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주민 100만 시대, 아름다운 모자이크

등록 2007-09-21 00:00 수정 2020-05-03 04:25

수다 떠는 베트남 아줌마들, 상인회 준비하는 양꼬칫집 사장님…무시 아니면 동정, 배제 논리를 벗고 생활인을 보라

▣ 글 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코코넛주스는 지금 넣어. 아, 너무 많다. 그만, 그만.” 좁은 부엌에 사공이 4명이다. 집주인 빅리(30)는 바게트 빵을 자르고, 하나(27)는 양파를 까고, 소아(28·가명)는 호박처럼 생긴 채소 바우를 썰었다. 왕언니 황(43·가명)은 국자를 들고 냄비 속을 휘저으며 요리를 진두지휘한다. 요리 이름은 ‘닭고기 카레’. 깍둑썰기한 당근, 감자, 쇠고기가 들어가는 익히 보던 카레와는 다르다. 진한 겨자색에 닭고기가 뼈째 들어 있다. 향은 새큼하고, 국물은 묽다. 4명의 사공이 두 시간을 왔다갔다 하더니 카레 한 냄비가 완성됐다. 방에서 아기를 보던 아기엄마 둘까지 베트남 여성 6명이 부엌에 모여 앉았다. 9월5일 서울 성동구 한 다세대주택 주방에서 바게뜨 빵을 카레에 찍어먹으며 ‘아줌마들의 수다’가 시작됐다.

“아까 남편한테 전화 왔어. 왜 만날 우리 집에 사람들이 모이냐고 하더라고. 닭고기는 누구 거냐고 또 꼬치꼬치 묻네. 진짜 짠돌이야.”(빅리)

“그래도 니네 남편은 베트남 음식 먹잖아. 우리 남편은 안 먹어. 싫대.”(황)

“남편이 베트남 사람이라 다행이야. 난 한국 음식 못 먹겠더라고. 임신하니까 더 못 먹겠어.”(소아)

불법체류 여성, 담당 형사와 사랑에 빠지다

그들이 요리 재료를 사온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식료품 가게인 ‘아시안 마트’는 손님의 90%가 베트남·필리핀·버마 등 동남아시아 사람이다. 이태원 스타벅스에는 종종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다. 동대문구 광희동 벌우물길에 들어서면 몽골인들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삼삼오오 길거리에 모여 앉아 햄버거를 먹거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프란시스코 성당은 이탈리아·모로코·프랑스·캐나다 등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서 미사를 보는 ‘모자이크 성당’이다.

국내에 머무르는 이주민이 8월24일을 기준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100명 중 2명이 이주민이다. 많은 이들이 국적별로 모여 살지만 그들은 ‘한국’이란 경계를 무시로 넘나든다. 한국 경제와 한국 문화 속에서 삶을 고민한다. 그들은 언론의 주요한 관심거리인 ‘도와줘야 할 노동자’ ‘한국을 공부하러 온 (기특한) 유학생’ ‘국제결혼을 했지만 적응이 힘든 이주여성’ 범주에 속박되지 않는 생활인이다. 양꼬칫집의 조선족 상인은 손님 없는 가게에서 파리를 쫓으며 딸 자랑에 여념이 없고, 한 베트남 아줌마는 바람 피운다고 마을에 소문이 났다. 돈 모아 공부하는 게 목표인 버마 청년은 여자친구가 돈을 많이 써서 헤어졌다. 직장 상사를 씹고, 내 집 마련을 꿈꾸며 청약저축을 든다. 그리고 베트남 아줌마들은 모여서 수다를 떤다.

음식으로 시작된 베트남 아줌마들의 수다는 부부싸움 이야기로 이어졌다. 황씨가 남편을 처음 만난 곳은 12년 전이었다. 불법체류자로 잡혀간 경찰서에서였다. 남편은 황씨를 조사하던 담당 형사였다. 심문하고 심문받다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름은?” “나이는?” 미팅에서 주고받을 대화와 비슷했다. 드라마의 한 장면같이 만났던 커플은 최근 크게 다퉜다. 남편이 황씨의 한국 이름을 ‘수미’라고 지어줬는데 알고 보니 남편의 첫사랑 이름이었던 것이다.

‘남편 자랑’이라면 하나씨를 빼놓을 수 없다. “권상우, 진짜 좋아해요. 한번은 텔레비전에 나온 걸 보고 ‘진짜 멋있다’라고 말했는데, 듣고 있던 남편이 그럼 ‘권상우랑 결혼하지 그래’라며 눈을 흘겨. 질투가 난 거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하나씨의 모든 이야기는 ‘남편 자랑’으로 시작해서 ‘남편 자랑’으로 끝난다. 하나씨 남편은 증권회사 직원이다. 그의 한국 이름 ‘하나’도 남편이 근무하는 회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14개월 된 아기, 뱃속에 들어 있는 아기, 남편과 함께 네 식구가 과천에서 사는 그는 친구를 만나러 한 달에 한두 번 왕십리에 온다. “과천에는 베트남 친구, 아직 한 명도 없어요. 외로워요.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면 남편이랑 언제든 베트남에 같이 가요. 2년 동안 4번 갔다 왔어요.”

