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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딘은 조선에서 무엇을 보았나

등록 2007-08-31 00:00 수정 2020-05-03 04:25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의 컬렉션에서 발굴한 구한말 한국의 기록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나는 한국 청중들이 없으면 강연하지 않겠소.”

북유럽의 서전국(스웨덴)에서 이역만리 한국 땅에 찾아온 실크로드 탐험의 대가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기 직전인 1908년 12월19일 서울 종로 큰 거리의 기독청년회(YMCA) 회관. 이곳에 강연하려 들어온 스웨덴 지리학자 스벤 헤딘(1865~1952)은 청중이 모두 일본인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사막을 횡단하고, 신비의 실크로드 왕국 누란을 발견한 그의 탐험 여정을 처음 한국 땅에 알리는 자리인데, 조선 사람이 없다니….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강연장 밖에서 기다리는 몇몇 한국인들을 들여보내야 강연할 것”이라고 일본 관헌들 앞에서 버텼다. 결국 강연은 한국인들이 입장한 뒤 시작됐다. 중국 신장성의 동투르키스탄에서 위구르 피지배민들의 척박한 삶을 줄곧 보았던 헤딘은 압박받는 약소민족에게 나름의 측은지심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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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영접 받으며 경성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앙아시아 서역을 탐험하며 실크로드 연구의 새벽을 열어젖힌 헤딘과 한국의 각별한 인연을 증거하는 희귀 사료와 사진들이 세상에 나왔다. 헤딘이 3차 탐험을 마친 1908년 일제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강연하고 고종과 순종, 구미 각국의 외교관들을 만났던 사진과 방문 여정이 최근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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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한국학자 스테판 로젠(스톡홀름대 교수)은 자신이 10여 년간 스톡홀름의 ‘스벤 헤딘 컬렉션’에서 간추리고 찾아낸 그의 한국 방문 기록과 자료들을 한국의 지인이자 실크로드 미술사가인 권영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정년 기념 논총에 논문과 함께 공개할 예정이다. 로젠은 권 교수의 제자이자 논총 발간의 실무자인 민병훈 국립청주박물관장과 함께 지난해 현지 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 공동 자료 수집을 벌이기도 했다. 헤딘의 구한말 한국 방문 사실은 극소수 학자들 사이에 단편적 내용만 알려져왔으나, 헤딘의 첫 조선 강연을 포함한 구체적 방문 행적과 관련 사진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서역 유물 모음인 ‘오타니 컬렉션’과도 밀접한 역사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로젠은 권 교수의 논총에 기고한 ‘스벤 헤딘, 한국, 그리고 포착하기 어려운 중앙아시아’란 제목의 논문에서 헤딘의 한국 여행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10여 년 동안 헤딘 컬렉션과 헤딘 재단 쪽에서 수집해 간추린 한국 방문 관련 사료들을 분석해 내놓은 논고다.

공개된 사료와 논고를 보면, 헤딘은 1908년 12월12일 일본 고베항에서 한국으로 배를 타고 와서 경성(서울)에서 초청자인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2년 뒤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됨)의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티베트와 신장성 남쪽을 찾은 세 번째 중앙아시아 탐사를 마친 직후였다. 당시 헤딘의 방문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극동아시아 방문길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로젠 교수는 논고에서 “기본적으로 일종의 친선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스웨덴 쪽에서는 헤딘의 유명세를 이용해 일본에서 상업적, 정치적 이익을 꾀하려 했다”고 쓰고 있다. 히로부미는 스웨덴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을 들러주도록 간청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고종과 순종 만났던 ‘헤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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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딘은 12월 말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귀국할 때까지 10여 일간 경성에서 바쁜 일정을 보낸다. 고종, 순종을 비롯해 이토 통감, 주한 외교사절 등 거물 인사들과 접견했고, 강연을 하고 경성 곳곳을 방문했다. 공개된 사진은 이런 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사복 입은 헤딘이 당시 일본 통감부와 군부의 고관들과 찍은 기념 사진 혹은 파티 사진, 러시아 공사관에서 외국 외교관들과 같이 찍은 사진 등이다. 특히 옛 러시아 공사관 앞에서 러시아 공사의 부인 등과 같이 찍은 사진은 현재 공사관 건물이 상당 부분 훼손된 상황에서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지대한 고증사료로 평가된다.

