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리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평화마을 추진하던 그가 인질범이 된 까닭은
▣ 화성=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추리 전에 매향리가 있었다. 대추리 싸움은 패배로 끝났지만, 매향리 싸움은 승리로 끝났다. 미군 폭격기들은 매향리 갯벌에 서 있는 농섬에 로켓포를 쏟아부었고, 기총 사격을 했다. 포탄은 때로 가정집 지붕 위로 날아들었고, 갯벌 일을 하는 주민은 부상당했다.
전만규(51)씨는 매향리 싸움을 승리로 이끈 당사자다. 그가 1988년부터 벌인 싸움 끝에 2005년 8월 미군 폭격장이 결국 폐쇄됐기 때문이다. 대법원도 2004년 국가가 매향리 주민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매향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매향리 미군 폭격장 폐쇄 주민대책위원장’인 전만규씨는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새로 달았다. 매향리 평화마을은 폭격장 폐쇄 투쟁을 기억하는 기념관을 짓는 등 매향리를 관광과 생태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재탄생시킬 계획이다. 이제 매향리에 남은 건 평화를 일궈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가 4월12일 언론에 ‘아내가 경찰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아내를 위협한 인질범’으로 등장했다.
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범행 현장에 있었다. 평화마을을 취재하기 위해 이날 오후 2시께 박승화 기자와 매향리에 도착해, 미 공군의 옛 폭격장인 농섬에 함께 가려고 전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범행 현장
하지만 약속 시간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몇 번의 전화 끝에 통화가 이뤄졌고, 그는 황급한 목소리로 “5분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20분이 지난 뒤, 그는 하얀색 옵티마 승용차를 끌고 나타났다. 그리고 “갯벌이 물에 잠겨 배를 타고 농섬에 가야 한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경찰 출장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출항 허가를 해달라며 출장소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까지 모든 게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전씨가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흉기를 꺼내 직원의 왼쪽 허벅지를 찔렀을 때,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이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인질극이 벌어졌다. 전씨는 자신의 아내 박미숙(가명)씨를 자동차에 태우고 데려왔다. 박씨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손은 플라스틱 노끈으로 묶여 있고 입은 청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박씨의 얼굴은 세게 얻어맞은 듯 퉁퉁 부어 있었다. 전씨는 1t 화물차 위로 아내를 끌고 가 “다른 건 참아도 나를 감시하는 경찰과 바람 피우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 수사를 하도록 하겠다. 방송을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소방차와 경찰이 출동했고, 전씨는 흉기로 아내의 목을 겨냥했다. 문화방송 취재진이 달려와 전씨와 인터뷰를 했다. ‘평화마을’을 취재 왔다가 졸지에 인질극을 목격한 기자도 휴대전화로 기사를 전했다.
상황은 4시40분께 종료됐다. 주민들의 설득으로 전씨는 흉기를 내려놓았다. 박씨는 119구조대에 실려갔고, 전씨는 경찰차량에 실려갔다. 온라인판에 기사를 실은 는 이날 저녁 기사를 뺐다. ‘불륜’을 확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씨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날 밤 9시 문화방송 뉴스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기르던 고양이를 죽여도 죄의식 없어”
1990년대 시민단체를 거쳐간 사람들, 학생운동의 전선에 섰던 사람들, 현장을 누볐던 사회부 기자들 가운데 전만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매향리는 환경투쟁의 전장이었고, 반미투쟁의 성지였다. 전만규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했다. 그들은 기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으며, 대답을 듣고 당혹해했다. 심리적 충격을 채 추스르지 못한 기자에게도 역시 수수께끼가 남아 있었다. 그는 왜 폭력에 빠졌을까.
그러던 중 기자는 2000년 전만규씨의 법정 진술문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해 6월 매향리 폭격장 사격 개시 깃발을 찢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우연히 읽게 된 그의 글을 보고 전율했다.
