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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군사 요새로 전락하는가

등록 2007-05-04 00:00 수정 2020-05-03 04:24

‘간이 부두’에서 ‘7천t급 이지스함이 정박하는 전략기지’로 바뀐 의혹 속의 해군기지, 지사는 ‘5월 결정’ 밀어붙여

▣ 제주=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gom9800@gmail.com

제주 사회는 지금 흔치 않은 위기를 맞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결과 감귤이 협상 대상 품목에 포함되면서 감귤 농가는 물론, 제주 경제의 근간이 무너진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특별자치도가 출범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논란에 처해 있는가 하면, 해군기지 추진 문제가 최종 국면에 봉착하면서 도민 사회의 분열 양상이 날로 첨예해지고 있다. 여기에 김태환 지사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항소심에서조차 당선 무효에 해당하는 벌금 600만원형을 선고받으면서, 이를 전체적으로 풀어가야 할 도정 리더십에 심각한 상처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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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명의 빌려 ‘가짜 성명서’ 발표도

민심은 우선 닥친 한-미 FTA 문제에 대처할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해군기지와 같은 문제는 잠시 미뤄두자는 쪽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김 지사는 해군기지에만 ‘올인’하는 태세다. 5월 내로 기지 건설의 가부를 결정하겠다는 게다. 김 지사는 지난 4월12일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가 5년 동안 끌어온 문제이니만큼, 이제 결정할 때가 됐다”면서 여론조사를 통해 도민 사회에 찬반을 묻고 그 결과로 최종 결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 발표로 제주 사회는 급격히 해군기지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분열 국면으로 치달았다. 사실상 도 당국이 기지 유치를 전제로 수순을 밟고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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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국방부와 해군의 광고 공세와 물밑 홍보가 이어지고, 기지 유치에 찬성하는 단체들은 남의 단체 명의를 임의로 도용해 ‘가짜 성명서’까지 내보냈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기지 후보지로 거론되는 해당 지역 주민들 사이의 찬반 양상은 형제·친척 등 집안 갈등으로 비화되는가 하면, 같은 동네 주민끼리 이 문제로 형사 사건에 연루되는 일마저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 4월13일 정부 입장 발표를 이유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김장수 국방부 장관의 제주도 방문은 지역사회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제주도청 방문을 앞둔 시간에, 이에 항의하려고 도청 문 앞에 모여든 시위대를 제주도 당국이 경찰력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무더기로 이뤄진 강제 연행에는 지역 주민, 해녀들은 물론 신부와 수녀 등 성직자와 도의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듯 해군기지 건설 논란으로 제주 사회는 지금 칼끝에 서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 당국은 당면한 FTA 문제마저 제쳐놓고 ‘끝장내자’는 태도이고, 누구 하나 첨예해진 민심과 갈등 수습에 나서지 않고 있다. 기지 건설이 정부가 추진하는 국책사업임에도, 정부는 국회나 도의회에서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만 대답했을 뿐, 지금의 갈등 양상에 수수방관으로 일관하며 책임이나 권한도 없는 도지사의 결정에 맡겨놓고 있을 뿐이다.

김 지사가 ‘5월 결정’을 밀어붙이는 배후에는 국방부와 해군의 압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군함 건조가 이미 이뤄진 상황에서 해군에 기지 건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됐고, 이를 위해선 내년 정부 예산에 반드시 기지 건설 예산을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 예산 편성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시점을 감안하면, 5월에는 어떤 식이든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방부는 올 초만 해도 공공연히 ‘3월 결정’을 제주도 당국에 요구하기도 했다. 문제는 해군이나 정부가 여러 차례 ‘주민 동의’를 전제로 이를 추진한다고 한 만큼, 도민 사회의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을 존중해줘야 함에도 사실상 강행 행보만을 거듭하고 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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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의체 주관하는 한편으로 건설 로드맵 추진

