다. 2007년 10월10일, 한국언론회관에 모인 그때 그 사형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등 200여 명은 대한민국이 ‘사실상 사형폐지 국가’가 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선포했다.
밧줄이 목을 휘감을 때의 공포
생각해보면 긴 시간이었다. 국내에서 사형제 폐지와 관련된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을 맡고 있던 이병민 변호사와 이해영 목사가 ‘사형제도는 인간 존엄성을 위협’한다는 취지의 강연을 한 것이 시초다. 이듬해인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된 지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에 대한 소명운동이 벌어지면서 사형제 폐지 운동이 점화됐다.
틀거지를 갖춘 것은 1989년. 앰네스티가 사형 폐지의 해를 정해서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사형 폐지 운동을 시작하면서다. 국내에도 사형폐지운동협의회가 결성됐고, 앰네스티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사형제 폐지 운동이 일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15·16·17대 국회에서 사형 폐지 법안이 연달아 제출됐고,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사형제 폐지와 관련한 의견을 내면서 사형제 폐지가 제도화의 길을 걷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박명희씨는 “사형제도라고 하면 찬반이 너무 명확하게 갈려 오히려 문제에 대한 편견 없는 접근이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사형수 체험 행사다. 10월9일 저녁 8시께 청계천 앞 빈 의자에 앉은 회사원 양계숙(39)씨는 허둥대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활동가들이 까만 천으로 눈을 가리고 까슬까슬하고 단단한 질감의 밧줄로 목을 휘감았다. 행사를 기획한 국제앰네스티는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3일뿐이라면 무엇을 하겠냐”고 물었다. 양씨는 “밧줄이 금방이라도 당겨질 것 같은 불안과 공포를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3일이 남는다면 미워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고 했다. 처음엔 장난스런 마음으로 자리에 앉은 대학생 이인진(24)씨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옆에서 사형수 독백을 읽어주니 가슴이 답답해져왔다”고 말했다. 많은 경우 이성보다 몸의 기억이 더 생생한 법이다.
“또다른 죽음이 늘어나는 것 뿐이죠”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사형제 폐지 운동은 정치범, 양심수 같은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살인’이라는 관점에서 다뤄져왔다. 그 추세는 최근 들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조성애 수녀는 ‘사형수들의 대모’로 불린다. 그는 1977년부터 사형수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88년부터는 매주 화요일 구치소로 사형수들을 만나러 다닌다. 그는 “생명은 양심수뿐 아니라 ‘흉악범’들에게도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수도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죄지은 사람은 다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안타까운 일이죠.” 조성애 수녀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는 사형수 ‘시몬’은 “우리의 일이지만 주장을 할 수 없기에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방관자도 못 된다”고 말했다.
사형수들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은 사형수들에게 희생된 가족들이다. 이영우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장은 올해 초부터 피해자 가족 모임을 꾸려왔다. 매달 다섯 명의 살인 피해자 가족들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토해내고 이야기하는 자리로, 이 모임에는 고정원(65)씨도 함께한다. 고씨는 지난 2003년 10월9일 팔순 노모, 육십대 아내 그리고 4대 독자 아들까지 세 명의 가족을 유영철씨에게 잃었다.
“걔(유영철)를 죽인다고 내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고씨는 말을 이어갔다. “또 다른 죽음이 하나 늘어나는 것일 뿐이죠.” 그는 정부에 사형제 폐지 탄원서를 올렸고, 유영철을 양자로 삼았다.
