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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같은 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라고?

등록 2007-05-24 00:00 수정 2020-05-03 04:24

‘대만의 소록도’ 러성위안, 1994년부터 시작된 건물 철거 반대투쟁 마지막 고비

▣ 러성위안(대만)=글·사진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yorogadi@hotmail.com

망고나무 가지 사이에서 강한 햇빛이 비춘다. 벽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따뜻한 느낌의 마을 너머로 높다란 최신식 빌딩의 모습이 눈에 도드라졌다. “새로 지은 병동을 봤어요? 그건 감옥이에요.” 낡은 전동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장원빈(79) 노인이 말했다. 마을에서 동시에 구입한 물건인 듯 그의 휠체어 뒤에는 ‘러성 48호’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노인은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여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대만 한센인의 서글픈 역사가 새겨진 인생사

한국에 소록도가 있다면, 대만에는 ‘러성위안’(樂生園)이 있다. 대만총독부는 섬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한센인들을 격리 수용하기 위해 1930년 12월12일 타이베이에서 북쪽으로 4㎞ 떨어진 신좡(新莊)시에 ‘대만총독부 나요양소 러성위안’을 만들었다. 개원했을 때 마을 면적은 7만7천평, 여러 채의 건물을 더한 면적은 1천여평이었고, 첫 환자는 그해 12월20일에 입소한 100여 명의 한센인이었다. 이후 환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요양소는 증축을 거듭해 지금의 면적에 이르렀다. 한센인들은 소록도에서처럼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결혼을 하고 싶은 남자는 강제로 단종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해방 이후 1118명까지 늘었던 러성위안의 한센인 수는 리팜피신 등 대표적인 한센병 치료제들이 개발된 뒤 가파르게 줄어들었다.

장 노인 모자의 인생사는 러성위안을 거쳐간 지난 세기 대만 한센인의 서글픈 역사를 압축해 보여준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센병에 걸려 러성위안에 수용됐다. 얼마 뒤 아들의 얼굴이 그리워 집으로 도망쳐왔고, 다음날 심하게 구타당한 뒤 수용소로 끌려갔다. 생활이 곤란했던 장 노인은 오사카 출신 일본인의 요리점에서 더부살이로 일하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전쟁이 끝난 뒤 덮친 가난 때문에 그도 잘 먹지 못했고, 얼마 뒤 나(癩)균이 몸속에 침투했음을 알게 됐다. 1950년 끌려간 요양소에는 이미 병으로 몸이 만신창이로 변한 모친이 남아 있었다. 모자는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노인은 “병이 저절로 생긴 것인지 어머니에게 옮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4년 전인 2003년에 숨을 거뒀다.

5월8일 취재진이 찾은 러성위안은 치열한 싸움 끝에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전쟁터처럼 고요한 모습이었다. ‘러성위안의 비극’이 시작된 것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대만 정부는 반세기가 넘는 동안 한센인들의 보금자리가 돼준 러성위안을 허물고, 그 터에 지하철 차고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남은 한센인들에게는 “병원을 지어줄 테니, 그 안에 들어가라”는 대책을 내놨다. “우리보고 감옥 같은 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라는 거냐!” 한센인들은 흥분했고, 이는 러성위안을 둘러싼 기나긴 철거 반대투쟁으로 이어진다.

장 노인은 “오랜 세월을 지내 익숙한 우리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를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두 번째의 격리 아닌가요?” 장씨의 낡은 집 안뜰에는 커다란 망고나무가 있다. 40년 전 한 입소자의 어머니가 가져온 망고를 먹은 뒤 씨를 뿌려 직접 기른 나무다. 망고나무 가지 사이로 비추는 햇살 너머로 최신 의료기기가 갖춰진 빌딩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병원 간 사람도 원해서 간 건 아닌데…

러성위안에서 보낸 57년 동안의 삶이 언제나 행복하지는 않았겠지만, 장 노인은 “지금 생활에 만족하며 산다”고 말했다. 2007년 현재, 러성위안에 남아 있는 한센인들의 수는 250명 안팎으로 160명은 병원으로 옮겼고, 90여 명이 남아 정부와 벼랑 끝 대치를 하고 있다. 장 노인보다 두 살 아래인 정티앤정 노인은 “사람들이 모두 병원으로 떠나 마을이 텅 빈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강제로 우리를 병원으로 내몰았어. 병원으로 간 사람들도 원해서 간 건 아니라고. 그런데 이게 뭐야. 그 사람들과 우리의 사이만 나빠졌잖아.”

본격적인 철거 반대 운동이 시작된 것은 2003년부터다. 러성위안 문제에 가장 먼저 개입한 사람들은 ‘청년러성동맹’이라는 학생 단체였다. 이들은 지하철 공사로 사라지게 될 러성위안 내의 자연환경을 보호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뒤이어 2004년 9월, 대만의 저명한 인권운동 단체인 인권촉진회(人權促進會)가 이 문제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고, 용기를 얻는 한센인들은 2005년 3월 자신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조직인 자구회(自救會)를 만들게 된다. 러성위안의 투쟁은 국제사회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다. 2005년 7월20일 유엔 최고인권위원회가 대만 정부에 “러성위안의 문제는 모든 거주민들과 상의해서, 유엔과 기타 국제조직이 요구하는 보편적 가치에 부합한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러성위안에 집중되는 동안 러성위안은 이미 제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대만 정부는 러성위안의 절반 정도를 이미 파괴했다. 병원 쪽에 의료진과 생활 도우미를 빼앗긴 건물들은 버려진 채 하나씩 폐허로 변하고 있다. 가장 서글픈 것은 일제 때부터 계속돼온 한센인들에 대한 강한 차별과 편견이다. 지난 4월에는 신좡 시장과 신좡 출신 국회의원이 시민 1만여 명을 동원해 러성위안을 둘러싸는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한센인들에게 “경제 발전의 방해자”라는 딱지를 붙였고, 신좡시 등 지방자치단체는 4월16일까지 러성위안을 떠나지 않으면 “집을 강제 철거하겠다”고 경고했다. 러성위안 주변에는 이를 막기 위한 한센인, 관계 전문가, 시민단체,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양쪽은 충돌 직전에 중재안을 찾아냈다. 대만 정부와 한센인·시민단체·학생·인권단체 대표들은 4월11일 모였다. 노인들의 외침은 학생들의 공감을 불러왔고, 인권단체들로 확산됐으며, 국제 사회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대만 정부도 그동안 러성위안을 둘러싼 정책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러성위안은 이제 기나긴 투쟁의 마지막 고비에 와 있다.

남은 건물은 보존할 수 있을까

정부는 그날 모임에서 “남은 건물을 90% 정도 보존하는 것이 가능한지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한센인 자구회장인 리티앤페이는 “정부가 설계도를 바꾼다고 했는데, 최종 결론은 설계도가 완성된 뒤에나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남은 러성위안 내 건물은 모두 46채로, 정부는 이 가운데 안전에 문제가 있는 6채를 추가 철거하고 남은 건물들은 보존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리 자구회장은 “좋은 쪽으로 해결되길 바라지만 결과를 무작정 낙관할 순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소록도에도 우리 사연을 전해주세요. 도움이 필요합니다.” 리 자구회장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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