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 문제’ 결정을 또다시 연기한 진실화해위, ‘표현 수위’ 놓고 고민 중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5월15일 오후 서울 중구 필동1가 매경미디어센터 3층에 차려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송기인 신부) 임시 기자실에는 몇몇 언론사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날 진실화해위 전체회의에 올려진 세 개의 안건 가운데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 전신) 강제 헌납 의혹 사건’이 포함된 데 따른 사전 준비였다.
회의를 시작한 지 2시간을 조금 넘긴 오후 6시10분께. 진실화해위 대외협력과 직원이 기자실에 나타나 “또 2주 연기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안건을 특정해 말하지 않아도 ‘정수장학회 문제’를 가리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예상 밖의 연기 소식은 각 언론사들로 득달같이 전달됐다. 비슷한 시각, 마포대교 북단 언저리에 자리잡은 마포구 마포동의 한생산업 회장실에도 이 소식이 곧바로 전해졌다. 진실화해위 결정을 전제로 미리 인터뷰를 했거나 할 예정이었던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줬던 것이다. “회장님, 인터뷰 2주 연기해야겠습니다.” 누구보다 결정을 고대해온 김영우(65) 회장은 순간 맥이 풀렸다.
“연기한다고 사실이 뒤바뀔 순 없으니…”
“워낙 오래 기다린 게 돼놔서….” 이튿날 한생산업 집무실에서 과 만난 김 회장은 조급해할 건 없다는 태도였다. “날짜를 정하지 않고 연기한 것이라면 답답하겠지만, 2주 뒤라고 하니. 그때는 되겠지요. ‘이 사실’이 뒤바뀔 수는 없는 것이니까 실망할 건 없습니다. 나보다 기자들이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서(웃음)….” 김 회장이 말한 ‘이 사실’은, 선친 김지태 전 삼화고무 사장이 부일장학회를 자진 헌납한 게 아니라 박정희 군사 정권에 강탈당했음이 사실상 확인된 것을 뜻한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이미 지난 2005년 7월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위원회’(국정원 진실위)에서 강탈로 규명된 바 있으며, 이젠 법적 독립기관인 진실화해위의 심판대 위에 올라 있다. 국정원 기구와 달리 여야 합의 기관인 진실화해위에서 내리는 결정은 상당히 다른 차원의 의미를 띠게 된다. 위원회의 결정은 의혹을 둘러싼 논란을 최종적이고 공식적으로 매듭지을 뿐 아니라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는 시정 조처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시정 조처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은 정수장학회와, 정부 소유의 부산 서면(부산진구, 남구 일대) 땅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큰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한나라당이나 박 전 대표에겐 이 사안이 큰 짐이다. 진실화해위에 상정된 안건으로는 유례없이 세 번씩이나 의결이 미뤄진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정수장학회와 이에 연계된 문화방송, 강탈 의혹 사건이 정권 교체기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던 데서도 정치적 민감성을 엿볼 수 있다.
김지태 평전인 (2003년 간)을 보면, 정수장학회 문제가 맨 처음 정치 문제로 번진 것은 1964년 12월이다. 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정일형과 서민호가 대정부 질문을 통해 5·16 장학회 문제를 꺼내들었다. “김지태씨가 자신 소유의 재산을 5·16 장학회에 기부한 동기와 경위가 뭔가. 배후에 어떤 정치적 압력이 있었는지 그 경위도 밝혀라.” 5·16 장학회는 김지태씨 소유의 부산 서면 땅 10만 평과 ·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 주식 100%를 강제 헌납받아 1962년에 설립됐으며,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자와 부인 육영수씨의 ‘수’자를 따서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청원서에 서명한 김영삼 정권때도 진전없어
정수장학회 문제가 다시 세간의 집중적인 관심을 끈 것은 민주화 요구가 봇물을 이루던 1988년이었다. 그해 7월 의 편집권 독립 투쟁으로 다시 불거진 정수장학회 문제는 국회로 넘어가게 된다. 그해 10월 윤우동 전 전무 등이 ‘부산일보사 등의 소유권 원상 회복에 관한 청원서’를 국회에 낸 것이다. 청원서는 정수장학회 소유의 와 문화방송을 ‘정치적 장물’이라고 표현했다. 이 청원서에 소개 의원으로 서명 날인한 부산 출신 국회의원 중에는 김영삼, 노무현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청원서 제출 직후 국회가 이른바 청문회 정국에 돌입하는 바람에 이 청원서는 국회 서류 뭉치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유가족이 전면에 나선 것은 문민정부 출범 뒤였다. 김지태씨의 큰아들 영구와 둘째아들 영우씨는 1993년 3월 유족을 대표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1988년 ‘부산일보사 등의 소유권 원상 회복에 관한 청원서’에 서명 날인했던 김영삼 민주당 총재가 대통령에 당선된 데 따른 기대감의 반영이었다.