제주 해군기지 문제가 시작된 지는 벌써 5년째에 접어들었다. 시간적으로만 보면 결정할 때도 된 듯하다. 그러나 해군은 아직까지 제주에 추진 중인 기지의 실체나 규모 등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7천t급 구축함과 대형 수송함 등을 포함한 1개 기동전단과 잠수함 전대, 육상지원 전대급이 전부라고 하지만, 여러 언론 보도의 정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케 한다. 몇 년 전부터 중앙 일간지들은 해군이 ‘1개 기동전단’이 아닌, ‘3개 기동전단’으로 이뤄진 ‘전략기동함대’를 구상 중이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지난 2004년 국회에 제출한 국방부 국정감사 자료에서도 ‘전략기동함대’라는 계획으로 들어 있음이 확인된 바 있다.

해군 스스로도 2005년에 와서야 제주 기지가 7천t급 이지스함이 정박하는 전략기지임을 드러냈지, 처음 해군기지 건설 의도가 드러난 2002년에는 ‘간이 부두’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홍보에 나섰다. 잠수함 전대나 육상지원 전대 같은 별도의 군부대가 함께 들어올 것이라는 사실도 지난해 12월 도의회 설명회 과정에서 처음 밝혀진 것이다. 이렇다 보니 도민들은 도대체 해군이 추진하려는 기지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의혹을 놓지 못하고 있다. 만일 기지 건설 이후에도 기지 확장이 계속 이뤄진다면, 공군기지와 더불어 제주섬이 군사 요새화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 당국에서도 수년째 되풀이되는 현안이므로 이제 결론을 내리자고 하고 있지만, 정확히 도정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공론에 부친 것은 올해 1월과 3월, 단 두 차례의 토론회뿐이다. 오히려 도 당국은 찬반 세력의 합의에 따라 구성된 ‘해군기지 협의체’를 직접 주관해오면서도, 이와는 별도로 기지 건설 로드맵을 추진하는 등 사실상 기지 유치를 의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만 사왔다.

수년째 큰 논란이 돼왔던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관심도와 인지도에 상관없이 불특정 도민 1500명의 답변(여론조사)에 의해 결정지어질 운명에 처해 있다. 찬성과 반대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그 결과는 더 큰 혼란과 갈등으로 비화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아무리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업이지만,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사조차 전혀 고려되지 않는 기지 건설이 과연 국익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제주는 지난 2005년 1월 정부에 의해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관련 법률 근거까지 만들어가며 이뤄진 이 의미 있는 조치는 벌써부터 색이 바래고 있다. ‘평화의 섬’으로 지정해놓고 이와 정면으로 상치될 수 있는 군사기지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배경에는 ‘4·3 항쟁’이란 ‘비극’에 대한 보상의 의미도 있지만,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정착을 위해 제주도는 평화지대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역할론이 짙게 깔렸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관련 학자들에 의해 이뤄진 제주 평화의 섬의 논리적 핵심은 ‘적극적 평화론’과 더불어 ‘비무장’이었다. 이런 제주도에 그것도 전략적 성격을 갖는 대규모 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은 얼른 봐도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이미 중국 등은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여러 차례 보도했고, 경계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제주도 기지 건설로 동북아 지역 군비 증강을 부채질하게 된다면, 평화의 섬은 그저 종잇장에 불과할 것이다.

정부가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는데…

제주 도민에게도 해군기지 문제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37년 일제가 대중국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던 군사비행장 건설 이후, 적어도 70년째 각종 군사기지화 시도가 이어져왔다. 이런 맥락에서 해군기지 건설 논란은 결국 지리적 위치상 ‘위험’과 ‘기회’의 운명을 동시에 갖는 제주도가 마침내 군사기지의 위협을 청산하고 ‘평화의 섬’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아니면 해군기지 등 ‘군사기지의 요새’로 전락할 것인지 하는 제주 미래의 향방이 걸린 문제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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