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소송시간 단축하고 공휴일에도 재판… 사개추위 정치 논란 휩싸이면서 덩달아 흐지부지</font>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노동분쟁 처리 절차를 신속화하는 방안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88년이었다. ‘6·29 선언’에 이어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된 이듬해였다. 당시 제기된 방안은 별도의 ‘노동법원’을 설치해 노동분쟁을 신속·공정하게 처리하자는 내용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쪽에서 제기한 것이었다. 당시 제안은 입법 청원의 형태를 띠었으며, 구체적인 결실로 이어지지는 못했어도 그 뒤 여러 통로로 제기된 노동법원 설치 방안의 뼈대가 됐다.
노동위·법원 불신… 입법 청원 뒤 제자리걸음
한국노총의 입법 청원 내용을 보면, 법원조직법을 개정해 노동법원의 설치 근거를 명시하고, 노동법원법을 제정해 노동법원의 조직·권한, 법관의 자격, 소송 절차에 관한 특례를 규정하도록 했다. 노동법원으로는 1개의 ‘고등법원’과 수개의 ‘지방노동법원’을 두도록 했으며, 지방법원 사무의 일부를 떼어내 처리하는 ‘지원’ 및 ‘순회심판소’를 아울러 두게 했다. 눈에 띄는 점은 재판 합의부를 이루는 3명의 재판관 중 1명은 판사로, 2명은 노사 양쪽 추천으로 임명된 ‘심판관’으로 두도록 한 대목이다.
소송 비용을 저렴하게 책정하고, 선납을 강요하지 않으며, 면제 제도를 인정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또 판결의 신속성을 꾀하기 위한 추가적인 장치로 소송행위 기간을 민사소송보다 단축하고, 증거 조사를 쉽게 하며, 공휴일이나 야간에도 재판할 수 있게 했다. 한국노총 정책본부의 유정엽 부장은 당시 입법 청원의 배경을 “노동위에 대한 불신”이라고 설명한다. “노동위가 사용자 편이라는 ‘중립성 시비’가 많았다. 노동부에서 파견된 심사관들이 사건 심판에 관여하는 일이 흔했고, 부의 안건을 성의 있게 작성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많은 터였다.”
한국노총 중심의 노동법원 설치 청원이 당시엔 큰 이슈로 발전하지 못했다. 참여정부 들어 대통령 산하에 설치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에서 기획추진단장을 지낸 김선수 변호사는 그 이유를 “기본적으로 노동계가 법원을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재판 절차를 간소화하더라도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진행되는 재판이라면, 노동자들에게 오히려 불리한 하향 평준화 판결을 양산할 것이란 걱정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노동법원 설치 방안이 다시 이슈로 등장한 것은 2003년 들어서였다. 그 이전에도 필요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간혹 나오긴 했지만, 공식 의제로 채택돼 본격 추진된 건 참여정부 들어 대법원 산하에 설치된 사법개혁위원회(사개위)에서였다. 사개위는 출범 이듬해인 2004년 말 활동 종료에 맞춰 낸 ‘사법개혁을 위한 건의문’에서 하급심의 강화 방안의 하나로 노동분쟁 해결을 위한 전문법원 설치를 제안했다. 그 대목은 이렇게 돼 있다. “장기적으로 노동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효율적·전문적인 노동분쟁 처리기구로서 전문법원 또는 전문재판부가 설치되는 것이 바람직하나, 이를 위하여 노동분쟁의 추이 및 노동사건의 동향, 노동위원회의 역할, 노동사건을 통일적·총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특별절차, 노동사건 재판에 대한 사법참여제도의 도입 등에 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사개위의 건의안은 대법원장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됐고, 대통령은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후속 추진 기구로 관련 부처 장관과 민간위원들로 구성된 사개추위를 2005년 1월 꾸리게 된다. 이렇게 노동법원 설립 방안은 사개위에서 사개추위로 넘어가게 되는데,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법조계와 경영계의 반대로 사개추위가 노동법원 설립 추진 쪽으로 방향을 확정짓지 못한 것이다.
노동위 역할 둘러싸고 견해 차
사개추위 기획추진단 주최로 지난해 11월에 열린 ‘노동분쟁해결제도 개선 방안에 대한 전문가 간담회’의 토론 내용을 담은 자료를 보면, 노동법원을 둘러싼 대립선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간담회에 앞서 마련된 사개추위 시안은 노동사건을 전속 관할하는 노동법원을 설치하고, 일정한 사건에 대해선 노동자와 사용자 쪽의 ‘참심관’이 1명씩 심리에 관여하도록 돼 있었다. 또 노사단체 실무자에게 제1심 소송대리를 허용하며, 인지대 감액, 답변서 제출기한 단축 등 소송절차 특례를 광범위하게 인정하도록 했다.
학계 대표로 참여한 박수근 한양대 교수는 여기에 찬성한다는 태도를 보였으며, 노동계 대표들도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는 뜻을 표명했다. 반면 법무부, 대검찰청, 사법연수원, 노동부, 중앙노동위원회,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대한변호사협회를 대표해 간담회에 참석한 이들은 명백한 반대 또는 시기상조라는 태도를 보였다.
간담회 당시 박수근 교수는 “노동분쟁의 신속하고 전문적인 해결을 통해서 분쟁 당사자뿐만 아니라 노사관계의 안정에도 도움이 되므로 도입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판정을 필요로 하는 노동분쟁은 노동법원에 맡기고, 노동쟁의 조정과 차별 시정 등 정책적 요소가 많은 노동분쟁은 노동위원회으로 보내는 이원화 방안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경영계를 대표한 이형준 경총 법제팀장은 “노동사건과 일반 민·형사 사건의 경계가 불분명한 일이 많아 노동법원이 설립될 경우 전속 관할할 ‘노동사건’의 범위를 확정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설정할 수 없다”는 반대 이유를 들었다. 이 법제팀장은 “법관의 전문성과 신속한 판결은 형식적인 전문법원의 설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법관의 전문성을 우선 확보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사개추위 간사 역할을 맡았던 정인석 숭실대 교수는 “결국 노동계와 경영계 사이의 대립이었으며, 핵심은 현행 노동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느냐를 둘러싼 이견이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경영계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노동위를 강화해야 한다는 태도였으며, 노동계는 노동위의 일 처리에 불신을 갖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개추위는 자체적인 입장을 명확히 정하기 어려웠고, 다양한 의견을 정리하는 데 그쳤다고 정 교수는 전했다. 더욱이 사개추위 개혁 방안의 핵심 중 하나였던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도입 방안이 사립학교법 재개정 문제와 엮이는 정치적 논란 속에 노동법원 설립안도 덩달아 휘말리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노동법원을 만든다는 가정 아래 사개추위가 법안 형태로 만든 제안이 정부에 제출돼 있을 뿐이다.
노동법원은 법률 판단, 노동위는 분규 조정
정인석 교수는 “노동위가 노사 양쪽에서 공정성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고, 특히 지방의 경우 전문인력 풀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법원이 생기면 부당노동행위나 부당해고에 대한 법률적 판단은 전문 판사들이 다루고, 노동위는 노사분규나 노동쟁의 조정에 주력하는 역할 분담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 유정엽 한국노총 부장도 “노동위는 노사 간 조정 같은 역할을 주로 맡아 점점 서비스 기관화하고 있다”며 “노동 전문 법원을 통해 빠른 구제를 받는 게 필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유 부장은 올해 대통령 선거 일정에 맞춰 후보들에게 노동법원 설립안을 공약으로 채택할 것인지를 묻는 방법으로 이슈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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