국적은 달라도 사는 모습은 고만고만

낌탐(24·가명)은 수다를 떨면서도 6개월 된 효림이 보랴, 베트남 방송 인터넷 사이트에서 드라마 보랴 정신이 없다. 젊은 엄마 낌탐은 동네 시장에서 샌들, 귀고리 등을 쇼핑하는 게 취미다. 그는 3년 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왔다. 그때 간 곳이 부산이었는데 한국인 남편과 1년 살다가 집을 나왔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서울로 와서 지금의 베트남 남편을 만났다. 베트남에 있을 때 같은 공장에 다니던 사람이다. “베트남에서는 그냥 알았는데, 한국에서 만나니 반가웠어요.” 머리가 벗겨진 것도, 아저씨 같은 것도 좋기만 했다. 낌탐의 요즘 고민은 효림이가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키우는 일이다.

이들이 처음 만난 장소는 아시안 마트다. 아시아 각 지역의 식료품을 파는 가게로 한국인 이현숙(45)씨가 운영한다. 베트남 요리에 자주 쓰이는 늑맘소스·코코넛주스·쌀국수,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즐겨 찾는 물고기 릴리시마스, 몽골 사람들의 주식인 양고기와 술 징키스·카라 등 없는 게 없다. 아시안 마트는 손님들의 고민이 오고 가는 ‘사랑방’이기도 하다. 이씨는 때론 카운슬러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베트남에서 온 아가씨 한 명이 깜짝 놀랄 말을 하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언니, 저 임신했어요.” 베트남 유부남과 연애하다가 임신까지 한 것이다.

이씨는 “국적에 관계없이 사는 건 고만고만하다”고 했다. “알면 알수록 더 그렇다. 처음에는 그저 ‘한국 와서 얼마나 적응하기 힘들까’ 측은한 마음만 있었는데, 얘기하다 보니 다 달라요. 친정에 돈 부쳐주려고 한국인 남편을 이용하는 이기적인 사람도 있고, 주머니 사정 생각 안 하고 펑펑 쓰는 아줌마도 있고, 남편을 하늘처럼 여기는 새댁도 있어요.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말로 푸는 거죠, 뭐. 이해 못할 일 하면 욕도 하죠. 어찌할까 물으면 조언도 하고.”

마트가 위치한 성동구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많다. 행정자치부 집계에 따르면 서울시 지역 가운데 베트남,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베트남 407명, 필리핀 436명으로 집계되지만, 불법체류 형태로 거주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많다. 주민들은 베트남 출신만 2천여 명 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선동수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팀장은 “마장동 등에 봉제공장 같은 게 많았는데 여성 비율이 높은 베트남 이주민들이 많이 정착하게 된 것 같다”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이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는 구로구 가리봉동, 영등포구 대림동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지역은 단연 중국 동포(조선족)의 메카다. 가리봉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중국동포타운신문의 김용필 편집국장은 “1990년대 후반 구로공단이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공장 노동자들이 살던 쪽방촌이 비었는데, 그 빈자리를 중국 동포들이 메웠다”고 말했다. 현재 구로구에 등록된 중국 동포만 1만5473명이다. 처음에 독산동, 가리봉동 곳곳에 퍼져있는 쪽방에 살던 이들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합법적 지위가 부여되자 교통이 편리한 지하철역 부근으로 ‘거주벨트’를 넓혀갔다. 가리봉동에서 대림동으로 이어지는 일대가 중국 동포 타운이다.

이림빈(38)씨는 금천구 독산동과 영등포구 대림동 두 곳에서 양꼬치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2000년 월 14만원짜리 쪽방에서 시작해 지금은 7천만원짜리 전셋집에 산다. 이 사장은 “예전에는 먹고사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잘살까 고민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포들의 이익을 대변할 상인회를 준비하고 있다. 현재 20~30여 명이 적극적으로 준비에 참여하고 있다. 상인회의 사업계획에는 양로원 건립도 있다. “독산동 어린이 놀이터에 가보면 동포 할머니, 할아버지들 밖에 없어요. 얼마나 갈 데가 없으면 거기 있겠어요. 거기서 노인분들이 돗자리 펴놓고 화투 치고, 밥도 먹고 해요. 파고다공원이나 종묘에 가서 잘 어울리지도 못하시는 것 같아요. 안타깝죠.”

쪽방에서 전세로, 점원에서 사장으로

조선족은 국내에 머무르는 이주민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쪽방에서 전세방으로 옮겨가고, 점원에서 ‘사장님’이 된 상인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이림빈 사장이 준비하는 ‘상인회’처럼 잘사는 지역을 만들기 위한 자생적인 움직임의 바탕이 된다. 하지만 불법체류자가 많다 보니 힘을 모으기가 힘들다. 재개발 소식도 의지를 꺾는다. 김용필 편집국장은 “중국 동포들이 모여 사는 가리봉동 지역이 2009년에 재개발된다. 이 지역을 구심점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던 움직임들이 힘을 잃고 있다”고 말한다.

