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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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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작전으로 몸부림 치다

등록 2007-10-12 00:00 수정 2020-05-03 04:25

파업이 일상이 된 듯 생활고·무관심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투쟁 방식 바꿔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점거 농성 중인 매장 입구를 용접해 감금하고, 매장 주차장에 쳐놓은 천막을 뺏고 찢고, 이 과정에서 코뼈가 부러지고, 귀가 찢어지고, 바닥에 내던져지고…. 100여 일째에 접어들고 있는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사태는 매장 점거농성, 강제해산, 재점거 농성이 이어지고, 폭력과 연행이 뒤따르고 있다. 파업은 장기전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다. 회사 쪽은 이제 파업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있고, 노동부는 사실상 중재 노력을 포기한 상태이고, 이런 국면에서 노동자들은 10월 들어 새로운 투쟁 방식을 계획하고 있다.

회사 쪽, “매출 타격 크지 않다”

이랜드 쪽은 파업 100여 일 동안 1천억원 정도의 매출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회사 쪽은 “점거농성과 불매운동에도 불구하고 추석을 전후로 매출 타격이 크지 않다”며 “초기에는 점거농성 때문에 타격이 컸으나 그 뒤로 매장을 옮겨다니면서 집회를 여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파업 참가 동력도 떨어지면서 매출에 주는 영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밝혔다.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진데다 강제해산이 되풀이되면서 이제 노동자들은 이랜드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습 점거와 봉쇄투쟁을 연일 되풀이하고 있다. 노동조합 쪽은 “바깥에서 매장을 에워싸는 봉쇄투쟁 방식에서 탈피해 매장 안에서 갑자기 게릴라식으로 집회를 열고 빠지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출에 가하는 타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생활비 떨어진 ‘노’ vs 여유 있는 ‘사’

회사 쪽은 추석이 지나면서 파업 대오가 급속히 흐트러지거나 노조가 무너질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대다수가 여성 비정규직인 조합원들은 오랜 싸움에 많이 지쳐 있다. 회사 쪽은 “초기에 파업 참가자가 홈에버는 700여 명, 뉴코아까지 포함하면 1500여 명 정도였으나 지금은 파업 참가 인원이 200∼300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회사 쪽에 유리하다는 것일까? 김호진 뉴코아노조 부위원장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해왔는데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노조를 탈퇴하거나 회사에 복귀한 사람도 꽤 된다”고 말했다. 이랜드 노동조합이 최근 생계비 지급 대상자(파업 참가자)를 살펴보니 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파업 기간에 민주노총에서 모금한 돈을 1인당 50만원씩 나눠 생계비로 한 번 받았을 뿐이다. 사실 여기저기 파업 장소를 옮기면서 쓰는 차비와 밥값만 해도 50만원이 넘는다. 회사 쪽은 파업이 길어지면서 먹고사는 문제에 당장 곤란을 겪고 있는 이랜드 파업 노동자 상당수가 현재 파업에 참가하지도 않고 출근하지도 않은 채 복귀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외롭고 고단한 싸움은 견뎌낼 수 있으나, 파업 노동자를 가장 괴롭히는 건 생활비도 떨어지고 먹고살기 힘든 때이다.

뉴코아 쪽의 경우 추석 직전에 극적인 타결 분위기까지 갔으나 다시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홈에버와 뉴코아 쪽의 쟁점과 요구 내용은 꽤 차이가 있다. 뉴코아의 경우, 회사 쪽은 “외주용역화를 중단하고, 이미 외주화된 82명을 원직 복직시키겠다. 다만 10개월 뒤에 실시하겠다”는 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호진 부위원장은 “외주화 철회를 단체협약에 넣자는 것이 노조의 요구인데, 회사 쪽은 공증각서를 쓰는 것으로 대신하자고 버티고 있다”며 “외주화를 철회한다면 이미 전환 배치된, 수년간 계약을 반복 갱신하며 일해온 비정규직을 단계적으로 정규직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 쪽은 외주화로 회사를 떠난 노동자들의 고용과 관련해 구체적인 약속은 하지 않은 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모호한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물론 노동조합은 “외주화 철회 방침을 과연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런 불신은 지난 14년간 이어져온 이랜드 노사 갈등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홈에버 쪽은 근속기간 18개월 이하인 비정규직 처리 문제가 핵심이다. 회사 쪽은 “18개월 이상 근속한 비정규직은 고용을 보장하되, 6개월 이상∼18개월 이하 근속한 비정규직은 업무평가를 거쳐 개별적으로 계약 해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랜드일반노조 장석주 위원장직무대행은 “18개월 이상 근무자에 대한 고용 보장은 파업 이전부터 단협에 이미 명시돼 있던 것이다. 우리는 3개월 이상 근무자의 고용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며 “6개월이든 몇 개월이든 회사 쪽이 선별해 마음대로 고용 보장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파업에서 복귀한 사람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참회기도를 하라고 요구하는 회사 쪽의 태도에 비춰볼 때 파업 참가자 중 나중에 선별적으로 고용을 보장받는 노동자는 거의 없게 될 것이란 얘기다.