민병훈 관장이 로젠과는 별도로 당시 국내 언론의 보도 내용을 찾아내어 공개한 부분도 눈을 끈다. 조사 결과 헤딘의 방문 여정은 의 전신인 1908년 12월19, 20일치에 나온다. 19일치는 ‘잡보’란에 ‘금일 하오 11시 이토 총감이 헤진 박사를 대동하고 대황제(고종) 폐하를 폐견(알현)한다’고 적었고, 20일치도 ‘잡보’란에 ‘서양의 유명한 세계 탐험가 헤진 박사가 금일 하오 4시 반에 종로 청년회관에서 28년 경력을 연설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민 관장은 “헤딘의 한국 방문은 중앙아시아 탐험사의 일부분으로 국내 오타니 컬렉션과 연계될 뿐 아니라 이땅에 실크로드의 탐험 및 연구의 역사를 소개한 첫 계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로젠도 논문에서 “1908년 서울 방문 당시 헤딘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일본인만을 상대로 한 강연을 거부한 그의 태도에서) 헤딘의 전형적인 행동 방식을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로젠은 헤딘의 이런 성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1908년 12월21일 순종(1874~1926) 황제 알현을 꼽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선한 알현장에 헤딘은 훗날 2대 조선 총독이 되어 3·1운동을 진압한 일본 장군 하세가와와 같이 찾아갔다. 로젠은 불운한 황제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헤딘이 1950년 출간한 회고글에 기록한 인상기의 일부분도 소개하고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과거의 위대함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한물간 스타로 보이는 데 수치심을 느꼈을 법하다. 아마도 부하들에게 보호를 받는 우리 안의 한 마리 사자와 같다고 스스로를 느꼈을 것이다…. 그의 차분하고 정연한 얼굴은 우울한 기운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가 천천히 위엄 있는 모습으로 일어서면서 이별의 악수를 청했을 때 나를 향하던 슬픔과 외로움의 시선을 잊지 못할 것이다.”

대한제국 왕실이 서훈 1등급 훈장 내려

그는 순종을 알현하고 돌아간 뒤인 1909년 1월 대한제국 왕실로부터 서훈 1등급인 팔괘장이란 훈장을 받았다. 이런 사실은 에도 언급된 것으로 민병훈 관장의 조사에서 확인됐다(훈장은 현재 스웨덴 스톡홀름 궁전의 왕실 군무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은 1905년 스웨덴 적국이던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이겼기 때문에, 헤딘의 한국·일본 방문은 시종 우호적인 분위기로 진행됐다고 로젠은 적었다. 통감 이토는 헤딘과 접견하는 자리에서 일본이 장래 동시베리아부터 바이칼호 근처까지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장담도 던진 것으로 전해진다. 일정을 마친 뒤 헤딘은 경성에서 경의선을 타고 압록강을 넘어 만주의 다롄, 뤼순, 펑톈을 거쳐 하얼빈에서 시베리아 철도로 갈아타고 귀국했다.

로젠의 논고와 수집 자료가 실린 권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 논총(솔출판사)은 9월 초 발간 예정이다. 논총에는 로젠의 글을 비롯해 실크로드 교류사의 여러 측면들을 고찰한 국내외 석학들의 논문 41편이 실리며, 9월10일 발간 기념식도 연다. 민 관장은 “스톡홀름 국립민족학박물관과 헤딘 재단이 소장한 당시 실크로드 발굴 유물과 탐험 장비, 스케치, 관련 기록들을 모아 국내 기획 전시도 추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철저히 냉대받은 ‘탐험가의 신화’

1930년대 중반 이후 나치와 밀착해 ‘어용학자’ 비난 속에 말년 보내


헤딘은 실크로드 역사에 관심 있는 애호가들이라면 첫손을 꼽는 탐험가의 신화다. 흔히 누란 왕국의 발견자로, ‘방황하는 호수’ 로프노르 호수의 위치를 비정한 지리학자로 근대 탐험사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후세의 탐험가와 발굴자들에게는 중국 신장성 내 동투르키스탄 실크로드의 지리와 지형 얼개를 측량함으로써 후대 연구 조사의 기본적 토대를 만들어주었다는 공로로 더욱 평가받는다. 헤딘의 정교한 측량지도는 스타인, 르코크, 오타니 등 후대 탐험가들의 답사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 2002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작전 중인 미군 군사지도도 그의 지도를 기본 바탕으로 작성됐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다.



