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화학반응이라는 것은 ‘사랑’의 종말일까
▣ 임옥희 편집주간 okidoki00@naver.com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는 98%까지 같다고 한다. 털북숭이 원숭이에서 ‘털없는 원숭이’로 진화한 것이 인간이라는 설명은 유전자 지도의 발견으로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다. 뇌과학에 따르면 유전자 코드의 2% 차이가 현재와 같은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낸 셈이다.
‘하자’고 말하는 여자, ‘해’라고 말하는 남자
여자와 남자의 유전자 코드는 99% 이상이 같다. 그렇다면 유전자 지도상 1% 미만의 차이가 현재와 같은 가부장제적 사회를 만든 ‘결정적’ 계기일 수 있는가. 남녀의 차이는 태어날 때부터 뇌 속에 내장되어 있는가. 사랑은 널리 이기적인 유전자를 전파하라는 ‘뇌의 지령’에 따른 것인가. 뇌, 그대야말로 정녕 내 운명인가. 이런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의 열쇠가 ‘신’이 아니라 호두알처럼 쭈글쭈글한 뇌 속의 유전자가 쥐고 있다면, 인간의 자부심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해질까?
의 지은이이자 신경정신분석학자인 루안 브리젠딘은 여자와 남자의 99% 차이를 만드는 1%의 비밀을 여자의 뇌와 남자의 뇌에서 찾는다. 흔히 자녀를 키워본 어머니들은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무기 삼아 남녀의 차이를 주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녀를 평등하게 키우려고 여자아이에게는 건담을 주고 남자 아이에게 인형을 주더라도, 결국 여자 아이는 건담을 인형처럼 품에 안고 엄마 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본성 대 양육, 천성 대 환경과 같은 이항대립에서 생물학적인 결정론을 피하려고 좌파 여성주의자들은 교육과 환경의 영향을 끊임없이 주장해왔음에도, 뇌과학의 연구결과는 생물학적인 프로그램을 입증해주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과학적 사실이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고 반박하겠는가.
여자는 관계를 중시하고, 남자는 경쟁을 즐긴다. 관계를 중시하는 여자는 가능한 갈등을 피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반면 남자는 공격적이고 툭하면 주먹이 먼저 나간다. 여자는 상호응시를 통해 타인을 관찰하는 데 예민하다. 여자는 六感(육감, 여섯 번째 감각)인 肉感(육감)을 통해 표정언어를 읽어내는 데 탁월하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뇌과학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남자와 여자의 성별언어(genderlect)가 다르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관계를 중시하는 여자 아이들은 ‘하자’라고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남자아이들은 ‘해’라고 명령을 내리는 형식으로 윽박지른다.
K가 바이브레이터를 포기한 이유
여자의 뇌와 남자의 뇌가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은 어떤 호르몬이 분배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뇌과학 이론의 주장이다. 활동 중인 뇌에 침입하지 않고서도 실험이 가능한 MRI(자기공명영상), fMRI(기능자기공명영상)와 같은 테크놀로지를 통해 뇌과학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 결과 여자를 여자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분비에 의해, 남자를 남자답게 해주는 것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뇌의 희노애락에 관한 로드맵을 보면, 성적인 쾌감은 뇌의 특정부위의 자극에 따른 것이다. 30대 후반의 이혼녀인 K는 바이브레이터를 샀다. 그녀에 따르면 바이브레이터의 기능은 인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남녀가 사랑을 할 때면 내 자세, 내 속옷, 내 화장이 유혹적인지 아닌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만족을 못하더라도 남자의 자존심을 배려하여 오르가즘에 도달한 것처럼 연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계는 인간보다 성능도 탁월하고 눈치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기계에 만족하다 보면 인간과 관계하는 것이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녀는 비록 성능은 떨어지더라도 남자에게 만족을 구하려고 재혼을 고려 중이다. 성교를 통해 어렵게 쾌를 얻는 것이 아니라 뇌의 특정부위만 자극해주면 손쉽게 쾌를 얻을 수 있다면, 도착과 정상의 구분은 모호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그야말로 화학 반응인가? 무수히 많은 드라마들은 사랑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꽃, 촛불, 와인, 보석, 무드 등을 동원한다. 