젊은이들은 꿈을 꾼다, 성공이라는. 스무 살 때 버마에서 한국에 온 마웅(29·가명)은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였다. 5년을 악착같이 벌어서 필리핀으로 경영학석사(MBA) 과정 유학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 돼버렸다.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예기치 않은 일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마웅은 1999년 한국에 온 이래 직장을 9번 옮겼다. 카펫공장, 가구공장, 열쇠공장, 변압기 제조업체, 휴대전화 줄 제조업체, 비닐장갑 공장. 지금은 큰 공장이나 아파트 단지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어떤 곳은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또 어떤 곳은 월급을 안 줘서 그만뒀죠. 갑자기 단속이 뜨면 일을 그만둬야 할 때도 있어요. 한 달에 130만원 정도 받고 일해요. 겨울에는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벌어놓은 돈을 쓰게 되지요. 그렇게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일자리를 구하곤 해요. 돈 모으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네요.”

연애도 쉽지 않았다. 그는 21살 때부터 한국인 여자친구를 2년 정도 사귀었다. “여자친구가 노는 걸 너무 좋아했어요. 저녁 때마다 노래방 가자, 술 먹으러 가자, 나이트 가자고 했어요. 가고 싶어하는 데도 많고, 먹고 싶어하는 것도 많았어요. 근데, 나는 빨리빨리 돈 모아야 하잖아요.” 그런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 헤어졌다. 소식을 들으니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단다. “한국 여자들은 원래 연애를 그렇게 해요? 아니죠?” 지금도 ‘작업 중’인 여성이 있는데 영화 한 번 같이 보러 간 이후로 소식이 없다.

마웅과 같이 사는 쏘두(38·가명)는 ‘한국 생활을 즐기자’주의다. “이왕 한국에서 생활하는 건데, 먹을 거 먹고 쓸 거 써야 하지 않겠어요?” 쏘두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버마 친구들이랑 주말마다 부평에 있는 버마 음식 전문점 등을 순례했다. 지금은 부평 지역의 단속이 심해 ‘맛집 순례’를 쉬고 있다. 100만원짜리 캐논 오디오와 30만원짜리 파나소닉 미니 컴퍼넌트는 쏘두의 소중한 보물이다. “스트레스 받을 때 한 10~15분 정도 볼륨을 최대로 올리고 음악을 들어야 해요.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려요. 나중에 버마에 어떻게 갖고 갈지 걱정이긴 해요.”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봐달라”

버마, 베트남, 중국에서 온 ‘생활인’들은 몇 가지 고민을 덤으로 가지고 있다. 고용허가제, 강제추방법이 그들을 한국인과 가른다. 선동수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팀장은 “어제 좋은 행사를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오늘 강제추방의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온전한 주민으로서 역할을 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까지만 가붕(43)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위원장은 “우리는 한국 사회와 관계를 주고받는 거지, 일방적으로 돈을 가져가거나 기대러 온 사람들은 아니다”고 말한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봐달라”는 것이다.

‘무시와 차별’ 혹은 ‘보호와 도움’. 그들을 보는 시각은 중간 없이 둘로 갈라져 있다. 이러한 시각은 어떤 쪽이건 이주민들을 배제한다. 이주민 100만 명 시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자 ‘이웃’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이주민과 친구가 되자

이주노동자문화예술한마당 등 이주노동자와 어울리는 행사들

이주민·이주노동자들과 친구가 되려면?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는 “의지가 있다면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친구가 되는 방법이 있고, 지역 축제나 행사에 참여해 즐기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10월7일에는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국경없는거리에서 ‘제8회 이주노동자문화예술한마당’이 열린다. 이주노동자문화예술한마당은 이주노동자들이 주체가 돼 각자의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다. 당일 행사에 참여해 하루 즐겁게 놀 수도 있고, 행사를 마련하는 안산 민예총에 찾아가 행사 준비를 도울 수도 있다. 최현수 안산 민예총 지부장은 “이주노동자들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 음식을 배달하는 서빙맨, 원한다면 노래자랑 심사위원도 할 수 있어요”라고 귀띔했다(문의 031-413-5230).
10월21일에는 경기도 오산시에서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꽃다지문화공연’이 열린다. 필리핀 밴드, 인도네시아 밴드 등 이주노동자로 구성된 밴드의 공연이 함께 어우러진다(문의 031-372-9301). 이런 행사들 외에 지역 이주노동자지원센터를 통해 친구가 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외국인이주노동자와 지원실무자를 위한 포털 사이트(http://migrant.kr)를 통해 검색이 가능하다.




관련기사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장
▶2%의 목소리를 허하라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