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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의 수레바퀴에 모래를 뿌려라

등록 2007-08-31 00:00 수정 2020-05-03 04:25

고도의 리스크 기법을 동원하던 헤지펀드에서 시작된 위기, 세계적으로 규제 강화하고 있는데…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국내 금융회사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영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 따른 손실 규모는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국내 주식시장은 사상 최대 폭락이라는 기록적인 변동성을 보이는 등 이번 사태의 파도에 가장 크게 휩쓸렸다. 경기가 빠른 회복세를 타며 기초경제여건(펀더멘털)은 별다른 결함이 없는데, 왜 한국 금융시장은 국제 금융시장 상황의 불리한 변화에 크게 출렁거리면서 위기가 빠르게 감염된 것일까? 일각에서는 “한국의 급속한 금융·자본 자유화 조처가 배경에 자리잡고 있다”면서 단기 투자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규모 자본이 급속히 유입·유출되는 국제 자본 이동의 속성이 위기를 낳고 있다는 얘기다. 스티글리츠 전 세계은행 수석부총재는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자본 이동 자유화라는 망망대해에서 신흥 개도국 경제는 노를 저어가는 배다. 국제적 자본 이동으로 완벽한 배까지도 강력한 파도의 힘에 밀려 침몰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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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금융의 총아로 불리던 헤지펀드

2000년대 들어 글로벌 신용·자산 시장은 현대 금융의 총아로 불리는 헤지펀드, 엔캐리 트레이딩 등 ‘금융혁신’을 추구하는 투기적 자본이 국제금융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호황을 누려왔다. 1990년대 말 급부상한 헤지펀드나 사모펀드와 같은 ‘고도금융’ 플레이어들은 정교하고 복잡한 신종 신용파생상품을 고안해 위험을 회피해왔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부실이 전세계에 일파만파로 번진 것도 이 때문이다. 모기지 대출을 기초 담보자산으로 한 자산담보부증권(CDO)과 모기지 채무불이행 위험에 대비한 신용불이행스왑(CDS) 등 1·2차 파생금융상품이 복잡하게 발행·유통돼왔는데, 이런 사슬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헤지펀드를 비롯한 각종 펀드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의 연기금·보험사·은행 등 다양한 투자자도 이런 복합파생상품 투자 경로를 통해 미국 모기지 시장으로 대거 유입됐다. 결국 미국 모기지에서 터진 부실이 연쇄 사슬을 타고 전세계적인 동반 부실화를 한층 가속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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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금융경영연구소 곽영훈 연구위원은 “실물경제의 수요를 웃도는 유동성 과잉 공급에도 불구하고 금융혁신을 기반으로 인플레이션은 억제되고, 위험 프리미엄이 낮아지고, 자산 가격은 상승해왔다”고 말했다. 또 단기 고수익을 좇는 헤지펀드(위험에서 도망칠 수 있는 자금이란 뜻)는 고도의 리스크 관리 기법을 동원하기 때문에 금융기관들도 헤지펀드에 대한 대출을 크게 늘렸다. 미국 연기금이나 투자은행, 유럽 생명보험사 등이 수익률을 높이려고 헤지펀드에 대한 투자를 늘려왔는데, 이제 헤지펀드에서 손실이 발생하면서 그 위험이 금융기관에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금융혁신’과 관련해 모기지 부실로 큰 손실을 입은 펀드 대다수가 ‘퀀트’(Quant)펀드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골드만삭스의 대표 퀀트펀드가 최근 8월 들어 28%의 큰 손실을 입었고, 이것이 주식시장의 대폭락을 부추겼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헤지펀드의 일종인 퀀트펀드는 고도의 수학적 금융공학을 동원해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에 근거해 위험을 최소화하고 투자 결정을 내리는 펀드로 금융시장의 총아로 평가받아왔다. 그런데 서브프라임 부실이 터지면서 정체불명의 ‘괴물’(퀀트펀드)이 주식을 대거 처분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미국의 자산운용회사 글렌메드 트러스트의 고든 파울러는 “여러 퀀트펀드들이 시장이 통제할 수 없는 규모의 사자와 팔자를 일으켰다”며 “마치 한 무리의 코끼리 떼가 작은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전했다. 헤지펀드와 사모펀드는 개별적으로 투자자들을 모아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에 감독기관의 규제가 약하고, 투자 내용이나 운용실적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스로 공개하기 전에는 부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매입과 매각을 동시화, 변동성 커져

