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와 ‘어떻게’는 희미하고 ‘누구와’는 공백인 여권 대통합 이정표…여러 정파·시민사회·전문가 집단 중 상품성과 잠재력 높아 대세론 확산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시한부 인생.’
열린우리당의 운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렇다. 아등바등 살아보려는 열린우리당 사람들이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지만, 이만큼 적확한 표현은 없다.
2월14일 정세균 의장을 비롯해 새 최고위원을 합의 추대한 열린우리당의 지상 최대 과제는 통합신당 건설이다. 잘되면 열린우리당을 해체하고 신당으로 합류하는 것이고, 잘못되면 제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통합신당 만들기에 실패한 뒤 열린우리당이라는 간판을 유지한 정치세력이 잔존할 수도 있지만, 이름만 같을 뿐 “이 당이 그 당”이라고 얘기하기 힘든 수준으로 초라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통합신당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열린우리당은 사라진다.
결국은 ‘도로 열린우리당’ ‘도로 민주당’?
열린우리당은 정 의장 체제의 등장 이후 최악의 고비는 넘겼다고 자평한다. 1월 말부터 전당대회 직전까지 이어진 천정배 그룹, 김한길·강봉균 그룹의 연쇄 탈당 행렬이 멈췄다. 2월28일엔 정 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합신당추진위원회(통추위)를 출범하고 4월 원탁회의-6월 창당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전국을 돌면서 치르는 완전국민경선(오픈프라이머리)에 걸리는 시간을 두 달로 잡고, 9월 정기국회 이전에 대선 후보 선출을 마무리지으려면 최소한 6월에는 창당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6·10 항쟁 20돌 기념일에 즈음해 창당을 하면 정치적 효과를 배가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문제는 그 이정표가 너무 앙상하다는 점이다. ‘어디로’와 ‘언제까지’는 비교적 분명한데 ‘누가’와 ‘어떻게’는 희미하고 ‘누구와’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정 의장은 2월26일 기자간담회에서 통합 대상과 관련해 “크게 보면 두 그룹이다. 정파, 정당이 있을 것이고 시민사회나 전문가 집단이 있다. 하늘에서 특별한 분들을 모셔오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분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고 잘 아시는 여러 정파와 시민사회, 전문가 집단, 이런 분들이 대상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 의장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실제 정치 세력이나 인물에 대입시켜보면 이렇다. 정파는 열린우리당에서 떨어져나간 탈당파다. 김한길·강봉균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통합신당모임’은 국회에 제3의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했다. 이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천정배·최재천·이계안 의원 등은 정책 차별화를 내세우며 ‘민생정치모임’을 만들었다. 정당은 민주당이다. 시민사회와 전문가 집단은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있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어느 쪽도 쉽지 않다. 우선 열린우리당 탈당파는 열린우리당이 차린 ‘밥상’에 같이 앉을 생각이 없다. 열린우리당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통합신당을 바라는 여러 세력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한 귀퉁이를 차지한다고 해도, 열린우리당이 끼면 될 일도 안 된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열린우리당 주도의 통합신당 추진 흐름이 부진할 경우, 몸만 열린우리당에 남아 있는 상당수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탈당파 중심으로 교통정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민주당은 4월3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민주당의 이낙연·김효석 의원 등이 열린우리당의 임종석·김부겸 의원 등과 접촉하면서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지만 민주당의 속내는 복잡하다. 새 지도부가 선출될 때까지 결정이 늦춰질 가능성이 크다. 열린우리당에서 “‘도로 민주당’이라는 비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며 절박한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움직임은 없다.
그렇더라도 ‘정치밥’을 먹어본 사람들은 대선이 가까워올수록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미분과 적분을 거듭하면서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 하지만 ‘도로 열린우리당’ ‘도로 민주당’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통합을 주장하는 범여권의 인사들은, 때묻지 않은 정치권 바깥의 시민사회 세력이나 전문가 집단이 촉매제가 돼야 화학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세력으로서 의미 있는 존재는 없는 상태다. 정치와 무관했던 시민단체 출신 인사나 전문가들이 정당을 만든 뒤, 통합신당을 바라는 여러 정치세력들과 결합하는 방식을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여기고 있지만, 이를 현실화시킬 중심 세력이 없다. 그래서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 탈당파(통합신당모임·민생정치모임),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 통합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세력들의 책임 있는 인사들은 부지런히 대선 주자를 찾아다니고 있다. 정세균 의장 표현을 빌리면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땅에서 솟아오른’ 정도의 메시아를 찾고 있는 것이다.
