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에 대체복무제 도입… 맨 처음 이 보도한 뒤의 역사, 앞으로 열릴 ‘가보면 갈 만한 길’
▣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그들도 믿지를 않았다. 여호와의 증인조차도 믿지를 않았다. 대체복무를 입법 추진한다는 2007년의 국방부 발표가 아니라 2001년의 취재 요청에 대해 그들은 “우려가 많았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전과가 있었던 탓이다. “당신들의 고통을 사실대로 알리겠다”고 접근했다가 결국엔 그들의 진심을 왜곡한 언론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디에 호소할 방법도 없었다. 이렇게 법은 처벌했고, 언론은 외면했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의 폭력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보도 뒤 많은 판사들 최소 형량 선고
이번엔 기자조차 믿기지 않았다. 그들의 증언과 자료가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한 해에 500명 이상씩 50년 가까이 감옥에 갇혀온 통계에 기가 막혔다. 거짓으로 생각되진 않았지만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국방부에 확인을 요청하자 “1999년 통계로 현역 군인 중 집총 거부자가 10명”이라는 역시나 믿기지 않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 한국의 여호와의 증인이 당시만 8만 명을 넘었는데 현재 수감된 병역거부자가 10명이라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사회가 ‘병역거부’를 권리로 생각해보지 않았을 테니 국방부도 병역거부자 통계조차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21세기의 한반도는 이렇게 때때로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병역거부권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유엔이 보장한 보편적 인권이었지만, 이 땅에서 병역거부는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아버지에서 아들까지, 때때로 손자까지 대를 이어 감옥에 가는 고통은 21세기가 돼서야 겨우 세상에 알려졌다. 345호(2001년 2월15일치) 기사<u>‘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u>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그렇게 한반도에 ‘데뷔’시켰다.
병역거부는 세상에 데뷔하자 스캔들에 휩싸였다. 병역거부가 아니라 병역기피다, 너희가 양심적이면 우리는 비양심적이냐,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국가안보가 무너진다, 이단의 교리가 무슨 권리냐.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여러분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비롯한 기독교계의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들은 국가에 도전하지 않았으나 국가는 그들의 행위를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평화주의 전통이 사실상 부재한 한국 기독교계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병역거부자들은 국가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종교적 양심에 따른 행위라고, 길어도 좋으니 대체복무의 길을 달라고 요청했다. 잠시 희망도 보였다. 2001년 6월 당시 민주당 소속 장영달, 천정배 의원을 중심으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취지의 병역법 개정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추진은 교회의 압력에 막혔다. 예정된 국회 공청회는 기독계의 반발로 결국엔 무산됐다. 그래도 세상은 그들의 처참한 고통에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군사법정에서 기계적인 3년형을 선고받는 현실을 그대로 방치하기엔 한국의 혹은 사법부의 ‘양심’이 찔렸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는 갔지만, 박정희의 유산은 21세기에도 그들을 괴롭혔다. 징집률 100% 달성을 위해서 시작된 박정희 시대의 강제징집 조치로 그들은 여전히 군대로 들어가 재판을 받고 있었다. 항명죄의 법정 최고형인 3년형을 받았다. 군대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입대하지 않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의 보도로 그들의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에누리’ 없이 3년형을 받는 현실이 조금은 바뀌었다. 그들은 이제 군사법정이 아닌 민간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대부분의 판사들이 재징집을 피할 수 있는 최소 형량인 1년6개월을 선고했다.
병역기피와의 구분을 거부한 한국 사회
2001년 12월17일, 눈발이 휘날리던 오후에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으로 최초로 평화운동가이자 불교신자인 오태양씨가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걱정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1만 배를 하겠다던 청년은 수감 생활을 마치고 이제는 인도에서 긴급구호 활동에 여념이 없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오태양씨의 첫걸음부터 김치수씨의 마지막 선언까지 30여 명의 비여호와의 증인 병역거부자가 평화적 신념에 따라 감옥으로 걸어갔다(2007년 9월27일 현재). 이들을 포함해 병역거부 공론화 이후에 어느새 4천여 명이 감옥에 수감됐다.
2002년 벽두에 하나의 판결이 병역거부자들에게 희망을 던졌다. 지금은 대법관이 된 당시 서울남부지방법원 박시환 판사가 그해 1월29일 병역거부자 이경수씨의 변호인이 제출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받아들여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판사의 보석 결정으로 서울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됐던 이경수씨가 감옥문을 나왔다. 이렇게 양심의 자유가 자유를 얻을 길이 열렸다. 2002년 2월에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연대회의)가 결성돼 병역거부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연대회의는 제58차 유엔인권위원회에 참가하며 전세계 병역거부 수감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의 현실을 국내외에 알렸다. 민주화운동, 정권 교체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아시아 인권국가로 발전해온 한국에 병역거부는 인권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해외의 인권운동가들은 1천 명이 넘는 한국의 병역거부 수감자 수에 놀랐다. 전세계 36개국이 대체복무제를 인정하는 현실에서 한국은 예외적 존재였다. 한국만큼 민주화가 진척되거나 경제가 발전한 나라에서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병역거부자가 극소수인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마지막 한 명까지 추적하는 강력한 징집제가 작동하고, 기독교 인구가 많아서 10만 명 가까운 여호와의 증인이 존재하는 한국은 병역거부자 양산의 불행한 접점이다. 더구나 안보 논리와 국가주의가 절대선으로 통하는 사회다. 그토록 유구한 세월에 저토록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혀왔지만, 한국 사회는 병역거부를 병역기피와 구분하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병역거부권이 제기되자 특권층의 병역기피가 파괴한 징집의 형평성 문제를 병역거부자에게 고스란히 적용했다. 은 병역거부권이 사회 의제로 떠올랐던 2001년 한국과 안보 상황이 유사한 대만을 방문해 취재했다. 대만은 2000년 국민당, 민진당 여야의 찬성으로 대체복무제를 도입했다. 한때는 병역거부자를 13년씩 감옥에 가두던 가혹한 대만의 변화였다. 하지만 대체복무제 도입 이후 대만에서 병역거부자가 늘어난 통계는 없다. 같은 해 터키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나온 질문도 받았다. 터키에서 열린 병역거부 국제회의에 참석한 평화운동가들은 되물었다. “학생운동이 그토록 강력했던 80년대 한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가 없었단 말인가?”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토록 지배와 저항을 막론하고 한반도의 국가주의는 강력했다.