엔캐리 트레이딩 자금도 대표적인 국제 투기자본이다. 삼성선물 리서치팀은 “엔캐리 트레이딩으로 글로벌 유동성이 풍부해지면서 금융시장에서 시장 위험이 낮아지고 기대수익률은 급등했다. 그러자 투기자본들이 차입을 더욱 높여 유동성이 확대재생산되면서 금융시장 과열이 나타났다”며 “그러나 엔캐리 기대수익률이 최근 정점을 지난 듯하고 시장 위험이 증가하면서 급격한 신용경색이 초래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 1초의 피 말리는 경쟁을 벌이면서 지구 전역을 옮겨다니는 글로벌 금융시장은 어떤 시장보다도 정보의 비대칭성이 크다. 헤지펀드와 엔캐리 자금 등 투기자본은 극도의 위험회피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약간만 위험하다고 느끼면 언제라도 자금을 빼내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 투기자본은 특히 시간의 경과에 따라 위험이 커진다고 보기 때문에 자산 매입 시점과 매각 시점을 거의 동시화하는 차익거래(고평가와 저평가의 가격차)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큰 것도 이 때문이다. 또 기대수익률을 맞추기 위해 레버리지(차입 조달)를 과감히 활용하고, 위험이 보이면 경쟁적으로 투자자금을 회수하면서 시장에서 자기 실현적 위기가 현실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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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자본 등 단기 자금의 이동을 규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흔히 거론되는 건 토빈세(Tobin Tax)다. 토빈세는 통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인데, 모든 국가의 자본유출입(외환거래)에 대해 단일세율로 거래세를 부과함으로써 매입·매도를 반복하는 단기 투기거래의 거래비용을 높여 투기적 거래를 줄이고자 하는 자본 거래세이다. 만일 1%의 토빈세가 부과된다면, 일주일에 한 번씩 왕복거래를 하는 자본의 경우엔 1년에 50번 정도의 왕복거래가 있게 되므로 연간 약 100%의 세금을 내게 된다. 그러나 5년 만기 장기투자의 경우는 연간 0.4%의 세금만 내면 된다. 투기라는 수레바퀴에 ‘모래를 뿌려’ 그 거래 속도를 늦추는 것이다. 토빈세는 매우 간명하지만 △역외금융시장과 조세도피처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 △모든 국가가 토빈세를 도입해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데 미국이 호응하지 않는 현실에서 과연 도입될 수 있는지 등을 놓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질서 있는’ 자본거래 자유화를 표방하면서도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더욱 확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국에서는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미국은 2003년 투자자 보호를 위해 자산운용 규모 2500만달러 이상인 헤지펀드는 증권거래위원회 등록을 의무화했다. 등록 대상 헤지펀드 운용사들은 증권거래위원회의 정기적인 검사 및 회계감사에 응해야 한다. 또 유럽의회는 헤지펀드뿐 아니라 실물자산, 환율 등에 투자하는 펀드를 규제할 감독기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스위스는 1994년 ‘독특한 위험성을 지닌 펀드’ 개념을 도입하고 헤지펀드도 연방은행위원회에 등록하도록 했다. 홍콩의 경우엔 2002년 5월부터 운용자산 규모가 미화 1억달러 이상인 헤지펀드 운용사는 증권선물위원회에 헤지펀드를 등록·판매할 수 있도록 하되 투자신탁설명서 표지에 투자 위험에 대한 경고 문구를 반드시 넣도록 의무화했다.

반대로 한국에선 더욱 규제 완화

그러나 거꾸로 우리나라는 ‘동북아 금융허브’를 외치면서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를 더욱 완화하고 있다. 일부 기간산업을 제외하고 국내 주식에 대한 외국인 취득한도는 1998년에 완전 철폐됐고, 한국 증시의 파이낸셜타임스 스톡익스체인지(FTSE) 선진국지수 편입을 위해 △펀드의 금융감독원 신고제 폐지 △외국자본의 주식시장 장중 대량매매 허용 등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규제가 추가로 완화됐다. 글로벌 자본이동의 자유가 한국 금융시장을 일거에 휘청거리게 만드는 상황에서 “한국을 동아시아의 새로운 금융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야심찬 포부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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