선호도 조사 1% 안팎, 충청권에선 표 쏠림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사는 정운찬 전 총장이다. 범여권에는 빠른 속도로 ‘정운찬 대세론’이 퍼지고 있다. 정운찬은 대선 주자로 거론돼왔던 김근태·정동영·천정배,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입에 오르내리고 실제 여론조사에 등장하기도 하는 강금실·문국현·박원순·진대제, 새 ‘후보군’으로 등장한 김혁규·한명숙 등을 통틀어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로 꼽히고 있다. 대세론은 ‘유일 대안론’으로 커질 조짐이다. 열린우리당 통추위의 한 의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정운찬밖에 없다.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정세균 의장의 경우엔 “열린우리당 내에도 진주가 있는데 흙 속에 묻혀 안 보이는 측면이 있다. 시민사회나 전문가 집단 가운데 가능성 있는 좋은 후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지당한 일”(2월26일 기자간담회)이라는 원칙적인 의견만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당내 일각에서는 이런 흐름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동영 전 의장과 가까운 김현미 의원은 “통추위 지도부가 하려는 일은 민주당과의 통합, 정운찬 모셔오기 아니냐”고 말했다. 당내 재선 의원 그룹을 중심으로 한 통합 논의의 실무를 주도하는 열린우리당의 한 보좌관은 “통추위가 외부 인사에 열려 있다고 하지만 형식적이 될 가능성이 높고 정운찬으로 향해 가는 것 같다”고 당내 분위기를 전했다.
그런데 범여권에 불고 있는 ‘정운찬 열풍’은, 그를 잠재적 대선 주자군에 포함시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만을 놓고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선 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국민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러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그는 1% 안팎의 지지율을 오갔다. 그럼에도 범여권은 그를 경쟁력 있는 대안으로 본다. 바로 상품성과 잠재력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에서 전략가로 꼽히는 배기선 의원은 정 전 총장의 ‘상품성’을 높게 쳤다. 배 의원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철학과 비전 △그것을 구체화하고 구현할 수 있는 전략 △시스템 플레이를 해낼 수 있는 리더십 등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전제한 뒤 “지역균형 선발을 통해 지방 학생들을 배려한 정책을 포함해 정운찬은 서울대 총장을 지내면서 나름대로 그런 3가지 부분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후하게 평가했다. 배 의원은 또 “이번 대선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경제와 교육인데,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학 교수 중 한 명이자 서울대 총장으로서 교육계에 오랫동안 있었던 점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지역구도가 대선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정 전 총장이 충청도 공주 출신이라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한국지방정치학회(회장 유재일 대전대 교수)가 2월10일 (주)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대전·충남 지역 성인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3.1%포인트)에서 여권의 잠재적 대선 후보 선호도를 묻는 질문에 정운찬 전 총장은 25.3%를 얻어 1위를 기록했다. 충청권에서 그가 갖는 영향력과, 지난 두 차례의 선거에서 연합의 대상이기만 했던 충청권이 그에게 보내는 기대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IMAGE4%%]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호남과 충청권의 연합은 영남 지역주의가 살아 있는 한 거의 (대선에서 이기기 위한) 유일한 대안이다. DJ는 JP와의 연합으로, 노무현은 공약으로 그렇게 했다. 정운찬은 충청권에서 표 쏠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가 충청 출신으로 지역적으로는 호남에 큰 뿌리를 두고 있는 범여권 후보로 나설 경우, 충청권과 호남 세력의 연합의 구심점으로서 큰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셈법이다. 물론 이러한 지역구도를 놓고 상품성을 따지는 것은 선거판에서 자꾸만 퇴색해가는 지역분할의 한계를 감안하고 들어야 할 부분들이다.
‘제2의 이회창’ 될지도
정 전 총장이라고 강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약점도 있다. 우선 그의 ‘출신성분’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경기고-서울대-미국 유학-서울대 총장이란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점은,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지만 서민 대중들이 정서적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단순 비교하긴 무리이겠지만, 이 전 총재의 엘리트, 귀족 이미지는 그가 대선을 치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들들의 병역비리 의혹 공방이 ‘대쪽’ 이미지를 망쳤다면, ‘가회동 고급 빌라’는 그의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또 서울대 총장을 무난하게 했다손쳐도 정 전 총장은 학교 담장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한때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유일 대안’으로 꼽히던 고건 전 총리는 행정과 정치를 두루 알고 있는 편이었는데도 중도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정 전 총장이 정치권에 들어와 예비 대선 주자가 되는 순간 수많은 ‘매’가 쏟아질 텐데 이를 견딜 수 있는 맷집을 갖추고 있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그래서 범여권 일각에서는 특정 인물 중심의 통합신당 추진 방식이 위험하다는 경고가 나온다. 그렇다면 세력들이 합치는 방식이나 정당, 정치세력들이 통합하는 형태밖에 없을 텐데 그 길도 지뢰밭이다. 여러모로 범여권의 갑갑증은 커지고 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전광훈 “탄핵 반대 집회에 사람 데려오면 1인당 5만원 주겠다”
공수처 차량 파손하고 ‘난동’…윤석열 지지자들 ‘무법천지’ [영상]
윤석열 구속되면 수용복 입고 ‘머그샷’
윤석열,구치소 복귀…변호인단 “좋은 결과 기대”
윤석열 지지자 17명 현장 체포…서부지법 담 넘어 난입
“우리 엄마 해줘서 고마워, 매일 올게”…눈물의 제주항공 추모식
“사필귀정, 윤석열 구속 의심치 않아”…광화문에 응원봉 15만개 [영상]
경호처 ‘윤석열, 하늘이 보낸 대통령’ 원곡자 “정말 당혹”
지지자 몰려 ‘아수라장’…“고생한다고 대통령이 손 흔들어주셔” [영상]
[속보] 윤석열 구속영장 심사 저녁 6시50분 종료…4시간50분 진행