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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탕 논문 집단발굴 사건!

등록 2007-10-05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또 하나의 ‘표절 불감증’이었을 전남대 박 교수 사건, ‘패거리 문화’와 겹치며 폭로전으로</font>

▣ 광주=글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최근 한 국립대 교수의 논문이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재탕’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같은 논문’으로 두 차례 연구비도 지원받았다. 문제의 당사자는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박아무개(50) 교수. 박 교수는 지난해 9월 한국동북아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진흥재단 등재 학술지 에 논문 ‘동북아 협력의 모색과 21세기 한국 민족주의를 위한 제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2004년 한국외대 교내 학술지 에 실린 ‘21세기 열린 사회와 민족주의의 장래’와 약 4쪽 분량(두 개의 장 해당)을 제외하고 내용이 같았다.

거의 같은 논문으로 1천만원 기금 타내

보통 교내 학술지에 실은 논문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혹은 학문적으로 재평가받으려고 권위 있는 등재 학술지에 다시 게재하기도 한다. 이때에는 ‘어디에 실렸던 내용’이라거나 ‘발췌한 내용’임을 각주로 표시해야 한다. 그러나 박 교수는 전체 14쪽 분량에서 4쪽 분량을 제외하고 이전에 썼던 것과 내용이 같은 논문을 게재하면서 각주 처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의 논문은 1천만원의 기금(공동연구자 6명에게 나눠서 지급)을 받고 작성된 논문이다.

박 교수의 비슷한 논문과 저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98년 2월 발간된 라는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이때 쓴 내용은 1998년 10월부터 1999년 10월까지 1년간 학술연구진흥재단으로부터 1300만원의 연구비를 받고 작성한 논문에서 고스란히 ‘부활’한다. 그리고 이 1999년의 논문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2006년 의 논문 등에도 동일하게 등장했다.

한국동북아학회는 9월 초 박 교수 논문의 중복 게재 제보를 받고 연구윤리위원회를 조직해 문제가 되는 논문과 저서를 모두 검토했다. 김수희 연구윤리위원회 위원장(조선대 교수)은 “다섯 개의 논문 결론이 다 똑같다”라며 “개념이 확장되거나 발전된 소지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오수열 학회장(조선대 교수)은 “같은 논문이 다섯 번이나 반복된 일은 학회가 생긴 이래 처음”이라며 “논문을 검토한 교수들이 모두 황당해했다”라고 말했다. 한국동북아학회는 9월 말 박 교수의 논문 게재 취소 결정을 내린 상태다. 10월 초 이를 공식적으로 문서화할 것이라고 한다.

박 교수는 자신의 논문 재탕 의혹에 대해 “내 것이고 내 개념이기 때문에 그냥 가져다 썼다”며 “각주 처리만 했으면 될 것을 세심하게 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논문은 (연구자의) 개념이 확장·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998년에 나온 책과 1999년 학술진흥재단 논문에 대해서는 “논문을 먼저 쓰고 책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살펴보니 책이 먼저 나오고 논문을 썼더라.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면 ‘논문 재탕’이 연구 부정 행위라는 사실에 둔감한 학계의 고질적인 관행의 하나로 끝났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 다음에 커졌다.

지역 언론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광주 지역의 주간 언론 는 마감 날인 9월7일 밤,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역 출신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의 지역 주재 비서관 김아무개씨의 전화였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인 그는 전남대 한 교수의 부탁을 받고 문상기 대표에게 “본인에게 해명의 기회를 준 뒤 기사화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비상임이사인 이상걸씨에게도 전화를 걸어 같은 요청을 했다. 같은 날 박씨의 동료 교수인 김아무개 교수 역시 문상기 대표와 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표절이라는 개념은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다”라며 “잘못 썼다가는 명예훼손감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학교도 시끄러웠다. 에 전화를 건 김아무개 교수는 9월10일 기사가 나간 뒤 전남대 사회과학대 임아무개 학장을 찾아갔다. 그가 손에 들고 간 것은 임 학장이 쓴 논문들 중 ‘재탕’이 의심되는 논문들이었다. 임 학장은 과의 전화 통화에서 “김 교수가 ‘학장님도 중복 게재한 논문이 있는데 박 교수 건이 불거지면 모두 공멸한다’며 ‘사건이 증폭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는 식의 부탁을 했다”고 밝혔다. 다른 학과 이아무개 교수도 임 학장을 찾아와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동료 교수의 논문 재탕 의혹이 불거지자, 친분 있는 교수들이 해당 단과대 학장의 논문을 문제삼아 ‘물타기’를 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아무개 교수는 이런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노 코멘트”라고만 답했다.