“제가 매향리 미 공군 폭격장 문제로 고민하게 된 것은 1978년 방위병으로 마을 무기고에서 근무할 때입니다. 당시 정기구독하던 에 실린 기사에 저의 시선이 멈췄습니다. 내용인즉 미국 모 대학에서 항공기 소음에 관해 조사한 결과,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인근 지역 주민들이 한적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보다도 성격이 포악해지고 자살률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저는 아하! 우리 마을 사람들이 걸핏하면 자살하고, 툭하면 흉기를 들고 싸우는 것의 원인이 폭격 소음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소름 끼치는 전율 속에, 제가 집에서 정성스럽게 기르던 고양이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방문 앞에 와서 ‘야옹’ 소리를 내며 잠을 깨웠다고 해서 다리를 올무에 씌워 마을 앞산으로 끌고 가서 생매장하고, 다음날 그 새끼들조차 바윗돌에 쳐서 죽이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저 자신의 포악성을 뒤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0여 년 전부터 마을 교회에 나가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내 포악한 성격의 장애를 교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만, 지속되는 폭격 소음 때문에 정신적 장애 요인은 잘 순화가 되질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폭력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다가 또다시 끓어오르는 폭력의 열기를 억누르지 못한 것일까. 도대체 이렇게 당혹스럽게 다가온 폭력의 기원은 무엇일까.
기자는 4월17일 경기 오산에 있는 화성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그를 찾아갔다. 그사이 그는 폭력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돼 있었다. 전만규씨는 기자를 보자,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철창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전씨의 눈매와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불과 닷새 전,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그가 운을 뗐다.
“마귀에 씌었었나 봐요. 마치 악몽을 꾼 것처럼… 원래 내 성격이 어떤 일이 일어나면 확 폭발되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치밀어 올라가지고….”
“스트레스에 의한 폭력 행동일 수도”
사실 전씨는 여러 자리에서 자신의 문제를 고백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 사건’만이 아니었다. 그는 2000년 5월23일 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기자) 아버님도 자살을 했다고 들었는데.
=(전만규) 그렇다. 아버님뿐 아니라 이웃 주민 수십 명이 자살했다. 매향1리가 170가구인데 1960년대 이후 체크된 자살자 수가 32명이다. 그중 죽은 사람이 28명이고 4명은 미수에 그쳤다. 80년 12월12일에 아버지가 목을 매서 자살을 하셨다. 나도 할복자살을 기도했지만 미수로 그쳤다. 그때 난 자살을 해야겠다는 의지보다는 ‘욱’하는 마음이 있었다.
전씨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선 기자 앞에서 셔츠를 올렸다. 배에는 20cm 정도의 두꺼운 칼자국이 나 있었다. “1998년 마을에서 하는 일이 잘 안 돼서 시도한 할복자살의 흔적”이라고 했다. 생명을 던져버릴 정도로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4시간 동안 대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아버지의 죽음은 전씨가 폭격장 폐쇄 운동에 뛰어든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1980년 중동 쿠웨이트에 건설 노동자로 나갔다. 월급 명세서에 620시간이 찍힐 정도로 미친 듯이 일했다. 하지만 그가 목돈을 들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버지가 석 달 전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전만규씨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은 평소 전씨가 자신의 폭력 성향을 의식해온 점을 주목했다. 서 국장이 말했다. “그냥 형사사건 다루듯 해선 안 된다. 전만규는 정신과적인 정밀진단을 받아야 한다. 수사 과정에서 스트레스에 의한 폭력 행동인지 검사해봐야 한다.”
반미 투쟁과 폭력성 관계는 부인해
인질극 사건 뒤, 전씨의 아내 박미숙씨는 화성 발안면에 있는 종합병원의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전씨가 휘두른 주먹과 흉기 때문에 박씨의 몸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박씨의 다리는 인대 파열이 우려될 정도였고, 눈은 치료하지 못할 만큼 크게 부었다. 박씨는 최근에야 상황이 호전돼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박씨를 여러 차례 면회한 이정원(47) 매향2리 이장은 “무엇보다 박씨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크다”고 전했다.
전만규씨는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행사했을까. 매향리의 한 주민은 “1년에 한두 번 부부가 싸우는 걸 봤다”며 “서로 때리지는 않더라도 목소리 높이며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전씨에게 평소 아내를 때리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평소에 욕설을 하긴 하지만 그런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다. 오히려 같이 싸우는 편이다. 내가 한 번 때리면 두 번 세 번 날아오니까…”라고 말했다.