미국은 살인 피해자를 둔 가족의 모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가족이 함께 모여 치유의 여행을 떠나는 ‘희망여행’ 같은 프로그램이 있다. 여행을 기획한 것은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화해를 위한 살인피해자 유가족 모임’이라는 시민단체다. 고정원씨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올해 희망여행에 참가하기 위해 10월11일 오후 2시 미국 텍사스주로 떠났다. 고씨는 “아직도 아비규환 같은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이번 희망여행을 통해서 용서의 의미도, 또 같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 상처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정권이 걱정이다
조성애 수녀는 “대구 교도소에서 사형 현장을 참관한 일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10년 전, 12월23일이었다. 그날 집에 와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이들이 떠나가던 그날, 사과 궤짝 한 개에 가득 들어 있던 편지들을 다 태워 없애버렸죠. 그때는 연인을 잃어버린 사람이 편지를 다 태우듯 내 안에서 슬픔과 분노의 마음이 컸다.” 조 수녀는 “이번에 꼭 사형제도가 폐지됐으면 좋겠는데, 다음 정권이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전세계 133개 국가가 법률상 또는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다. 사형 존치국은 겨우 66개국이다. 10월10일 사형제 폐지 선포식에서 워릭 모리스 영국대사는 “세계 전반적인 경향이 사형 폐지 쪽으로 흐르고 있다”며 “한국 정부가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 지위를 얻게 된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남은 것은 대한민국 법 조문에서 사형제를 없애는 것이다. 2007년 10월 현재, 사형을 선고받고 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6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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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국내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사형이 대거 집행돼왔다. 가장 최근에는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12월23일 23명이 사형을 당했다. 오는 12월30일까지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 된다지만 제도화되지 않은 이상, 어떤 철학을 가진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사형수들은 언제든 ‘사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은 현재까지 대통령선거 출마가 확정된 두 명의 후보에게 사형제 폐지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두 후보는 완전히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사형제도는 범죄 예방이라는 국가적 의무를 감안할 때 유지돼야 한다”며 사형제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혔다. 다만 “사형제를 선고할 수 있는 죄목이 지나치게 많은 점은 형법 개정을 통해 고쳐야 한다”며 “극형 선고는 인명 살상이나 반인류적 범죄 등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확연히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권 후보는 “(사형제도는) 폐지해야 마땅하다. 더 늦기 전에 17대 국회에서 사형제 폐지 특별법이 처리될 수 있도록 민주노동당이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고은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장은 “두 정권에 걸쳐서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2000년 사형 폐지 운동 흐름에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라며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도 사형제 폐지를 지지한다는 공식 의견을 낸만큼 이 기조가 차기 정권에서도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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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다 요시히로(60) 일본사형폐지운동협회 회장은 일본에서 사형제 폐지 운동을 20여 년째 이끌어오고 있다. 10월10일 열린 ‘사형제폐지국가 선포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네 번째 방문한 그는 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올해 사형 판결이 지난해보다 세 배로 늘었고 집행 건수도 10건이다”라며 “사형제 폐지가 대세인 세계적 흐름과 거꾸로 가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변호사인 그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검찰의 강경한 분위기다. “일본은 검찰이 법원이 선고한 형보다 높은 형을 부과하겠다며 상고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그런데 2000년 이후 검찰이 다섯 차례나 무기징역 대신 사형을 내리겠다고 상고했다.” 여기에 지난 9월25일 하토야마 구니오 일본 법무성 장관이 “컨베이어벨트처럼 자동적으로 사형이 집행돼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일본 정부의 강경한 분위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야스다는 “사형제 폐지는 풍요로운 문화의 산물인데 일본은 너무 기계적으로 사형을 인식하고, 이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관용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야스다가 처음 사형폐지 운동에 뛰어든 건 1980년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때다. 당시 그는 신주쿠에서 일어난 버스 방화 사건 변호를 맡았다. 거의 모든 언론에서 ‘무지막지한 흉악범’으로 보도된 살인범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밖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어머니는 얼굴도 모르며 아버지는 도망갔다. 성인이 된 뒤 결혼했지만 아내는 정신병에 걸렸다. ‘복지’라는 개념조차 몰라 사각지대에 내몰려 있던 그는 흉악범이라기보다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세상이 말하는 것과 실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형제 폐지 운동에 몸담아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됐다.”
야스다는 현재 1999년 23살 주부와 11살 어린이를 살해한 사람의 변호를 맡고 있다. 1·2심에서 모두 무기징역형 판결이 났으나 검찰이 불복해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다. 이 범죄자를 변호하고 있는 야스다에게는 하루에도 100건 이상 ‘야스다를 죽여라’는 메일이 온다. 야스다는 “좋은 살인, 나쁜 살인은 따로 없다. 그걸 나누는 것만큼 애매모호한 기준이 없는데 일본 사회는 아직 이걸 몰라 안타깝다”며 “한국이라도 먼저 사형제를 폐지해 그 평화의 기운이 일본에까지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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