2004년 절망적인 대법원 판결
2002년이 희망의 해였다면, 2004년은 절망의 해였다.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심판을 미루는 사이에 젊은 판사가 소신에 따른 판결을 내렸다. 2004년 5월21일 서울남부지방법원 이정렬 판사가 병역거부자 3명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정신적 기본권’인 양심의 자유가 우선한다는 판결이었다.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가 충돌할 경우에 국가가 대체복무를 통해서 충돌을 조화할 의무를 가진다는 의미였다.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는 헌법 19조가 법전에서 석방돼 법정에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무죄판결로 더 이상 사법부 상급기관은 병역거부에 대한 판결을 미루기 어렵게 되었다.
마침내 2004년 7월15일 대법원이 판결을 내렸다. 병역거부권이 공론화된 이후에 최초의 대법원 판결이었다. 스코어는 참담했다. 단 1명의 대법관만이 무죄의 입장에 섰다. 그래도 12명의 대법관 중에 절반인 6명이 대체복무제 입법을 권고한 것이 절반의 희망이었다.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헌재도 미루고 미루던 판결을 내렸다. 역시나 7 대 2로 병역법 88조 1항 합헌판결이었다. 그래도 대체복무제 입법 권고의 스코어는 역전이었다. 7 대 2로, 다수의 헌법재판관이 대체복무 도입을 국회에 권고했다. 비록 사법부 판결에 대한 기대는 꺾였지만, 대체복무제 입법은 현실적 근거를 얻었다. 그래도 입법의 기약은 없었다.
그리하여 2004년은 입법의 해였다. 2001년의 임종인 변호사는 2004년의 임종인 의원이 돼 있었다. 2001년 변호사 시절에 군사법정에서 민선변호사 최초로 병역거부자 변론을 맡았던 임종인씨가 국회의원에 당선돼 2004년 9월 병역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현역의 1.5배로 대체복무 기간을 정한 법이다. 2004년 10월 노회찬 의원도 비슷한 취지의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60년 만의 공청회도 열렸다. 2005년 3월17일 국회 국방위는 병역법 개정안 공청회를 열었다. 마침내 병역법 개정안을 논의하는 자리에 국방대학원 교수, 한나라당 의원도 참석했다. 병역거부자들에게 개최만으로도 감개무량한 공청회였으나 국방부와 한나라당은 여전히 시기상조론을 주장했다. 마침내 인권위원회도 나섰다. 인권위는 2005년 12월 병역거부권 인정과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했다. 하지만 개정안은 그 뒤로 오랫동안 소강상태에 빠졌다. 국가주의에 반하고, 기독교계를 자극하는 개정안을 적극 나서서 추진하는 의원은 많지 않았다. 인권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국방부도 움직임을 보였다. 2006년 4월에는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 검토를 포함한 국방부 ‘대체복무제도 연구위원회’가 구성됐으나 성과 없이 해산했다. 이어서 국방부는 올해 7월 사회복무제 도입안을 발표했으나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도입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수십 개의 나라가 이미 거쳐갔던 길
그리고 2007년 9월18일 국방부가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를 담은 ‘병역이행 관련 소수자의 사회복무제 편입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이렇게 반세기 감옥에 갇혔던 양심의 한 발은 감옥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직은 한 발 뿐이다. 불투명한 입법 일정이 남았기 때문이다. 국방부의 방안이 입법으로 실현돼야 완전한 두 발의 자유를 얻는다. 이제 대체복무제 도입, 그것은 사회적 약속이고 한국의 양심이 달린 문제가 되었다.
양심의 자유를 사회적 의제로 경험하지 못했던 한국 사회에서 병역거부는 낯선 문제였다. 그래서 그것은 공포였다. 그것은 무지였다. 무지에서 나온 공포였다. 한국 사회가 병역거부에 대해서 가졌던 거부감은 모르는 상황에서 나오는 공포였다. ‘징병제가 무너질지 모른다, 여호와의 증인이 늘어날지 우려된다.’ 하지만 지구촌 현실에서 우려는 기우로 그쳤다. 더구나 그것은 가보지 않은 길이 아니다. 이미 전세계 수십 개 나라가 가본 길이다. 경험으로 위험하지 않다고 증명된 길이다.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를 도입해서 거부자가 급격히 늘어나거나 징병제가 무너진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대체복무제를 도입했다 폐지한 나라도 없었다. 그것은 인류가 경험한 인권으로 통하는 길이다. 분단의 서독도, 전시의 미국도 병역거부권을 인정했다. 대만은 벌써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 기간을 33개월에서 26개월로 줄였다. 이렇게 가보면 갈 만한 길이다. 우리도 이제야 그 길에 들어섰다. 2001년엔 병역거부자를 10명이라고 밝혔던 국방부도 2007년엔 “전과자를 양산하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국방부의 진심을 믿는다. 불신 지옥, 믿음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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