당시 문민정부에서는 이 문제를 재조명할 태도를 비치기도 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사태는 도리어 거꾸로 흘러갔다. 1995년 9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큰딸 박근혜씨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에 취임한 것. 김영삼 정부를 지나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도 정수장학회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던 배경에 대해 김영우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쿠데타 동지였던)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부일장학회 강탈 당시 중앙정보부장)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서도 권력의 한 축을 맡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정수장학회 논란이 다시 전면에 떠오른 것은 2004년 4월12일이었다. 총선을 사흘 앞둔 이날 기자 100여 명이 이 회사 6층 회의실에서 회의를 연 뒤 ‘ 편집국 기자 일동’ 명의로 결의문을 발표했다. 그해 3월 한나라당 대표로 당선된 박근혜 의원에 대한 보도의 편향성과 불공정성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곧 박근혜 이사장의 정수장학회와 얽혀 논란을 키웠고, 정치권으로 번졌다. 노웅래 열린우리당 의원은 그해 7월14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소유를 문제 삼았다. 곧이어 열린우리당은 조성래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정수장학회 진상 조사단’을 꾸리기에 이른다. 여론의 반향이 높아짐에 따라 정수장학회 강탈 의혹 사건은 국정원 진실위에 이어 진실화해위로 넘어가면서 진상이 차츰차츰 드러나기에 이른다.
진실화해위 쪽을 취재한 결과를 종합하면, 오는 5월29일 전체회의에 다시 상정될 부일장학회 강제 헌납 의혹 사건의 의결 방향은 거의 예견되고 있다. 부일장학회는 강탈당한 것이라는 진상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가해자(국가)와 피해자(유족) 사이의 ‘화해를 권고’하는 내용이 될 것이라는 전언이다. 지금까지 세 차례 회의를 거치면서도 최종 결론에 이르지 못한 건 진상 규명과 화해 권고에 담기는 내용의 ‘표현 수위’ 때문이었을 뿐 강탈이라는 진상 자체를 둘러싼 논란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관심의 초점은 진실화해위 결정 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맞춰져 있다.
“월급 1천만원짜리 이사장은 용납 못해”
우선적인 관심 대상은 정수장학회다. 유족은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의 본래 주인 김지태 전 사장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지를 받드는 쪽으로 장학회가 운영되기를 바란다. 유족을 대표해 진상 규명 작업을 이끌어온 김영우 회장은 “법인 소유로 돼 있는 장학회를 유가족들 개인 재산으로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아버님의 명예를 살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학회 이름에 ‘자명’(김지태 전 사장의 호)을 넣었으면 한다. 굳이 정수를 빼지는 않고 ‘자명정수’도 좋고, ‘정수자명’도 좋다.”
김 회장은 “지금 이사진과 같이 (운영)할 수도 있지만, 장학회에서 1천만원을 웃도는 월급을 받고 차량과 비서까지 제공받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장학회 이사장 시절 이사장에겐 매달 1천여만원의 월급과 차량에 비서까지 딸려 있었다. 김 회장은 (집무실 밖을 가리키며) “정수장학회 사무실(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빌딩 11층)에 아버님의 ‘흉상’을 갖다놓고 싶다”고도 했다. 한생산업 회장실 앞 로비에는 자명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3년 11월 자명의 모교인 부산상고 교정에 세워진 흉상을 똑같이 본뜬 것이라고 한다.