20세기 가장 걸출한 탐험가, 지리학자인 헤딘은 왜소한 체구에 눈병을 앓으며 골골거린 약골이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건축기사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지리학과 오지 탐험에 대한 호기심이 유별났다. 20대 때 이미 페르시아 사절단 등에 끼여 메소포타미아 등의 중근동과 파미르, 투르키스탄의 기본 답사를 마쳤다. 스톡홀름대학, 웁살라대학, 베를린대학, 할레대학 등지에서 지리학, 동물학, 광물학 등과 어학을 익히면서 다기한 분야의 학문적 교양, 통찰력, 인내력 등을 갖춘 탐험가의 품성을 닦았다. 이런 과정을 지나 결행한 것이 1895년부터 1908년까지 세 차례 펼쳐진 저 유명한 타클라마칸 티베트 대탐험이다. 장장 2만여km에 달하는 이 초인적 탐험은 누란 왕국 유적의 발견, 서역 남도의 고증, 히말라야산맥의 지세 확인, 티베트 지리 기록 등 지대한 성과를 남겼다. 그는 노년기인 1926~35년에도 중국 학자들과 함께 서북지방 조사단을 꾸려 신장성 실크로드를 재조사하면서 중국 한대의 목간들을 대량 발굴하고, 방황하는 사막 호수 로프노르의 동서 이동설 등을 고증하는 등 실크로드학의 태반을 이루는 업적을 계속 쌓아나갔다. 그러나 이런 성취는 1930~40년대 나치 독일과의 유난스러운 유착 관계 때문에 훗날 빛이 바랜다. 베를린대학에서 오랫동안 수학했고, 지도교수가 실크로드를 명명한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었던 만큼 헤딘은 장년기 이후 연구 저작 활동을 독일권에서 펼치게 된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나치와 밀착해 종전 때까지 히틀러뿐 아니라 괴링, 괴벨스 같은 나치당의 정계 거물들과 자주 만났고, 출판이나 연구에서도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전후 그는 전범으로 처벌되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어용학자라는 비난 속에 말년을 보냈다. 일각에서는 조국인 중립국 스웨덴을 전화로부터 지키려고 고육책을 쓴 것이라는 옹호론도 나왔으나, 학계는 말년의 그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숱한 제후와 황제들, 내로라하는 정객과 예술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동시대 인물로서 못 만난 이는 레닌밖에 없다고 농담할 정도로 헤딘의 인맥은 넓고도 깊었지만, 말년의 그는 정반대의 고립된 삶을 살았다.
실크로드 학자들치고 70권이 넘는 그의 저서들을 인용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지만, 컬렉션과 박물관에 있는 그의 자료들이 여지껏 온전하게 집대성되지 않은 것은 전후 후학들의 냉대에 기인한 바 크다. 민병훈 관장은 “국립민족학박물관의 컬렉션이 여지껏 정리되지 못한 채 방치된 것을 보면 거의 천대받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라고 말했다. 1952년 감기 증세로 숨질 당시 헤딘은 재단을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 유언에 따라 냉대받던 헤딘의 지적 유산들은 미흡하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




헤딘에 자극받은 ‘오타니 컬렉션’

런던에 유학 중인 오타니를 사로잡았던 헤딘의 탐험 성과

헤딘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막대한 서역 유물 컬렉션(일명 오타니 컬렉션)을 남겨놓은 일본의 정토종 승려인 오타니 고즈이(1876~1948)와도 긴밀한 인연을 맺었다. 본디 귀족인 오타니가 런던 유학 시절인 1902년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앙아시아 조사 탐험을 꾀하게 된 데는 결정적으로 헤딘의 중국 신장 실크로드 대탐험이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오타니의 일대기에 대한 가장 상세한 연보 기록인 (鏡如上人年譜)(1954)를 보면, 오타니가 1차 탐험대 출발 직전 헤딘과 회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 있지 않으나 오타니는 헤딘과 만난 자리에서 중앙아시아 탐험에 관해 여러 가지 자문을 받았던 것으로 후대 학자들은 보고 있다.



오타니가 런던에 유학할 무렵, 헤딘과 스타인의 탐험 성과가 언론 등을 통해 연일 보도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보도를 접하면서 오타니가 큰 자극을 받았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오타니와 관련된 전기 연보를 보면 그는 유학 중 유럽인에 의해 중앙아시아 탐험이 왕성하게 벌어진다는 사실에 자극받아 스스로 동양인, 불교도로서 중앙아시아 불교 유적 탐험을 결정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헤딘의 일본 방문은 한국 방문 바로 직전에 이뤄졌다. 세계 각국의 잇따르는 초청에 거의 응하지 않다가 당시 인도 주둔 영국 총사령관의 권유로 일본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1908년 10월14일 인도 뭄바이에서 상하이를 거쳐 11월12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세 차례 강연했고, 11월27일 교토에 도착해 교토대학 등에서 세 차례 강연, 12월2일 교토의 니시혼간지라는 큰 절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오타니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래 보이는 오타니 및 추종자, 탐험대원들과의 기념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오타니와의 회견 뒤 고베항에서 한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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