전씨가 이날 벌인 행동은 모든 사람들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평화운동가에게서 돌출한 폭력은 마치 원시적인 소설을 보는 듯하다. 그는 왜 아내에게 흉기를 들었을까. 전통적인 가부장적 유산과 사유구조를 그가 그대로 이어받았을 수 있고, 20년의 거친 반미투쟁 속에서 폭력성을 키워왔을 수 있다. 하지만 전씨는 후자의 이유에 대해선 “오히려 투쟁 속에서 많은 걸 발견했고 배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검증해야 할 부분은 미군 폭격장 소음과 그의 행동 사이의 인과관계다. 전씨는 자신의 억누를 수 없는 감정과 행동이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소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전씨는 “이참에 정신감정도 신청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매향리는 한국 평화운동의 아이콘이 돼왔다. 전만규씨는 한국 평화운동 최초의 승리를 이끈 인물이다.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은 “일본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의 시민운동 활동가들은 전만규를 안다”고 말했다. 전씨는 외부 단체의 의식화나 조직화 없이도 주민들을 조직해 미군기지를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역시 미군기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일본 활동가들에게 그는 모범이었던 것이다.
“매향리엔 ‘욱’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전만규씨는 “(미군 폭격장 폐쇄의) 일등공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끔찍한 일을 저질러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치장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며 “죽어도 죗값을 치르고 죽겠다”고 말했다. 기자는 전씨와의 짧은 ‘철창 인터뷰’를 마쳤다.
4월19일 이정원 매향2리 이장은 흥미로운 말을 해주었다. 올해 초 매향리 주민 한 명이 특별한 이유 없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60대 아주머니인 김미정(가명)씨는 18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수발하고 있었다. 김씨는 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술을 먹다가 눈물을 흘리더니, 조용히 1층에 내려가 제초제를 마시고 숨졌다. “평소에도 약주를 드시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게 자살할 사람은 아니”라고 이정원 이장이 말했다. 그는 “매향리엔 이렇게 ‘욱’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소음과 주민 스트레스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추진위원회는 조만간 10개 마을 대표 등이 참석한 이사회를 열어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정원 이장은 “평화마을은 예정대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해배상소송 승소로 얻은 위자료의 일부로 이미 기금을 적립했고, 평화마을을 만들기 위한 영농법인도 설립했다.
폭격 소음이 걷힌 매향리에 평화가 찾아왔음에도 주민들은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 4월17일 다시 매향리에 찾아가니, 바다 너머로 농섬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수목이 울창해서 ‘농섬’이라 불렸던 이 섬은 공사판의 모래사장처럼 폐허로 서 있었다. 언제야 농섬은 푸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언제야 매향리 사람들은 평안을 얻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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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매향리에서 1.6km 떨어진 농섬을 표적으로 미국 공군 전투기의 사격과 폭탄 투하 연습이 시작됐다. 1954년 미군이 매향리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1968년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이 발표되면서부터 이곳은 공식적인 폭격장으로 이용됐다.
몇 차례의 땅 징발을 통해 매향리는 38만 평의 육상 사격장과 500만 평의 해상 폭격장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갯벌에서 굴을 캐다가 폭탄 파편에 맞아도, 집 안 마당에 포탄이 떨어져도 군사독재 시절 주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요된 침묵의 연대에 균열이 난 건 1988년. 전만규씨가 당시 김포공항 소음 피해에 맞서던 김포 고강동 주민들을 만나고 난 뒤였다. 그 뒤 그는 매향리 대책위를 꾸렸고, 주민들과 함께 긴 싸움을 시작했다.
주민들이 미군과 가장 날 서게 대립한 건 2000년 5월이었다. 미군의 오폭 사고로 집들이 금이 가는 등 피해가 발생하자, 주민들은 곡괭이와 낫을 들고 미군 관제탑에 진입해 군사시설을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 뒤로 매향리는 전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4년 3월 매향리 주민들은 승리했다. 대법원이 매향리 주민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음피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원고승소 확정판결을 내린 것이다. 원고는 각각 1천만원 남짓의 위자료를 받았다. 그리고 2005년 8월, 미군은 매향리 폭격장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20년 가까운 투쟁 속에서 정부 차원의 정밀한 주민 건강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시민단체가 2000년 약식조사를 벌인 정도뿐이었다.
경기 평택시가 2005~2006년 벌인 건강조사는 매향리에 시사적이다. 평택시는 평택 미군 공군기지 주변 주민과 이에 대한 대조군을 설정해 1500여 명을 대상으로 소음 피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군기지 주변 아이들은 전투기와 헬기 소음 때문에 공군기지에서 5km 떨어진 인근 지역 아이들보다 우울증, 산만행동, 자폐증 등이 1.5~2배 정도 더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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