자명의 흉상이 언제쯤 정수장학회 사무실에 자리잡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정수장학회 현 이사진 쪽에서 전향적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진실화해위 결정 뒤 지루한 법정 다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개인 소유’라는 땅 문제는 파열음 예고
정수장학회 문제가 일종의 ‘명예 회복’ 논란이라면, 아직 정부 소유로 남아 있는 부산 서면 땅은 자칫 재산 소유 문제와 얽힐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 땅은 부일장학회 강제 헌납 당시 빼앗긴 김지태 전 사장 소유의 부산 서면 땅 10만 평의 일부다. 서면 땅은 5·16 장학회에 귀속됐다가 국방부로 이전된 뒤 민간으로 많이 넘어가고 지금껏 정부 소유로 남아 있는 것은 3만9천 평 정도라고 한다. 이는 유족이 2005년 등기부 조사를 통해 밝혀낸 것으로, 정부 소유 땅은 이제 1만 평도 안 된다는 얘기도 있다.
유족은 많든 적든 국가 소유로 돼 있는 부분만큼은 원래 주인 쪽에 원상회복해주어야 한다고 밝힌다. 진실화해위의 근거법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바탕을 둔 주장이다. 이 법 제36조 ①에는 ‘정부는 규명된 진실에 따라 희생자, 피해자 및 유가족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유족들은 이 조항에 따라 국가가 불법으로 강탈한 게 명백해지면 원상회복되는 게 마땅하다고 말한다. 김영우 회장은 “땅을 되찾게 된다면, 절반은 부산 시민을 위한 문화재단을 만드는 데 쓰도록 내놓겠다”고 밝혔다.
부산 서면 땅은 부일장학회라는 재단에 이미 넘어갔기 때문에 유족에게 되돌려지기 어려울 것이란 해석도 있다. 그렇지만 김 회장은 좀 다르게 본다. 부일장학회는 강탈 전까지 부산일보사 사업의 하나로 진행된 것이고, 미처 재단 형태를 띠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김지태 전 사장 개인(명의신탁 포함)의 소유였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는 좀 다른 대목이다. 진실화해위 결정 뒤 정부의 전향적인 조처가 없을 경우 땅 문제를 둘러싼 파열음이 나올 수도 있음을 예고한다.
부산상고 교정과 차남 집무실 앞에 흉상으로 남아 있는 ‘자명’은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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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의 큰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정수장학회와 공식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9월이었다. 그 이전부터 박 전 대표가 정수장학회의 실세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전면에 드러나지 않다가 이때 장학회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박 전 대표는 정치권 안팎의 끊임없는 논란에도 2005년 3월까지 10년 가까이 꿋꿋하게 이사장직을 유지했다. 이사장 재임 동안 그는 장학회로부터 적지 않은 혜택을 입었다. 정수장학회 강탈 문제가 세간의 관심사로 집중 부각된 2004년 7월 의 확인 결과 박 전 대표는 이사장으로 월 보수 1100만원을 받고 있었다. 이와 함께 승용차와 운전기사도 장학회에서 제공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정수장학회 문제가 정치권에서 쟁점으로 떠오르고 한나라당 안에서도 비판적 시각이 제기되면서 박 전 대표는 2005년 이사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장학회 이사진이 박 전 대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의구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박 전 대표에 이어 2005년 5월 정수장학회 이사장에 취임한 최필립(79) 전 뉴질랜드 대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4년 대통령 의전비서관과 공보비서관을 지낸 인물이다. 게다가 2002년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설립했을 당시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최 이사장 취임 뒤 새로 이사로 선임된 신성오 전 외교안보연구원장, 최성홍 전 외교통상부 장관도 ‘박근혜의 수렴청정’ 체제라는 비판을 더한 빌미였다. 유신 공화국 시절에 활동한 외무 공무원 출신이라는 점에서다. 정수장학회 이사진은 이 세 사람과 중임된 송광용 서울대 교수, 김덕순 전 한국청소년육성회 총재 등 5명으로 이뤄져 있다.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 중 하나로 꼽히는 박 전 대표의 캠프에는 정수장학회를 고리로 인연을 맺은 이들이 꽤 있다. 정수장학금 수혜자 3만여 명으로 구성된 상청회를 관리하는 김기춘 한나라당 의원, 박 전 대표 캠프의 외곽 조직인 ‘한강포럼’ 회장으로 활동하는 현경대 전 한나라당 의원은 정수장학회 1기 출신이다. 박 전 대표가 정수장학회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이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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