짐과 질이 사랑에 빠져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뇌에 일어난 반응을 실험한다고 가정해보자. 사랑의 감정은 질의 시상하부에서 일어난 애정 호르몬인 프로락틴과 옥시토신의 분비결과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면 짐은 “아니 내 사랑이 겨우 호르몬의 효과에 불과한 가짜란 말인가? 당신의 사랑이 뇌가 분비한 화학물질이라고?” 따질 수 있다. 이에 대해 질은 “아니, 그 반대지. 뇌의 화학작용이 증명하다시피, 내 사랑이야말로 진짜라는 거잖아”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이처럼 뇌의 화학작용이 예술, 양심, 유머, 자유의지까지 스캔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인간의 행동 자체가 뇌가 분비하도록 자극하는 특정 호르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과다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성추행범의 경우,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을 주입함으로써 성욕과 공격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의 미려처럼 여자들이 성형의 고통과 눈물을 선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테드 창의 단편소설인 에서처럼 라식과 흡사한 스펙스 시술은 모든 여성들을 하나같이 날씬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 든 남성의 발기불능은 비아그라로 해결하면 그만이다.
성호르몬들이 마음대로 이동한다면
그러나 이런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일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성불능, 성범죄를 야기하게 만든 사회적, 상징적, 심리적 요인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뇌의 책임으로 돌리면 오죽 간단하겠는가. 여성주의자들은 아동성추행범, 가정폭력범, 전쟁도발 정치가들에게 에스트로겐을 왕창 처방하고 싶겠지만, 그럴 경우 그들의 인권 문제는 차지하더라도 그런 범죄를 산출한 사회계급적, 인종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게다가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모호해질 것이고, 그렇다면 남성의 뇌, 여성의 뇌라는 것이 과연 엄격하게 구분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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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은 종족보존 본능으로 주어져 있는가? 뇌과학에 따르면 모성은 과격한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지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여성의 뇌는 임신, 출산을 경험하면서 ‘엄마의 뇌’로 변한다. 자신의 뱃속에 품었다가 세상에 내놓는 외계인에 의해 자기 뇌를 강탈당하고 모성의 뇌로 변화를 경험하는 셈이다. 물론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아이와의 접촉으로 인한 방대한 옥시토신 분비에 힘입어 사회적인 모성이 형성될 수 있다. 사회적 모성 또한 결국은 엄마의 뇌로 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아빠의 뇌’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가? 멜로드라마의 공식에 따르면 임신한 여자는 입덧 한 번 심하게 하고, 그것이 남자를 부릴 수 있는 호기가 된다. 남자는 한밤중에라도 뱃속의 아이가 먹고 싶다는 순대, 떡볶기 등을 사러 나간다. 잠이 덜 깬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한 가득 머금고. 이처럼 남자들이 갑자기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남자의 뇌가 아빠의 뇌로 변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심리학자인 트리도우언은 아빠 뇌로의 변화를 ‘쿠바드 증후군’(couvade syndrome)으로 불렀다. 이런 증상을 경험하는 남성은 심지어 입덧까지 한다. 엄마의 뇌와 유사하게 아빠의 뇌에서도 양육과 젖샘을 자극하는 호르몬인 프롤락틴 수치는 상승하고 성욕을 자극하는 테스토스테론 분비는 낮아진다.
엄마 뇌, 아빠 뇌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로봇기계가 인간이라고 보았던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사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전자가 종족 보존에 그처럼 맹목적이라면, 간단하게 자가 복제 방향으로 진화하면 그만일 터인데, 구태여 남녀 생식기관을 통한 원시적인 태생 복제를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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