노동부는 “이제 노조가 더 많은 양보안을 제시할 때”라며 별다른 중재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노동부 송봉근 노사정책국장은 “한때 해결 국면으로 들어갔는데, 노동조합이 계속 새로운 요구를 꺼내면서 사태가 꼬이고 있다. 외주화 등 비정규직 법안의 문제점으로 거론돼온 부분은 회사 쪽이 양보해 철회했다”며 “이번 사태가 비정규직 대량 해고에 대한 경각심은 충분히 불러일으켰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노조가 파업을 철회하고 사태가 해결돼야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비판 여론도 잠잠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견디다 못한 매장주들, 누구 편으로?

이랜드 쪽은 홈에버 문제와 뉴코아 문제를 분리 대응하면서 한쪽을 먼저 타결지은 뒤 다른 한쪽을 압박하겠다는 전략을 펴고 있다. 지난 9월 “불매 투쟁을 접으면 교섭에 나서겠다”는 회사 쪽 제안에 대해 뉴코아노조 쪽은 교섭에 나섰고, 이랜드일반노조(홈에버) 쪽은 교섭을 거부했다. 그 뒤로 홈에버 쪽과 뉴코아 쪽은 각각 독자적으로 이랜드와 교섭을 벌이고 있다. 공동투쟁이 흐트러지고 만 것이다. 이런 양상이 나타나자 이랜드일반노조는 (주)이랜드와 이랜드월드 등 다른 계열사의 노사 문제까지 이번 사태의 이슈로 끌어올려 일괄 타결을 요구하고 있다. 회사 쪽의 노동자 분열 전략을 차단하고, 이참에 이랜드의 노사관계 전체를 바꾸겠다는 생각인 셈이다. 흔히 파업이 장기화하면 상급단체나 노·사·정 3자 채널을 통해 중재·교섭이 이뤄지기 마련인데, 이번 사태는 노동자들의 고용이 직접 걸린 문제라서 제3자가 타협안을 만들기 어려운 점도 있다.

장기파업의 경우 고소·고발과 해고·징계가 나중에 핵심 쟁점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번 사태도 마찬가지다. 김호진 부위원장은 “고소·고발이나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와 관련해 노동조합은 합의 시점에 모두 끝내자는 반면, 회사 쪽은 개인 고소·고발은 취하할 수 있어도 노조와 민주노총 건은 취하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며 “노동조합이 ‘임금 동결 등 고통을 분담할 용의가 있다’고 제시했는데 회사 쪽은 ‘파업 참가자 모두를 징계 대상으로 하되 징계자 수는 회사가 알아서 판단하겠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싸움은 홈에버와 뉴코아에 입점해 있는 매장주들을 누구 편으로 끌어들이느냐가 꼭짓점을 따는 승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랜드와 불평등한 관계로 묶여 있는 협력업체와 입점주들은 민주노총을 항의 방문해 불매운동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장석주 직무대행은 “입점주들이 매출 타격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랜드를 떠나는 상황이 닥치면 회사 쪽이 버틸 수 없게 될 것”이라며 “칼자루를 쥐고 있는 회사에 의해 매장주들이 동원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같은 피해자들인 매장 점주들을 노동조합 쪽으로 끌어들여 함께 싸울 수 있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이랜드 여성 비정규직 대다수는 “아줌마가 무슨 파업이냐? 당장 그만둬라”거나 “내가 다 먹여살릴 테니 그 따위 일자리 그만둬”라고 호통치는 남편들을 뚫고 꿋꿋하게 싸우고 있다. 장석주 직무대행은 “이랜드 기업이 쓰러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회사가 동원한 구사대 폭력을 숱하게 겪어서 그런지 ‘이랜드가 너무 미워졌다’고 말하는 파업 노동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어느 노동자는 “유통업은 회사가 망해도 제조업에 비해 고용 불안이 상대적으로 적다. 다른 유통자본이 인수하기 때문이다. 이랜드보다 더 나빠지겠느냐? 더 밑질 게 없다고 생각하고 싸우는 노동자도 여럿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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