임 학장은 “내 경우는 이론적 배경에 해당하는 몇 페이지, 내가 직접 개발한 도표나 통계를 다시 쓰면서 각주 처리를 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라며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중복 게재’를 찾으면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의 98~99%는 비켜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임 학장은 박 교수의 논문 중복 게재 은폐 문제에 대해서는 “학교 당국에서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를 조직해 검토 중이다. 우리의 자정 능력에 맡겨달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의 논문 재탕을 둘러싼 흙탕물 싸움은 연구 윤리 차원을 넘어선다. 교수 사회의 패거리 문화와 관련이 깊다. 사건이 불거진 것은 지난 8월 신임 교수 공채가 무산되면서다. ‘재외한인 연구 분야’ 교수를 뽑는 면접에서 최종 후보자 세 명이 모두 ‘과락’ 점수를 받았다. 응시자들이 학교에 이의를 신청했고 ‘공채공정관리위원회’가 꾸려져 심사에 들어갔다. 이 위원회 관계자는 “심사위원 중 세 명의 교수가 담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재심 의견을 총장에게 냈다”고 밝혔다. 세 교수는 재외한인 연구 분야와 관련이 없는 이들이다.

응시자들은 세 교수가 면접 때 자신들의 논문에 대해 ‘과도하게’ 문제를 제기했다고 불만을 터트린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거꾸로 이 세 교수의 논문을 샅샅이 뒤졌다. 세 교수 중 한 명인 박 교수에게서 논문 재탕이 ‘발견’됐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가운데 동료 교수들이 단과대 학장의 논문 중복 게재 혐의를 찾아냈고, 이를 빌미로 ‘누구도 깨끗하지 않으니 모두 덮자’는 식으로 동료 교수 편들기를 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 결과 교수 공채는 끝내 무산됐다가 재심에 들어가고, 물고 물린 교수들의 중복된 논문들만 우후죽순 떠올랐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최종 후보자 세 사람의 논문에서 연구 부정행위가 보여 거기에 합당한 점수를 줬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지난해 사건에도 여전한 ‘규정 미비’

‘중복 게재’나 ‘자기 표절’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것이 사건을 더 꼬이게 만들었다. 지난해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의 논문 중복 게재 사실이 드러나면서 엄격한 각주 처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학계의 동의가 형성됐지만, 중복 게재 논문을 어떻게 검토하고, 적발된 논문이나 학자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지에 관한 논의는 진전되지 않았다. 9월3일 고려대는 ‘연구진실성 확보를 위한 연구윤리지침’(이하 연구윤리지침)을 마련하고 연구 부정 행위의 하나로서 중복 게재를 명시했다. 대학 중 처음으로 자체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이 연구윤리지침은 “이미 출간된 본인 논문과 주된 내용이 동일하다면 후에 출간된 본인 논문의 본문이 다소 다른 시각이나 관점을 보여주는 텍스트를 사용하거나 이미 출간된 동일한 데이터에 대한 다소 다른 분석을 포함하더라도 중복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학술지의 독자들에게 동일 논문이 다른 학술지에 출간됐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정해놓았다.

전남대 사건은 논문 재탕에 대한 교수들의 ‘불감증’, 학계의 여전한 ‘규정 미비’, 끼리끼리 밥그릇 챙기고 편 들어주는 ‘패거리주의’ 등 한국 학계의 폐단을 고루 보여준다. 다른 학교는 어떨까. 비슷한 문제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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